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 한 권을 받는 데 여덟 달이 걸렸다.
작년 가을에 신청했고 올해 여름에 연락이 왔다.
그 사이에 나는 그 바카라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두 번쯤 잊었다.
선생님 신청하신 자료 제작 완료됐습니다.
전화를 받고 나는 잠깐 무슨 바카라인지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국외 논문을 묶어 번역한 단행본이었다.
내 연구랑 직접 관련이 있는 바카라이고 그래서 신청했고 그리고 여덟 달을 기다렸다.
여덟 달 전에 나는 그 바카라이 급했다.
지금은 안 급하다.
그 사이에 다른 방법으로 절반쯤 우회했기 때문이다.
원서 일부를 파일로 구했고 저자 강연 영상을 찾아 들었고 인용된 부분은 다른 논문에서 재인용으로 확인했다.
여덟 달이면 사람은 어떻게든 살길을 찾는다.
그래도 나는 받으러 갔다.
여덟 달을 들여 누군가 만든 것을 안 받을 수는 없다.
대구점자도서관은 1996년에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만든 대체도서가 이만여 권이라고 한다.
삼십 년 동안 이만 권.
이 숫자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꽤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숫자를 옆에 놓으면 인상이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나오는 새 바카라이 육만 종쯤 된다.
한 해에 육만 종.
삼십 년에 이만 권.
내 세계는 매년 조금씩 넓어지는데 바깥 세계는 매년 육만씩 넓어진다.
격차는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벌어지고 있다.
사서 선생님이 자료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거 좀 오래 걸렸죠."
"괜찮습니다. 늘 그러니까요."
"저희도 답답해요."
"어디서 막히나요."
"파일이요."
나는 이 대답을 예상했다.
"출판사에서 한글 파일을 안 주면 저희가 못 만들어요. 종이바카라만 있으면 사람이 다 쳐야 합니다. 스캔해서 문자 인식을 돌려도 오타가 엄청나거든요. 표가 있으면 더 심하고 각주가 많으면 거의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요."
"이 바카라은요."
"파일 못 받았습니다."
"그럼 다."
"쳤습니다."
나는 손에 든 것을 다시 만졌다.
누군가 사백 몇 페이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옮겨 쳤다.
그리고 교정을 봤다.
점역 교정은 두 사람이 본다고 들었다.
한 사람이 읽고 한 사람이 확인한다.
여덟 달이 갑자기 짧게 느껴졌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나는 자리에 앉았다.
탱고가 발치에 엎드렸다.
이 도서관은 조용해서 탱고가 편해한다.
정확히는 소리가 적어서 덜 지친다.
냄새도 단순하다.
종이 냄새와 기계 냄새와 사람 냄새 몇 종류.
"어떤 바카라을 만들지는 어떻게 정하시나요."
사서 선생님이 잠깐 웃었다.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에요."
"신청이 많습니까."
"신청도 있고 저희가 고르는 것도 있고요. 근데 예산이랑 인력이 정해져 있으니까 결국 골라야 해요."
"일 년에 몇 권 정도 만드시나요."
"자체 제작은 백 몇십 종입니다."
나는 잠깐 계산했다.
육만 중에 백몇십.
"그러면 매년 오만 구천 몇백 권을 탈락시키시는 셈이네요."
사서 선생님이 아 하고 소리를 냈다.
"그렇게 말하니까 무섭네요."
"죄송합니다. 직업병입니다."
이것이 내 직업이다.
문헌정보학에서는 이걸 장서 개발이라고 부른다.
무엇을 소장할지 정하는 일이다.
학부 때 배울 때는 실무 절차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이게 권력 문제라는 걸 안다.
무엇을 들여놓을지 정하는 사람은 무엇을 없앨지도 정하는 사람이다.
이건 나쁜 뜻이 아니다.
누군가는 정해야 한다.
무한한 예산과 무한한 인력이 있는 도서관은 없다.
선택은 불가피하고 불가피한 선택에는 반드시 기준이 있고 기준에는 반드시 관점이 있다.
문제는 그 관점이 누구의 것이냐다.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바카라의 목록은 대부분 시각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이 정한다.
