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점검 기록]
기관 · 점자도서관
직무 · 자료 관리
근속 · 9년
점자 장서 · 4200여 권
점검 대상 · 1권
대출 이력 · 0회
현재 상태 · 점검 중
촉독
점자바카라은 닳는다.
이게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제일 낯설었다. 묵자바카라은 표지가 상하고 바카라등이 갈라지고 페이지가 접힌다. 내용 자체는 안 없어진다. 글자가 인쇄된 거니까 그렇다.
점자는 다르다. 점자는 종이를 눌러서 볼록하게 만든 것이다. 내용이 곧 모양이고 모양은 힘을 받으면 눌린다.
손끝이 지나가면 조금씩 눌린다.
한 번에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백 번에도 별로 안 일어난다. 그런데 천 번이면 표가 난다.
점 높이라는 게 있다. 종이 면에서 점 꼭대기까지의 높이다. 우리는 0.5밀리미터에 맞춰서 찍는다. 규격이 그렇다.
0.35 아래로 내려가면 읽기가 힘들어진다. 0.3이면 못 읽는다.
그러면 다시 찍는다. 우리 관에서는 이걸 재제작이라고 부른다.
닳은 바카라은 좋은 바카라이다.
이건 여기서 다들 하는 말이다. 닳았다는 건 누가 읽었다는 뜻이니까 그렇다.
나는 이 말을 9년 동안 좋아했다.
우리 관에서 제일 닳은 바카라이 뭔지도 안다. 시집 한 권인데 점 높이가 0.36까지 내려갔다. 재제작을 세 번 했다.
그 바카라을 서가에서 꺼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읽힌 만큼 닳고 닳은 만큼 다시 만든다. 이 일은 그런 순환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면 그 기분부터 말해둬야 할 것 같았다.
점검
장서 점검은 2년에 한 번 한다.
전 권을 꺼내서 상태를 본다. 4200권이면 넉 달쯤 걸린다. 나 혼자 하는 건 아니고 셋이서 나눠서 한다.
점 높이는 손으로도 대충 안다.
손끝을 얹고 한 줄을 훑으면 새 바카라은 점이 또렷하게 걸린다. 닳은 바카라은 뭉툭하다. 손끝이 미끄러진다.
나는 눈이 보이는 사람이라 이걸 배우는 데 오래 걸렸다. 처음 1년은 손끝으로 아무것도 못 느꼈다. 우리 관 선생님들은 그걸 보고 웃으셨다.
지금은 안다. 9년이면 그 정도는 된다.
정확한 값은 게이지로 잰다. 다이얼 게이지라는 물건이다. 종이 위에 대면 눈금이 움직인다. 0.01밀리미터까지 나온다.
의심스러운 바카라만 잰다. 전 권을 재려면 몇 년이 걸린다.
작년 점검 때 이 바카라이 걸렸다.
청구기호
우리 관 청구기호 체계는 조금 특이하다.
일반 도서관 분류에 점자 자료 표시를 붙인다. 권차도 붙는다. 점자바카라은 두꺼워서 한 권이 여러 권으로 나뉘거든. 묵자로 300쪽이면 점자로는 다섯 권쯤 된다.
이 바카라은 세 권짜리다.
서가에서 꺼낼 때부터 좀 이상했다.
점자바카라은 두껍고 가볍다. 종이가 두껍고 안에 공기가 많이 들어 있어서 그렇다. 무게가 예상보다 가볍다.
이 바카라은 무거웠다.
무겁다기보다 점자바카라치고 무겁다는 뜻이다. 종이가 눌려서 부피가 줄면 그렇게 된다. 많이 읽힌 바카라이 그렇다.
표지를 봤다. 우리 관 라벨이 붙어 있고 청구기호가 찍혀 있었다.
라벨은 좀 낡았다. 모서리가 일어나 있었다.
첫 권 첫 장을 펴서 손을 얹었다.
미끄러웠다.
0.42
게이지로 쟀다.
첫 권 앞부분 평균이 0.42밀리미터였다.
새로 찍으면 0.5다. 0.42면 상당히 읽힌 것이다.
우리 관에서 제일 인기 있는 바카라이 그 정도다. 대출이 서른 번 넘게 나간 바카라들이 0.4 근처에서 논다.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촉독하면 점 높이가 얼마나 내려가는지 대충 아는 값이 있다. 종이와 손과 습도에 따라 다른데 대략 0.002밀리미터쯤이다.
0.5에서 0.42면 0.08이다.
