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되는 순간 사라지는 것

키르케고르가 말한 자기 자신

by김경훈

요즘 사람들의 하루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못 본 강의를 듣는다. 출근길에는 오디오북을 틀어놓는다. 점심시간에는 자격증 공부를 조금 한다. 퇴근하고 운동을 가고 그 사이에 영어 학습 앱을 열어본다. 명상도 해야 하는데 도무지 시간이 안 난다. 주말에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고 그 장면을 몇 장 남긴다.


전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일이다. 그리고 이 일에는 끝이 없다. 하나를 해내면 다음 항목이 기다린다.


이상한 것은 이 목록이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정했고 스스로 지킨다. 그래서 힘들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그렇게 몇 년을 살다 어느 날 거울을 본다. 눈이 몹시 피곤하다. 그런데 그 피로가 잠이 부족해서 생긴 것 같지가 않다.


키르케고르는 이 피로에 이름을 붙였다. 절망이라고.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가 평생 붙들었던 질문은 단순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가 내놓은 답은 놀랍게도 요즘 자기계발서의 문장과 비슷해 보인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


강연장에서도 서점에서도 흔히 듣는 말이다. 진짜 나를 찾아라, 나답게 살아라, 본연의 나로 돌아가라. 키르케고르가 200년 전에 이미 같은 말을 한 셈이다.


그런데 같은 문장인데 뜻이 정반대다.


이런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어떤 말이 오래 살아남으면 원래 맥락이 떨어져 나가고 껍데기만 남는다. 그리고 그 껍데기 안에 정반대의 내용이 들어가 앉는다. 키르케고르의 문장이 딱 그런 경우다.


그러니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보려면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이 부정하려 했던 것을 봐야 한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에는 결정적인 조건이 하나 붙는다.


그것은 절대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다. 저기 어딘가에 완성된 형태로 놓여 있어서 찾아내면 되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 자신은 계속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진행 중인 과정이다.


이 구분이 중요하다. 우리가 진짜 나를 찾는다고 말할 때 대개 전자를 상정한다. 어딘가에 원래의 내가 묻혀 있고 슬롯가 씌워놓은 것들을 걷어내면 그것이 드러날 것이라는 그림. 고고학 발굴 같은 이미지다.


키르케고르는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한다. 파내려 가면 나오는 원본은 없다.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무언가뿐이다.


강물에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강은 물이 흐르기 때문에 강이다. 흐름이 멈추면 그것은 더 이상 강이 아니라 고인 물이다. 강의 본질은 특정한 물이 아니라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완성했다고 느끼는 순간이 위험하다. 마침내 원하던 사람이 되었고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이제 목표에 도달했다고 믿는 순간.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게 된다. 과정이 멈췄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완성된 나가 아니라 나였던 것의 그림자다.


키르케고르는 이 상태를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불렀다.


무서운 이름이지만 뜻은 명확하다. 살아 있으면서 살아 있지 않은 상태.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성공적으로 보이는데 안에서는 무언가가 멈춰 있는 상태.



절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보통 무너진 사람을 떠올린다. 눈에 띄게 힘들어하는 사람.


키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은 그것과 다르다. 오히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더 흔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본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절망이라는 개념이 낯설게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몸에 대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오래 나쁜 자세로 앉아 있으면 그것이 나쁜 자세라는 것을 못 느낀다. 통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상태에 익숙해져서다. 자세를 고치고 나서야 그동안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절망을 두 종류로 나눴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 되고 싶지 않은 절망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절망이다.


두 번째가 이상하게 들린다.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이 왜 절망인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늘 권장받는 태도가 아닌가.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둘 다 절망이 되는지를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첫 번째 절망부터 보자.


우리는 이미 상당 부분 만들어진 채로 여기 서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태어날지 고르지 않았다. 부모도 고르지 않았고 유년기에 어떤 말을 들으며 자랄지도 고르지 않았다. 몸도 기질도 대체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고 바꾸고 싶은 성격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들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없앨 수 없는 것을 없애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미 일어났고 지금의 나는 그 위에 서 있다. 토대를 부수면 서 있을 곳이 없어진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려는 방향은 필연적으로 막다른 길이다. 도착할 수 없는 곳을 향해 계속 걷는 셈이다.