그건 악의가 아니라 구조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어떤 종류의 바카라은 계속 만들어지고 어떤 종류의 바카라은 계속 안 만들어진다.
수험서와 교양서와 문학은 만들어진다.
내가 연구에 필요한 해외 이론서는 여덟 달이 걸린다.
취미 서적은 거의 없다.
낚시 도감이나 자동차 정비 매뉴얼이나 위스키 테이스팅 노트 같은 것들.
그런 걸 왜 시각장애인이 읽겠냐고 아무도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는다.
그냥 목록에 없다.
없는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없다.
보보가 들어온 건 그 즈음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데리러 온 거다.
인사를 하고 옆에 앉으면서 물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한 해에 육만 종 나오는데 여기서 백몇십 종 만든다는 얘기."
보보가 잠깐 조용했다.
"그거 오늘 자기가 읽어준 거랑 정반대네."
"뭐가."
"검열 얘기."
나는 그제야 오늘 아침에 들은 것을 떠올렸다.
옛날에는 정보를 막아서 검열했는데 요즘은 정보를 넘치게 해서 검열한다는 이야기였다.
쏟아지는 무의미한 정보 속에서 중요한 게 뭔지 아무도 못 찾게 만든다는 것.
채널이 늘고 바카라이 쏟아지고 비슷한 음악이 사방에 깔리면 새로운 게 나와도 그 안에 묻혀버린다는 것.
매체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다양성은 줄어든다는 역설.
"자기는 그 반대 세계에 사는 거잖아. 넘치는 게 아니라 없는 거잖아."
"나는 가뭄이지."
"근데 결과는 같아."
나는 잠깐 멈췄다.
"어떻게 같아."
"둘 다 중요한 걸 못 찾잖아."
보보가 계속했다.
"넘쳐서 못 찾는 거랑 없어서 못 찾는 거랑 겪는 사람 입장에서는 똑같아. 필요한 게 손에 안 들어와. 다만 이유가 다르지."
"이유가 다르면 대응도 달라야 하는데."
"응. 근데 사람들이 그걸 구분 못 해. 요즘 정보 접근성 얘기하면 다들 이렇게 말하잖아. 요즘 세상에 정보가 얼마나 많은데."
"많이 듣는 말이야."
"그 말이 자기한테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는지 저 사람들은 몰라."
사서 선생님이 옆에서 조용히 웃었다.
"저희도 많이 들어요. 요즘은 다 전자바카라 나오지 않냐고요."
"전자바카라이면 되는 거 아닌가요."
"디아르엠 걸린 건 스크린리더가 못 읽습니다. 이미지로 만든 전자바카라도 못 읽고요. 겉으로는 전자바카라인데 안이 사진인 경우가 꽤 많아요."
"파일인데 파일이 아니네요."
"네. 파일 모양을 한 사진입니다."
이 대목이 오늘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정보가 존재하는 것과 접근 가능한 것은 다른 문제다.
세상에 바카라이 육만 종 나온다는 사실은 나한테 아무 의미가 없다.
그중 내가 읽을 수 있는 게 몇 종이냐가 내 세계의 크기다.
도서관 장서가 백만 권이어도 그중 대체자료가 이천 권이면 나한테 그 도서관은 이천 권짜리다.
그런데 통계는 백만 권으로 잡힌다.
이게 내가 논문에서 계속 쓰는 이야기다.
접근성 통계가 존재량으로 잡히면 격차가 안 보인다.
보유 자료 수가 아니라 특정 이용자가 실제로 도달 가능한 자료 수로 세야 한다.
이걸 안 세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없는 것을 세지 않으면 없다는 사실도 사라진다.
"마르쿠제 생각난다."
보보가 말했다.
"억압적 관용이라는 개념이 있어. 모든 의견을 다 허용하는 게 오히려 지배를 강화한다는 거야."
"왜 그렇게 되는데."
"다 허용하면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아지거든. 체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수많은 목소리 중 하나가 돼. 금지당하면 오히려 눈에 띄는데 다 허용되면 그냥 소음이 되는 거야."
"막는 것보다 섞어버리는 게 효과적이라는 말이네."
"응. 오늘 그 글이랑 같은 얘기야."
사서 선생님이 물었다.