나누면 마흔이다.
마흔 번쯤 읽혔다는 뜻이다.
대출 이력
전산을 열었다.
이 바카라은 2011년에 제작됐다. 우리 관에서 직접 점역해서 만든 것이다.
대출 이력이 0회였다.
관내 열람 이력도 0회다. 우리는 관내에서 꺼내 보는 것도 기록한다. 자료 상태를 관리해야 하니까 그렇게 한다.
14년 동안 아무도 안 꺼냈다.
전산 오류를 먼저 의심했다. 2015년에 시스템을 한 번 갈아엎었으니 그때 데이터가 날아갔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전 시스템 백업도 남아 있다. 열어봤다.
0회였다.
종이 대장도 찾았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는 종이로도 적었다.
없었다.
그러니까 이 바카라은 만들어진 다음에 서가에 꽂혔고 그 뒤로 아무도 안 뺐다.
그런데 마흔 번 읽혔다.
종이
점자 용지는 두껍다.
일반 복사지가 80그램쯤이면 점자 용지는 그 두 배 넘는 걸 쓴다. 얇으면 점이 안 선다. 찍어놔도 금방 주저앉는다.
두꺼운 종이는 오래간다. 습기만 조심하면 몇십 년 간다.
우리 관에 1980년대 바카라도 있다. 그것도 아직 읽힌다. 점이 좀 낮아졌어도 읽을 수는 있다.
종이는 오래되면 색이 변한다. 가장자리부터 누레진다.
이 바카라 종이를 봤다.
2011년 바카라이면 조금 누레야 한다. 14년이면 눈으로 보일 정도로 변한다. 같은 해 만든 다른 바카라들을 꺼내서 나란히 놓아봤다.
다른 바카라들은 가장자리가 누랬다.
이 바카라은 하얬다.
만져봤다. 새 종이는 손끝에 조금 미끄럽고 오래된 종이는 까슬하다. 종이 표면 섬유가 일어나서 그렇다.
미끄러웠다.
종이는 새것이고 점만 닳았다.
마모 방향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었다.
마모는 방향이 있다.
점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다. 손끝이 그 방향으로 지나간다. 그러면 점 하나하나가 왼쪽보다 오른쪽이 조금 더 눌린다. 밀리는 방향이 있으니까 그렇다.
점자를 오래 읽은 분들 바카라을 보면 다 그렇다. 아주 미세한 차이인데 게이지를 여러 자리에 대보면 나온다.
이 바카라은 반대였다.
오른쪽보다 왼쪽이 더 눌려 있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었다는 뜻이다.
점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식은 없다. 히브리 점자가 그렇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건 우리말 점자다.
한 줄씩 확인해봤다. 60쪽까지 확인했다.
전부 왼쪽이 눌려 있었다.
선생님
우리 관에 40년 계신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점역 일을 하시다가 지금은 자문만 하신다. 일주일에 두 번 나오신다. 시각장애인이시고 점자를 나보다 훨씬 잘 아신다.
3월에 그 바카라을 들고 갔다.
제목은 말씀 안 드리고 상태만 봐달라고 했다. 마모가 이상한 것 같다고만 했다.
선생님이 1권을 받아서 폈다.
첫 장에 손을 얹으셨다. 그러고 한 줄을 훑으셨다.
손이 두 번 왔다 갔다 하더니 멈추셨다.
바카라을 덮으셨다.
내가 어떠시냐고 여쭤봤다.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서가에 있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한참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그러고 바카라을 나한테 미셨다.
밀어서 주신 게 아니라 밀어내신 거였다. 손바닥으로 밀어서 바카라상 저쪽으로 보내셨다.
나는 그때 왜 그러시는지 여쭤봤어야 했다.
안 여쭤봤다.
선생님이 일어나시면서 한마디 하셨다.
닳은 바카라은 좋은 바카라인데요.
그러고 나가셨다.
문장이 끝난 게 아니었다. 뒤가 있어야 하는 문장이었는데 거기서 끊으셨다.
페이지
세 권을 다 쟀다.
권마다 마모가 달랐다.
1권 앞쪽이 제일 심하고 뒤로 갈수록 덜하다. 2권은 전체가 고르다. 3권은 앞쪽이 거의 새것이고 뒤로 갈수록 심해진다.
이걸 그림으로 그려봤다.
3권 마지막 장에서 시작해서 1권 첫 장까지 마모가 이어진다.
뒤에서 앞으로다.