이 절망은 자기혐오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어떤 부분이 싫고 그것만 없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감각. 그런데 그 부분을 도려내려는 시도가 계속 실패하면서 싫은 감정만 두꺼워진다.


여기서 키르케고르가 짚은 지점은 그 부분이 나쁘다 좋다가 아니다. 그것이 이미 나의 일부라는 사실 자체다.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없는 셈 칠 수는 없다는 것.


받아들인다는 말이 흔히 오해되는 것도 이 대목이다. 좋아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뜻이다. 인정해야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생각할 수 있다.



두 번째 절망이 더 흥미롭다.


반드시 자기 자신이 되겠다는 결심. 그것도 자신을 최적화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 방향이 왜 절망으로 이어지는가.


첫째, 삶의 대부분이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없다. 병이 오고 사람이 떠나고 일이 어그러진다. 내가 나를 설계한다는 전제 자체가 현실과 맞지 않는다.


둘째,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자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언제나 자기 일부를 잘라내는 일이 포함된다.


내가 되고 싶은 나의 그림이 선명할수록 그 그림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눈에 걸린다. 게으른 면, 우유부단한 면, 남들 앞에서 작아지는 면. 그것들을 없애야 그림이 완성된다.


그런데 그것들도 나다.


그러니까 이상적인 나를 만드는 작업은 실제의 나를 조금씩 부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자신을 위해 시작한 일이 자신을 지우는 일이 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지적한 역설이 여기 있다. 자기 자신이 되려고 가장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멀어질 수 있다는 것.


이 역설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계획표대로 사는 사람일수록 예정에 없던 일에 취약하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 작은 어긋남에 크게 흔들리는 경우가 있다.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에 기대어 서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흔들리면 발밑이 사라진다.


반면 계획이 느슨한 사람은 예상 밖의 일에 덜 놀란다. 애초에 예상이라는 것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계획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계획한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간격이 커질수록 그 간격을 메우는 데 드는 힘도 커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어디선가 빼와야 한다.



이 진단이 지금 시대에 유난히 잘 들어맞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관심이 곧 가치가 되는 환경에 살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봐주는가, 얼마나 좋은 반응을 얻는가가 그 사람의 값어치처럼 취급된다.


이 환경에서는 자기 자신이 되는 일도 성과가 된다. 나답게 사는 것조차 잘 해내야 하는 과제가 된다. 나다움을 보여주는 방식이 세련되어야 하고 그것이 좋은 반응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나 자신이 되기 위한 노력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기준이 밖에 있는데 목적은 안에 있다고 말하는 상태.


키르케고르가 왜 이것을 절망이라고 불렀는지 이해가 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도착하지 못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기준이 계속 바뀌고 그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구조에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성질이 있다. 잘 해낼수록 더 요구되기 때문이다. 좋은 반응을 얻으면 그 수준을 유지해야 하고, 유지하면 다음을 기대받는다. 성공이 곧 새로운 하한선이 된다.


그래서 이 게임에서는 잘하는 사람이 더 지친다. 못하는 사람은 일찍 포기할 수 있지만 잘하는 사람은 멈출 명분이 없다. 겉으로 가장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가장 소진되어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이유다.


키르케고르가 절망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절망은 무너진 얼굴이 아니라 완벽하게 관리된 얼굴 뒤에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키르케고르의 답은 방향을 뒤집는 것이었다.


자기를 만들어가는 대신, 삶이 주는 것에 응답하는 것.


내가 나를 설계하고 그 설계대로 나를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도착하는 상황들에 그때그때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오늘 벌어진 일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사람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 부탁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이런 질문에 계속 답하다 보면 자기 자신은 저절로 만들어진다. 만들려고 하지 않았는데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자기는 미리 그려둔 그림보다 훨씬 낫다. 실제 상황을 통과하면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방식의 좋은 점이 하나 더 있다. 완성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매일 새로운 상황이 오고 매일 새로운 답을 찾는다. 그래서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으니 죽지도 않는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바로 이 상태였다.