"그럼 저희처럼 아예 적은 건 뭔가요."
보보가 잠깐 생각했다.
"그건 옛날 방식이죠."
"옛날 방식이요."
"그냥 못 보게 하는 거요. 근데 의도가 없다는 게 달라요."
나는 그 말에 덧붙였다.
"의도가 없어서 더 안 고쳐집니다. 검열은 누가 했는지가 있잖아요. 근데 이건 아무도 안 했어요. 그냥 안 만들어진 겁니다. 바카라임질 사람이 없으면 요구할 데도 없어요."
이야기가 길어지자 사서 선생님이 커피를 내왔다.
종이컵이었고 믹스커피였다.
나는 이런 것이 좋다.
"그런데 저는 요즘 다른 게 더 무서워요."
"뭔가요."
"인공지능으로 만든 대체자료요."
"자동 오디오북 같은 거요."
"네. 그거 빠르거든요. 사람이 여덟 달 걸릴 걸 며칠이면 합니다."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좋죠. 근데 품질 검수를 안 해요."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표를 읽으면 순서가 엉킵니다. 각주를 본문 중간에 읽어버려요. 인명이 틀리고 한자어를 잘못 읽어요. 그런데 겉으로 보면 대체자료가 생긴 거잖아요. 통계에는 잡힙니다."
"숫자는 늘어나네요."
"작년보다 열 배 늘었어요. 그런데 쓸 만한 게 열 배 늘었는지는 아무도 안 봅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 아침에 읽은 문장이 다시 생각났다.
졸작의 과잉이 독창적인 작품의 출현을 방해한다는 문장.
"이게 그거네요."
"뭐가요."
"가뭄이 끝나는 게 아니라 흙탕물이 들어오는 겁니다."
보보가 말했다.
"보드리야르가 그랬어. 정보는 점점 많아지는데 의미는 점점 줄어든다고."
"정보가 의미를 잡아먹는 거네."
"응. 정보가 늘어난 만큼 의미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희석되는 거야."
"근데 그거 저희 쪽에서는 더 위험해요."
사서 선생님이 말했다.
"왜요."
"저희는 원래 양이 적으니까요. 여기에 품질 낮은 게 대량으로 들어오면 비율이 확 무너집니다. 열 권 중에 아홉 권이 쓸 만하던 데가 백 권 중에 아홉 권이 쓸 만한 데가 되는 거예요."
"숫자는 열 배가 됐는데요."
"쓸 만한 건 그대로입니다."
나는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이게 오늘 배운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 같았다.
과잉으로 하는 검열은 원래 많은 쪽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적은 쪽에도 온다.
그리고 적은 쪽에 오면 훨씬 빠르게 무너진다.
걸러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오는 길에 복도에서 누군가 마주쳤다.
목소리로는 예순쯤 되어 보이는 분이었다.
사서 선생님이 인사를 하면서 소개해줬다.
"녹음 봉사 하시는 선생님이에요. 십사 년 되셨어요."
"십사 년이요."
"매주 화요일에 오십니다."
나는 인사를 하면서 물었다.
"한 권 녹음하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바카라마다 다른데요. 소설은 좀 빠르고 전문서는 오래 걸려요."
"왜 그런가요."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멈춰야 하거든요."
나는 이 대답이 좋아서 더 물었다.
"멈추면 어떻게 하시나요."
"찾아봅니다. 한자어는 특히 그래요. 잘못 읽으면 뜻이 달라지니까요. 저번엔 의학바카라이었는데 하루에 스무 페이지밖에 못 나갔어요."
"스무 페이지요."
"제가 그 분야를 모르니까요. 근데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읽으면 안 되잖아요."
나는 잠깐 그 말을 곱씹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읽으면 안 된다는 문장.
기계는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모르는 단어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냥 읽는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틀리게 읽는다.
그리고 그것이 대체자료로 집계된다.
이분은 멈춘다.
십사 년 동안 멈춰왔다.
"제가 예전에 들은 녹음 중에 유난히 편한 게 있었는데요. 혹시 선생님이셨을 수도 있겠네요."
그분이 웃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어느 쪽이든 감사합니다."
돌아가는 길에 나는 손에 든 자료를 계속 만지고 있었다.