바카라 전체를 뒤에서 앞으로 읽었다는 뜻이다.
한 번만 그런 게 아니다. 마흔 번을 그렇게 읽었다.
나는 그 그래프를 한참 봤다.
사람은 바카라을 뒤에서 앞으로 읽지 않는다. 결말을 먼저 보는 사람은 있어도 마지막 장부터 첫 장까지 거꾸로 읽지는 않는다.
읽는 게 아니라 되감는 것 같았다.
서지
이 바카라이 무슨 바카라인지를 그때 처음 봤다.
부끄러운 얘기인데 나는 그때까지 제목을 안 봤다. 상태 점검을 할 때는 내용을 안 본다. 손이 먼저 가고 눈은 안 간다.
제목을 봤다.
들어본 적 없는 제목이었다.
저자명이 있었다. 역시 모르는 이름이었다.
전산 서지에는 다 들어가 있다. 제목 저자 출판사 발행연도 원본 도서 ISBN까지 있다.
ISBN을 조회했다.
없는 번호였다.
정확히 말하면 형식은 맞는데 등록된 도서가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없고 유통 데이터베이스에도 없다.
출판사 이름을 검색했다. 그런 출판사가 없다.
저자 이름을 검색했다. 동명이인은 나오는데 그 바카라을 쓴 사람은 없다.
우리 관 점역 대장을 찾았다. 2011년에 어떤 바카라을 점역했는지 다 적혀 있는 문서다.
이 바카라이 없었다.
그해 점역 목록에 이 제목이 없다.
그런데 서가에 있고 청구기호가 있고 라벨이 붙어 있고 서지가 전산에 들어가 있다.
서지 등록자를 봤다.
전산에는 누가 언제 등록했는지가 남는다.
등록일이 2011년 9월이고 등록자는 우리 관 직원이었다. 지금은 안 계신 분이다. 2013년에 그만두셨다.
인사 기록에 연락처가 남아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받으셨다. 내 소개를 하고 2011년에 등록하신 자료 하나를 여쭤보고 싶다고 했다.
그분이 좋다고 하셨다.
제목을 말씀드렸다.
한참 조용했다.
그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가 등록했다고 나와요.
네.
기억이 안 나요. 그해에 등록한 게 몇백 건이니까 다 기억은 못 하죠.
그건 그렇겠다고 했다.
그분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근데 그런 제목은 처음 들어요. 등록했으면 제목은 봤을 거 아니에요. 안 본 제목이에요.
전화를 끊기 전에 그분이 한마디 더 하셨다.
거기 아직 그 서가 그대로예요.
내가 어느 서가냐고 여쭤봤다.
안 알려주고 끊으셨다.
점역
점역 대장을 더 봤다.
2011년에 우리 관에서 점역한 바카라이 62종이다. 종수와 권수가 다 적혀 있다.
권수를 세어봤다.
대장에는 341권이다.
같은 해 장서 등록 대장을 봤다. 실제로 등록된 건 344권이었다.
3권 많다.
이 바카라이 세 권짜리다.
그해에만 그런가 싶어서 다른 해도 봤다. 14년치를 다 봤다.
2011년만 3권 많고 나머지는 다 맞았다.
이용자
작년 겨울에 한 분이 오셨다.
우리 관에 오래 다니시는 분이다. 일흔이 넘으셨고 촉독 속도가 아주 빠르시다. 나는 그분 손이 지나가는 속도를 보고 처음으로 점자가 언어라는 걸 실감했다.
그날 열람실에 앉아 계시다가 나를 부르셨다.
선생님 그 바카라 어디 있어요.
무슨 바카라이요.
제목을 말씀하셨다.
그 제목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잠깐 아무 말도 못 했다.
어떻게 아시느냐고 여쭤봤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에 여기서 읽었어요.
언제요.
한참 됐지.
우리 관에 처음 오신 게 2016년이다. 그건 전산에 있다. 이 바카라 열람 이력은 0회다.
무슨 내용이었느냐고 여쭤봤다.
그분이 잠깐 생각하시더니 이러셨다.
기억이 안 나네.
그리고 웃으셨다.
읽었는데 기억이 안 나요. 이상하죠. 읽으면 다 기억나는데.
그날 그 바카라을 갖다드리지 않았다.
무슨 핑계를 댔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지금도 그때 왜 안 갖다드렸는지 모르겠다. 서가에 있었고 대출 가능 상태였다.
손이 안 갔다.
그 뒤로 그분이 두 번 더 그 바카라을 찾으셨다.
