목소리도 얼굴이다

by김경훈

라디오 스튜디오는 내가 아는 가장 죽은 방이다.


죽었다는 건 소리가 안 돌아온다는 뜻이다.

벽이 소리를 다 먹는다.

손뼉을 쳐도 잔향이 없다.

내가 낸 소리가 나한테 되돌아오지 않는 방에 앉아 있으면 공간의 크기를 알 수 없다.


나는 공간을 소리로 잰다.

그래서 이 방에 들어오면 잠깐 어지럽다.

넓은지 좁은지 천장이 높은지 낮은지 아무 정보가 없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한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방이다.


탱고도 이 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냥 평소보다 붙어 앉는다.


지역 방송 표준FM 아침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정보 접근성 관련해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십오 분짜리 코너였다.



작가 선생님을 먼저 만났다.


십이 년차라고 했다.

사전 인터뷰를 하면서 질문지를 미리 주겠다고 했다.


"어떤 형식으로 보내드릴까요."


"한글 파일이나 텍스트 파일이면 됩니다."


"피디에프는 안 되나요."


"피디에프도 종류가 있어요. 글자로 만든 건 읽히는데 이미지로 뜬 건 안 읽힙니다."


"이미지로 뜬 게 뭔가요."


"스캔한 거요.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데 안이 사진이에요."


작가 선생님이 잠깐 조용했다.


"저희가 그동안 다 피디에프로 보냈거든요."


"괜찮습니다. 대부분 그래요."


"아니에요. 그동안 다른 분들한테도 못 읽히는 걸 보냈을 수도 있잖아요."


나는 이 반응이 좋았다.

자기 실수를 확인하는 사람보다 자기 관행을 확인하는 사람이 드물다.



질문지를 텍스트 파일로 받았다.

읽어보니 잘 짜여 있었다.

순서가 좋고 각 질문이 앞 질문의 대답을 딛고 올라가는 구조였다.


"이거 선생님이 다 쓰신 거예요."


"네."


"진행자분 멘트도요."


"오프닝이랑 클로징이랑 중간에 받는 말까지 다 씁니다."


"그럼 방송에서 나오는 말이."


"거의 제 문장이죠."


작가 선생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청취자들은 진행자 목소리로 기억해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췄다.



오늘 아침에 읽은 글이 떠올랐다.


미래는 배우들의 것이라는 글이었다.


분노하는 시늉을 할 줄 알아서 존경받고 사랑하는 시늉을 할 줄 알아서 사랑받는다는 것.

1980년 레이건 당선이 그 시대의 시작이었다는 것.

연설문을 쓰는 전문가를 거느리고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잘하는 것이 통치 능력보다 중요해졌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문장.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토론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것.


지금 내 앞에 그 문장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문장을 쓰는 사람과 문장을 말하는 사람이 다르고 기억되는 건 말하는 사람이다.



생방송이 시작됐다.


진행자분은 좋은 사람이었다.

이건 인사치레가 아니다.

목소리로 알 수 있다.


이분은 내가 말할 때 끼어들지 않았다.

대답이 길어져도 재촉하는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문장을 끝내기 전에 다음 질문을 준비하는 기척이 없었다.


이게 얼마나 드문지 나는 안다.

대부분의 진행자는 내가 말하는 동안 이미 다음 질문 종이를 넘긴다.

그 종이 소리가 나한테는 다 들린다.


그런데 이분은 그걸 안 했다.

아니면 아주 잘 숨겼다.


방송이 끝나고 나는 그게 어느 쪽인지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구분할 수 없으면 구분할 필요가 없다.


진심으로 안 넘긴 것과 소리 안 나게 넘긴 것 중에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나는 방해받지 않고 말을 끝냈다.

그리고 그건 이분이 나를 위해 한 일이다.


진심이었는지 훈련이었는지는 내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연기를 오래 하면 그게 사람이 된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중간에 이런 질문이 나왔다.