여덟 달 걸린 물건이다.
누군가 사백 몇 페이지를 옮겨 쳤고 두 사람이 교정을 봤다.
"그 바카라 이제 안 급하다며."
"응."
"근데 왜 계속 만져."
나는 잠깐 대답을 못 했다.
"여덟 달이 손에 잡혀서."
"무슨 말이야."
"이게 얼마나 걸렸는지가 물건에 남아 있잖아. 파일로 받으면 이게 안 남아. 클릭 한 번이랑 여덟 달이 똑같이 느껴져."
보보가 조용해졌다.
"자동으로 만든 건 그게 없겠네."
"응.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야. 빠른 게 좋지. 나도 빠른 게 좋아. 근데 빠른 것만 남으면 여덟 달짜리는 안 만들어져. 파일 안 주는 출판사 바카라은 아무도 안 치게 될 거야. 자동으로 안 되니까."
"자동이 안 되는 건 사라지는 거네."
"그리고 그건 대체로 어려운 바카라이야."
우리는 잠깐 말없이 걸었다.
"그럼 결국 남는 게 뭐야."
"쉽고 파일 있고 표 없고 각주 없는 거."
"그게 세계가 되는 거야."
"내 세계는 그렇게 될 수도 있지."
나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조금 우울해졌다가 다시 생각했다.
"근데 그건 사실 자기 세계도 마찬가지야."
"내 세계."
"알고리즘이 자기한테 뭘 보여줄지 자기가 정해. 자기가 어제 본 거랑 비슷한 걸 보여주잖아. 자기가 안 본 것 중에 좋은 게 있어도 자기는 그게 있는 줄도 몰라."
보보가 잠깐 멈췄다.
"그러네."
"우리 둘 다 여과된 세계에 사는데 나는 그게 보이고 자기는 안 보이는 거야."
"자기는 왜 보여."
"여덟 달 걸리니까. 느리면 보여."
탱고가 앞장서서 걸었다.
그나저나 보보가 집에 와서 그 자료를 한참 들여다봤다.
자기도 여덟 달을 좀 만져보고 싶다고 했다.
만지더니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말해줬다.
보보가 억울해하면서 그럼 자기는 여덟 달을 어떻게 확인하냐고 물었다.
나한테 물어보면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건 자기가 나한테 의존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동안 자기가 나한테 읽어준 게 몇 권인지 세어보라고 했다.
보보가 조용해졌다.
오늘은 내가 이겼다.
[비하인드 스토리]
탱고예오.
오늘 점자도서관에 갔어오.
저는 이 도서관이 좋아오.
조용해오.
소리가 적으면 저는 덜 피곤해오.
사람들이 이걸 잘 몰라오.
저는 냄새도 많이 맡지만 소리도 많이 들어오.
시끄러운 곳에 오래 있으면 저녁에 축 처져오.
오늘 형이 바카라을 받았어오.
여덟 달 걸렸대오.
저는 여덟 달이 얼마나 긴지 알아오.
계절이 두 번 바뀌는 거예오.
저는 계절을 냄새로 세어오.
오늘 형이랑 누나가 검열 이야기를 했어오.
옛날에는 못 보게 해서 검열했는데 요즘은 너무 많이 줘서 검열한대오.
저는 이 이야기를 이해했어오.
산바카라할 때 냄새가 너무 많은 곳이 있어오.
시장 같은 데오.
거기서는 오히려 중요한 냄새를 놓쳐오.
냄새가 너무 많으면 아무 냄새도 아니게 돼오.
그래서 저는 중요한 곳에서는 일부러 천천히 걸어오.
형은 제가 왜 느려지는지 몰라오.
냄새를 줄이려고 그러는 거예오.
형이 느리면 보인다고 했어오.
저는 이 말이 오늘 제일 좋았어오.
저는 매일 형보다 느리게 걸어오.
그래서 제가 형보다 많이 봐오.
이견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오.
P.S. 사서 선생님이 저를 오래 쳐다보셨어오.
만지지는 않으셨어오.
근무 중인 걸 아시는 것 같았어오.
저는 이런 어른이 좋아오.
아쉽기는 하지만 좋아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