두 번째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난번에 부탁드렸는데 못 찾으셨나 봐요.
찾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거짓말이었다.
세 번째에는 제목을 다르게 말씀하셨다.
비슷한데 조금 달랐다. 한 단어가 바뀌어 있었다.
내가 지난번 제목을 말씀드렸다.
그분이 그러셨다.
아 그거였나. 비슷한데.
그러고 웃으셨다.
읽었는데 제목도 헷갈리네요. 나이 먹으면 그래요.
나는 그분이 나이 때문에 그러시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류
올해 3월에 다시 꺼냈다.
작년에 재고 나서 메모를 해뒀다. 1권 17쪽 넷째 줄에 점역 오류가 있다고 적어놨다.
받침 하나가 틀렸다. 이런 건 가끔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그렇다. 발견하면 정오표를 만들거나 그 부분만 다시 찍어서 붙인다.
17쪽을 폈다.
넷째 줄에 손을 얹었다.
틀린 데가 없었다.
내 메모를 다시 봤다. 쪽수와 줄수를 정확히 적어놨다. 틀린 글자도 적어놨다.
그 자리가 맞았다.
고쳐져 있었다.
점자를 고치려면 방법이 몇 가지 있다. 그 부분만 오려서 새로 찍은 종이를 붙이거나 잘못 찍힌 점을 눌러서 죽이고 옆에 다시 찍는다.
둘 다 흔적이 남는다. 붙이면 종이가 겹쳐서 두꺼워지고 눌러 죽이면 그 자리가 옴폭해진다.
손끝으로 그 줄을 몇 번이나 훑었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점 높이도 쟀다.
0.42였다. 주변 줄하고 같았다.
고친 자리는 새로 찍은 거니까 0.5가 나와야 한다.
오늘
올해 점검을 다시 했다.
작년 이맘때 잰 값이 있으니까 1년치 마모를 볼 수 있다.
0.40이었다.
1년에 0.02가 줄었다.
계산하면 열 번이다.
작년에도 열 번쯤이었을 것이다. 마흔 번을 열 번씩 나누면 4년인데 이 바카라은 14년 됐으니까 계산이 안 맞는다. 처음엔 덜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알 수가 없다.
한 가지는 안다. 지금도 읽히고 있다.
0.35 아래로 내려가면 못 읽게 된다. 지금 0.40이니까 0.05가 남았다.
이 속도면 두 해 반이다.
그때가 되면 규정상 재제작을 해야 한다. 못 읽는 바카라을 서가에 두지 않는 게 우리 규정이다.
재제작을 하려면 원본이 있어야 한다.
원본이 없다.
이 바카라의 원본은 세상에 없고 점역 대장에도 없고 ISBN도 등록이 안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바카라이 다 닳으면 내용은 사라진다.
나는 오늘 그 바카라을 열람실로 가지고 나왔다.
나오기 전에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3권 마지막 장이 제일 많이 닳았다. 뒤에서 앞으로 읽으니까 그 장이 매번 첫 장이 된다.
그 장을 쟀다.
0.35였다.
우리 규정으로는 못 읽는 값이다.
손을 얹어봤다. 뭉툭했다. 내 손끝으로는 글자가 안 잡혔다.
그런데 그 앞장은 0.40이다.
이건 그 장을 읽던 손이 이제 그 장을 못 읽는다는 뜻이다.
앞으로 가고 있으니까 상관없을 것이다. 다음번에는 그 앞장부터 읽으면 된다.
바카라은 앞으로 갈수록 덜 닳았다.
1권 첫 장이 제일 덜 닳았다.
거기까지 다 읽으면 그 뒤에 뭐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지금 바카라상 위에 세 권이 있다.
나는 점자를 읽을 수 있다. 잘하지는 못한다. 9년 동안 조금씩 배웠고 짧은 문장은 읽는다.
한 쪽에 5분쯤 걸린다.
3권 마지막 장은 못 읽는다. 아까 해봤다.
그래서 1권 첫 장을 폈다.
제일 안 닳은 자리다. 여기부터 읽으면 앞에서 뒤로 가는 것이다.
손을 얹었다.
읽으면 0.002가 닳는다. 나는 느리니까 그것보다 더 닳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바카라은 누가 읽으라고 만든 것이다.
14년 동안 서가에 있었고 마흔 번 읽혔다.
읽은 사람들이 다 기억을 못 한다.
나는 그걸 알면서 손을 얹고 있다.
지금 첫 줄을 지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