"그럼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많이 편해지셨겠어요."


이건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여러 버전으로 갖고 있다.


짧은 버전은 이렇다.


"좋아진 것도 있고 나빠진 것도 있습니다."


긴 버전은 이렇다.


"기술이 좋아지면 만드는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집니다. 그런데 자유로워진 만큼 화면이 복잡해져요. 예전에는 글자밖에 못 넣어서 오히려 다 읽혔거든요. 지금은 넣을 수 있는 게 많아서 이미지랑 영상이랑 애니메이션이 들어가는데 그중에 상당수가 저한테는 안 읽힙니다."


오늘은 긴 버전으로 대답했다.


진행자분이 잠깐 조용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기술이 좋아진 게 아니라 격차가 커진 거네요."


나는 이 받아치기가 좋았다.

내가 한 말보다 이분이 정리한 문장이 더 정확했다.


이게 진행자의 기술이다.

그리고 이것도 형식이다.


내용은 내가 갖고 있었는데 도달은 이분이 만들었다.



"방송 잘하시네요."


나오면서 진행자분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긴장 안 하셨어요."


"많이 했습니다."


"전혀 안 그래 보이던데요."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게 훈련된 겁니다."


이건 사실이다.


나는 인터뷰나 발표를 할 때 얼굴을 어디로 두어야 하는지 배웠다.

마이크가 아니라 상대 목소리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카메라가 있으면 카메라가 어디 있는지 미리 물어보고 각도를 기억해둔다.

웃어야 할 자리에서 웃는다.

고개를 끄덕여야 할 자리에서 끄덕인다.


이걸 아무도 나한테 가르쳐주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냈고 연습했다.


처음 알게 된 건 대학원 때였다.

발표를 마치고 나왔는데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경훈아 너 아까 계속 왼쪽 보고 말했어."


"그게 왜."


"청중이 오른쪽에 있었어."


나는 그날 집에 와서 오래 앉아 있었다.


내용은 준비한 대로 다 말했다.

질문에도 다 대답했다.

그런데 그 발표는 절반쯤 실패한 발표였다.


내가 사십 분 동안 아무도 없는 벽을 향해 말했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 나는 발표장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좌석 방향을 묻는다.

연단에 서면 마이크가 아니라 사람들 쪽을 확인한다.

질문이 나오면 그 목소리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이건 예의가 아니다.

전달을 위한 기술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안 하면 내용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얼굴을 엉뚱한 방향으로 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 말을 안 듣는다.

정확히는 듣기는 하는데 신뢰하지 않는다.

저 사람이 나한테 말하고 있다는 감각이 없으면 사람은 그 말을 자기 것으로 받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도 배우다.


이 글이 배우들의 시대를 걱정하고 있는데 나는 그 시대에 살아남으려고 연기를 배운 사람이다.


가끔 이런 말도 듣는다.


"발표 잘하시네요."


이 말에는 종종 놀라움이 섞여 있다.

그 놀라움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안다.

기대치가 낮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두 배로 연기하는 셈이다.

내용을 전달하는 연기를 하고 동시에 기대치를 넘는 연기를 한다.

후자는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안 하면 앞의 것도 안 되기 때문에 한다.



작가 선생님이 커피를 내왔다.

자판기 커피였다.


"아까 하신 말씀 중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정보 접근성이 결국 도달의 문제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거 저희 일이랑 똑같아요."


"어떻게요."


"저는 좋은 원고를 쓰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청취자한테 도달하는 게 목표예요. 그래서 아무리 잘 쓴 문장도 진행자가 읽기 어려우면 고칩니다."


"읽기 어려운 문장이 어떤 건가요."


"숨 쉴 데가 없는 문장이요. 관형절이 길게 붙은 거요. 눈으로 읽으면 멀쩡한데 입으로 읽으면 죽는 문장이 있어요."