이 전환에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시선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자기를 만들어가는 데 집중하면 시선이 계속 안쪽을 향한다. 내가 지금 얼마나 왔는지, 목표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재게 된다. 그런데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려면 밖을 봐야 한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저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봐야 답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자기에게 신경 쓰지 않을 때 오히려 자기가 만들어진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했는지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그렇게 살면 굳이 자기를 계발하지 않아도 너그럽고 성숙한 사람이 된다고 썼다. 목표로 삼지 않았을 때 도착하는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이 이야기가 노력하지 말라는 말로 읽히면 곤란하다. 키르케고르는 게으르게 살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응답에 바카라임이 따른다고 봤다. 삶이 던지는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는 것은 결코 편한 일이 아니다.


차이는 노력의 유무가 아니라 방향에 있다. 미리 정해둔 나의 모습을 향해 가는 노력과, 지금 앞에 놓인 상황에 제대로 답하려는 노력. 둘 다 힘들지만 결과가 다르다.


앞의 것은 도달하면 끝나고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한다. 뒤의 것은 끝나지도 실패하지도 않는다. 그저 계속된다.


그리고 앞의 것은 실패했을 때 자기 탓이 된다. 목표는 내가 세웠고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도 나이기 때문이다. 뒤의 것은 그렇지 않다. 상황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나는 거기에 답했을 뿐이다. 답이 좋지 않았다면 다음에 다르게 답하면 된다.


이 차이는 실수를 대하는 태도까지 바꾼다. 설계도가 있으면 어긋난 부분이 결함이 되지만 설계도가 없으면 그냥 다음 재료가 된다.



키르케고르 본인의 삶은 이 가르침과 얼마나 맞았을까.


솔직히 말하면 그리 잘 맞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몹시 들볶은 사람이었다. 종교적 신념과 양심의 가바카라 사이에서 마음이 계속 갈라졌다. 사랑하던 약혼자 레기네 올센과 파혼했고 그 뒤로 금욕적으로 살았다. 만년에는 고향 교회 지도자들과 심하게 부딪혔다.


그리고 42세에 세상을 떠났다.


자기를 완성하려 하지 말라고 쓴 사람이 정작 자신에게는 가장 가혹했던 셈이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봐야 할까.


어쩌면 그래서 그가 이 문제를 그렇게 정확하게 봤는지도 모른다. 자기를 몰아붙이는 일이 어떻게 사람을 소진시키는지 그는 이론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절망을 그렇게 세밀하게 나눌 수 있었던 것도 그 안에 오래 있어봤기 때문일 것이다.


가르침과 삶이 어긋난다고 해서 가르침이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통찰은 그것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에 대해 잘 모른다. 아파본 사람이 몸을 안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몰아붙여본 적 없는 사람이 그 위험을 정확히 묘사하기는 어렵다. 키르케고르의 문장이 유난히 구체적인 이유가 아마 여기 있을 것이다.


그가 남긴 저작들은 1841년부터 1846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5년 남짓한 기간이다. 그 짧은 시간에 실존주의의 출발점이 될 만한 사유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 뒤로 10년을 더 살지 못했다.


말리는 사람이 가장 빨리 걸었던 셈이다.



다시 거울 앞으로 돌아가보자.


피곤한 눈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 더 나은 계획이 아닐 것이다. 항목을 하나 더 추가하는 일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목록에서 몇 개를 지우는 쪽이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다. 지우고 나면 뒤처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 불안이 목록을 지키게 만든다.


키르케고르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 같다.


지금 당신 앞에 무엇이 놓여 있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상황. 그것이 출발점이다.


이 질문의 좋은 점은 답이 매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오늘의 상황과 내일의 상황이 다르니 답도 다르다. 그래서 정답을 미리 준비해둘 수 없고, 준비해둘 수 없으니 틀릴 걱정도 덜하다. 그저 그때그때 성실하게 답하면 된다.


자기 자신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계속 걷는 일이다. 그러니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그냥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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