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퀴나스가 고행자들에게 던진 질문
중세에는 자기 몸을 괴롭히는 일이 존경받았다.
혹독하게 굴수록 훌륭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제자였던 하인리히 조이제는 8년 동안 못이 박힌 십자가를 등에 지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건강을 그렇게 해쳐도 되느냐고 물었다면 아마 웃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이고 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당시의 논리로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몸은 잠시 머무는 껍데기이고 영혼은 영원하다. 유한한 것을 써서 무한한 것을 얻는다면 남는 장사다. 계산이 명확하다.
그러니 고행자를 어리석다고 말하기 전에 그들이 무엇을 믿었는지를 봐야 한다. 그들은 계산을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전제 위에서 계산한 것이다.
지금은 정반대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 몸을 버리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영혼 쪽이 아무래도 좋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몸을 망가뜨린다.
종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운동은 하지 않고 대충 때우고 잠은 줄인다. 몸에 나쁜 줄 아는 것들을 계속한다. 방식은 달라졌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중세 사람들은 신을 위해 몸을 버렸고 지금 사람들은 성과를 위해 몸을 버린다.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 비슷한 답이 돌아온다. 돈을 벌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하고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쉬고 싶고 풀고 싶고 자유롭고 싶다. 이 두 가지 요구가 부딪히는 자리에서 몸이 먼저 밀려난다.
목적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 사실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그게 정상이다. 우리는 중세 고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몸을 그렇게까지 해칠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그런데 그 판단을 내리는 우리 자신도 각자의 방식으로 몸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유가 신에서 성과로 바뀌었을 뿐 구조는 같다.
어쩌면 몇백 년 뒤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똑같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저렇게까지 했느냐고.
고행자와 현대인은 겉으로는 전혀 다르지만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내 몸은 내 것이라는 전제다.
내 것이니 내가 어떻게 쓰든 상관없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다면 도구로 써도 된다. 신을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성공을 위해서든.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이 논리는 꽤 튼튼해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슬롯는 대체로 이 논리를 받아들인다. 법은 개인의 사적 영역에 깊이 들어오지 않으려 한다. 명백히 슬롯적 비용이 큰 경우에만 개입한다. 그 외에는 알아서 하라는 쪽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건강을 갉아먹으며 일하는 사람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은 오히려 훌륭하다고 말한다.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돌보는 것은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잘 보면 여기에 이상한 점이 있다. 우리는 남을 해치는 것은 금지하면서 자신을 해치는 것은 미덕으로 부른다. 같은 사람인데 대우가 다르다. 나 자신은 보호 대상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이 비대칭은 워낙 익숙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남에게 하지 않을 말을 자신에게는 서슴없이 하고, 남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을 자신에게는 당연하게 요구한다. 그것을 엄격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옳은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을 해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못 박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그것이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야 할 사랑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부당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가 흥미롭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야 할 사랑이라는 개념이다. 우리는 보통 사랑을 남에게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아퀴나스는 자기 자신도 그 대상에 포함시켰다. 남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자신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감정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신을 좋아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에게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에 가깝다. 의무에 가까운 개념인 셈이다.
그래서 이 주장은 기분이 어떠냐를 묻지 않는다. 자신감이 있든 없든, 스스로가 마음에 들든 아니든 상관없다. 어떤 상태에 있든 자기 자신을 함부로 다룰 권한은 없다는 것이다.
이건 자기 관리나 자기 계발과는 다른 이야기다.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해 건강을 챙기라는 말이 아니다. 건강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성과를 위해 건강을 챙기라는 말은 결국 몸을 도구로 보는 관점을 유지한다. 관리를 잘해서 오래 쓰자는 것이다. 자동차 정비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아퀴나스가 말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몸은 관리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들을 떠올려보면 어느 쪽 관점이 우세한지 알 수 있다. 체력을 관리한다, 컨디션을 조절한다, 몸이 버텨준다. 전부 도구를 다루는 언어다. 무엇을 위해 버티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고 몸은 그것을 감당하는 쪽에 놓인다.
여기서 핵심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몸을 도구로 볼 것인가 목적으로 볼 것인가.
도구로 보면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쓸 수 있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다면 갈아 넣어도 된다. 목적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떤 이유로도 수단이 될 수 없다.
아퀴나스가 말한 것은 후자다. 목적이 아무리 숭고해도 몸을 담보로 잡을 수는 없다는 것.
이 주장은 언뜻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현실에서 사람들은 늘 몸을 담보로 잡는다. 시험 기간에 잠을 줄이고 마감을 앞두고 끼니를 거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도 있다.
그래서 아퀴나스의 주장을 그대로 개인에게 적용하면 잔인해진다. 건강을 해치며 일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자기 사랑에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구분이 필요하다.
강요된 것인가 아닌가.
이데올로기가, 종교 교리가, 경제 상황이 건강을 담보로 잡으라고 요구한다면 비난받아야 할 것은 그 요구를 받아들인 개인이 아니라 그런 요구를 하는 구조다. 야근하지 않으면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온라인 게임에서 야근하는 사람을 탓하는 것은 번지수가 틀렸다.
반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자기 건강을 방치하는 경우는 다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진다면 그것은 지적할 수 있는 문제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구분하지 않으면 두 가지 오류 중 하나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나는 모든 것을 개인의 바카라임으로 돌리는 오류다. 건강을 잃은 사람에게 관리를 못했다고 말하는 것. 이 말은 종종 사실이 아니고, 사실인 경우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런 상황을 만든 조건을 시야에서 지워버린다.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구조 탓으로 돌리는 오류다. 어차피 세상이 이런데 어쩌겠느냐는 태도. 이건 편해 보이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바꿀 수 있는 부분까지 포기하게 만든다.