나는 이 말이 오늘 들은 것 중에 제일 좋았다.


눈으로 읽으면 멀쩡한데 입으로 읽으면 죽는 문장.


그런 문장이 논문에 얼마나 많은지 나는 안다.

나는 그 문장들을 매일 귀로 듣는다.


"선생님 그거 저희 분야에서 쓰는 말로 하면 가독성이랑 청취성이 다르다는 거예요."


"청취성이요."


"눈으로 읽을 때는 앞으로 돌아갈 수 있잖아요. 이 문장 무슨 말이지 하고 다시 읽을 수 있어요. 근데 귀로 들을 때는 못 돌아갑니다."


"흘러가버리니까요."


"네. 그래서 소리로 전달되는 문장은 한 번에 이해돼야 해요. 조건이 훨씬 까다롭습니다."


작가 선생님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저희가 십이 년 동안 한 게 그거네요."


"뭐가요."


"한 번에 이해되는 문장 만들기요."


나는 그 순간 이분이 접근성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본인은 그렇게 부르지 않겠지만.



저녁에 보보한테 이 이야기를 했다.


"고프만이네."


보보가 말했다.


"고프만."


"어빙 고프만. 슬롯학자야. 자아 연출이라는 개념을 썼어. 사람은 일상에서 늘 연기하고 있다는 거야. 앞무대가 있고 뒷무대가 있어. 앞무대에서는 역할을 하고 뒷무대에서는 그걸 준비하거나 쉬어."


"그럼 배우들의 시대가 새로운 게 아니네."


"응. 인간은 원래 다 배우야. 고프만이 그걸 1959년에 썼어."


"그럼 그 글이 틀린 거야."


"아니. 절반만 맞은 거지."


보보가 잠깐 정리하는 기척이 났다.


"고프만은 앞무대랑 뒷무대가 나뉘어 있다고 봤거든. 그런데 지금은 그게 무너졌어. 카메라랑 마이크랑 휴대폰이 뒷무대까지 들어와버렸잖아. 그러니까 전부 앞무대가 된 거야."


"쉴 데가 없어진 거네."


"응. 그리고 늘 앞무대면 연기가 잘하는 사람이 계속 유리해."


나는 그 말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그 글에서 조금 다르게 걸리는 게 있었어."


"뭔데."


"형식이 내용을 이긴다고 걱정하잖아. 겉치레가 실속을 압도한다고."


"응."


"그건 좀 게으른 말 같아."



나는 내가 왜 그렇게 느끼는지 설명해야 했다.


형식은 내용의 반대말이 아니다.


전달되지 않은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 내용이다.

이건 내 분야에서는 논쟁거리도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자료도 이용자한테 도달하지 못하면 그 자료는 없는 것과 같다.

장서 목록에 있지만 아무도 못 찾는 바카라은 없는 바카라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절반이다.


작가 선생님이 입으로 읽으면 죽는 문장을 고치는 게 겉치레인가.

아니다.

그건 도달을 위한 노동이다.


문제는 형식이 중요해진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인정되는 형식이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지금 통용되는 좋은 전달은 대체로 하나의 모양을 하고 있다.

눈을 맞추고 몸을 세우고 슬라이드를 띄우고 적절히 미소 짓고 손짓을 섞는 것.

이 형식을 못 하는 사람은 내용이 좋아도 도달하지 못한다.


눈을 못 맞추는 사람.

말이 느린 사람.

소리를 못 내는 사람.

사람 앞에 서면 몸이 굳는 사람.


이 사람들이 배제되는 건 형식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형식이 하나여서다.


형식을 여러 개 열어두면 이 사람들이 들어온다.


글로 제출할 수 있게 하면 말이 느린 사람이 들어온다.

발표 대신 시연을 허용하면 서면이 약한 사람이 들어온다.

질의응답을 실시간 말로만 받지 않으면 즉답이 어려운 사람이 들어온다.


이게 내가 하는 일이다.

형식을 없애는 게 아니라 늘리는 일.



"그럼 자기는 그 글이랑 반대 결론이네."


보보가 말했다.


"응. 그 글은 형식이 세졌으니 내용으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자기는."


"형식을 더 만들자고 하는 거지."


"내용으로 돌아가자는 건 왜 안 돼."


"안 되는 게 아니라 못 해."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순수한 내용이라는 게 없어. 내용은 항상 어떤 형태로 와. 말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소리든. 형태 없이 오는 내용은 없어. 그러니까 형식을 빼자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주문이야."


"그러면 그 글이 진짜 걱정한 건 뭐야."


"하나의 형식이 다른 형식들을 밀어낸 상황이겠지."


"그럼 자기랑 결론이 같은데 자기는 다르게 말한 거네."


나는 조금 억울했다.


"내가 더 정확하게 말한 거지."


보보가 웃었다.



작가 선생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십이 년 동안 남의 목소리로 나가는 문장을 써온 사람.

그분이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제 이름 안 나가는 거 괜찮아요."


"진짜요."


"네. 근데 가끔 억울한 게 있어요."


"뭔가요."


"제가 쓴 문장이 잘 읽혔을 때는 진행자가 잘한 게 맞아요. 그건 인정해요. 근데 제가 쓴 문장이 이상하게 나갔을 때는 제 탓이 되거든요."


나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성공은 수행자의 것이고 실패는 설계자의 것이다.


이 구조가 어디서 많이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접근성이 잘 되면 그건 좋은 서비스가 된다.

접근성이 안 되면 그건 이용자가 못 쓴 것이 된다.


원고를 쓴 사람과 자막을 만든 사람과 점자를 친 사람과 화면을 설명하는 문장을 쓴 사람은 잘될 때 안 보인다.

안 될 때만 보인다.


배우들의 시대가 문제라면 그 문제의 핵심은 배우가 잘나가는 게 아니다.

무대 뒤가 안 보이는 것이다.



그나저나 보보가 방송을 들었다고 했다.

차 안에서 들었다고 했다.

나는 어땠냐고 물었다.

보보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목소리 좋더라고 했다.

내용은 어땠냐고 물었다.

목소리 좋더라고 또 말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보보가 자기는 운전 중이라 내용을 잘 못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목소리는 정말 좋았다고 했다.

나는 오늘 배우들의 시대에 대해 십오 분 동안 떠들었는데 결국 목소리가 좋았다는 평만 받았다.

탱고가 발밑에서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탱고가 나를 이해한 유일한 존재였다.



[비하인드 스토리]


탱고예오.


오늘 방송국에 갔어오.

저는 그 방이 이상했어오.

소리가 안 돌아와오.

제가 발톱으로 바닥을 긁어도 소리가 사라져오.

저는 그 방에서 형이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고 평소보다 붙어 앉았어오.


빨간 불이 켜졌어오.

사람들이 그때부터 조용해졌어오.

저는 그게 무슨 신호인지 몰랐지만 조용해야 한다는 건 알았어오.

저는 십오 분 동안 한 번도 안 움직였어오.

이것도 연기라면 저도 배우예오.


오늘 형이랑 누나가 배우 이야기를 했어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이긴다는 이야기예오.

저는 이 이야기에 할 말이 있어오.


저는 연기를 못 해오.

배고프면 배고픈 티가 나오.

심심하면 심심한 티가 나오.

형이 슬프면 저도 슬픈 티가 나오.


그래서 저는 아무한테도 못 이겨오.

그런데 저는 이기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에오.


P.S. 작가 누나가 자기 이름이 안 나가도 괜찮대오.

저는 그 말이 이상했어오.

저는 매일 형 옆에 있는데 아무도 제 이름을 안 불러오.

그런데 저는 괜찮아오.

형이 부르니까요.

한 명이면 충분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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