두 오류 사이 어딘가에 실제 상황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완전히 강요당하지도 않고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은 자리에서 매일 선택을 한다.
이 구분이 아퀴나스의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 대한 바카라임을 함께 지고 있다.
이 말이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된다.
내가 아프면 누군가 내 일을 대신한다. 내 치료비의 상당 부분은 같은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 낸 돈에서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가족이 그 여파를 감당한다. 내 몸에 일어난 일이 나에게서 끝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그러니까 내 몸은 내 것이라는 문장은 사실 절반만 맞다. 소유의 측면에서는 맞다. 아무도 내 몸에 대해 나보다 큰 권리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의 측면에서는 틀렸다.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의 결과는 나 혼자 감당하지 않는다.
권리와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건 자유를 부정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어떻게 살지 결정할 권리는 여전히 나에게 있다. 다만 그 결정이 나만의 일이라고 믿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조심할 것이 있다. 이 논리는 개인을 통제하는 근거로도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몸은 공동체의 것이니 우리가 관리하겠다는 식의 주장이 역사적으로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퀴나스가 말한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차이는 방향에 있다. 아퀴나스는 공동체가 개인의 몸에 권리를 갖는다고 말하지 않았다. 개인이 스스로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는 여전히 개인이다. 공동체는 그 이유를 하나 더해주는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 순서가 바뀌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순수하게 개인적이라고 느낄 때, 그것은 대개 그 행동의 결과를 나눠 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거리가 멀수록 이 사실은 더 잘 잊힌다.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바로 알아차린다. 그런데 그 영향이 몇 단계를 거쳐 도착하면 연결이 끊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는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전염병이 돌던 시기에 이 문제가 유난히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스크를 쓰는 일은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개인에게 머물지 않았다. 내가 감염되면 나만 아픈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사람이 아프고 그 다음 사람이 아팠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연결망이 잠깐 눈에 보였던 시기였다.
그 시기가 지나면 연결망은 다시 보이지 않게 된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냥 보이지 않을 뿐이다.
아퀴나스의 이야기에는 재미있는 뒷면이 있다.
그는 자신을 아끼라고 가르쳤고 실제로 자기를 잘 아꼈다. 특히 음식을 사랑했다. 몸이 워낙 무거워져서 바카라상 한쪽을 둥글게 잘라내 배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자기를 해치지 말라고 가르친 철학자가 자기를 너무 아낀 나머지 바카라상을 개조한 셈이다. 아마 그도 자신이 정한 기준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일화가 그의 주장을 우습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만든다. 자기 몸을 대하는 일이 이론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자신이 보여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어느 쪽 극단도 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행자들처럼 몸을 학대하지도 않았고 몸을 방치하지도 않았다. 중세의 기준에서 보면 그는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들 몸을 괴롭히는 것이 경건함이라고 믿던 시대에 그러지 말라고 말했으니까.
그가 남긴 저작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 태도가 더 흥미롭다. 신학대전은 방대하다. 그 정도 분량을 써내려면 상당한 지속력이 필요하다. 짧게 몰아붙이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몸을 아끼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이 해낸다는 것을 그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을 갈아 넣지 않으면서도 누구보다 많이 썼다.
여기서 우리 시대로 돌아와보자.
지금 우리는 몸을 괴롭히는 것을 경건함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대신 다른 이름을 붙인다. 성실함, 열정, 바카라임감, 프로 정신.
밤을 새워 일한 이야기가 무용담이 되는 문화가 있다. 아파도 출근한 사람이 칭찬받는 조직이 있다. 쉬는 것을 게으름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런 문화에서 자기를 돌보는 사람은 오히려 눈치를 본다. 정시에 퇴근하는 것을 설명해야 하고 아파서 쉬는 것에 죄바카라감을 느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미안해하는 이상한 구조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중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몸을 도구로 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미덕이라 부르는 것.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중세의 고행자는 자기 의지로 그렇게 했다는 점이다. 아무도 조이제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골랐다.
지금은 어떤가. 밤을 새우는 사람 중 그것을 순수하게 원해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한다. 선택처럼 보이지만 선택지가 하나뿐인 상황이 많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중세보다 나쁠 수도 있다. 적어도 고행자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아퀴나스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목적이 정말 몸보다 중요한가. 그리고 그 판단을 누가 내리고 있는가.
스스로 내린 판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주변이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 결과인 경우가 많다. 자발적인 희생처럼 보이는 것 중 상당수는 거절할 수 없는 요구였다.
자신을 아끼라는 말은 흔하다. 너무 흔해서 진부하게 들린다.
그런데 아퀴나스가 이 말을 했을 때의 맥락은 달랐다.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그러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반박이었다.
지금도 이 말은 반박이어야 한다. 몸을 갈아 넣는 것이 성실함으로 통하는 곳에서 자신을 아끼라는 말은 부드러운 조언이 아니라 분명한 이견이다.
그리고 그 이견에는 두 개의 근거가 있다.
하나는 당신 자신이 목적이라는 것. 어떤 성과도 당신을 수단으로 쓸 권리는 없다.
다른 하나는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 당신이 무너지면 누군가 그 자리를 메운다. 그러니 자신을 돌보는 일은 개인적인 취향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두 번째 근거는 조금 뜻밖일 수 있다. 자신을 아끼라는 말이 대개 개인의 행복 차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퀴나스는 그것을 공동체의 문제로 놓았다.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은 나 혼자의 일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넘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기를 아끼는 일과 남을 배려하는 일이 대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우리는 흔히 이 둘을 저울에 올려놓고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건강에 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내 몸은 내 것이다. 다만 그 결과까지 내 것은 아니다.
800년 전 뚱뚱한 철학자가 둥근 바카라상 앞에 앉아 하려던 말이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