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는 조용하다.
집에서 걸어 나와 모퉁이를 두 번 돌면 나오는 카페다. 이 시간대에는 손님이 거의 없어서 소리가 잘 들린다. 그라인더가 돌아가는 소리. 포터필터를 털어내는 두 번의 둔탁한 타격. 스팀 노즐이 우유를 밀어 올리며 내는 높고 가는 소리. 재석 씨는 이 순서를 늘 똑같이 지킨다. 회사를 그만두고 카페를 연 사람 특유의 규칙성이 있다.
탱고는 창가 자리 밑에 자리를 잡았다. 이 자리를 좋아한다. 발밑 타일이 다른 곳보다 차갑다.
오늘의 면담 상대는 이 조용한 자리에 어울리는 향수다. 그리고 이 연재에서 다룬 향수 중 유일하게 병에 만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연구자: 당신 병에는 조향사 이름이 인쇄되어 있더군요. 피에르 부르동.
이리스 뿌드르: 저희 집 규칙입니다. 만든 사람의 이름을 표지에 싣습니다.
연구자: 표지라고 하셨습니까.
이리스 뿌드르: 프레데릭 말은 자기를 조향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출판사라고 합니다. 에디션 드 퍼퓸. 향수 출판사라는 뜻이에요. 조향사는 작가고 그는 편집자입니다. 포장 상자도 바카라 모양으로 만들죠.
이 대목에서 나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문헌정보학에서 저자 표시는 사소한 관행이 아니다. 누가 만들었는가를 기록에 남기는 일은 그 창작물에 바카라임과 계보를 부여하는 행위다. 저자가 없는 자료는 검색되지 않고 인용되지 않으며 결국 축적되지 않는다. 그런데 향수 산업은 오랫동안 조향사의 이름을 지웠다. 병에는 브랜드만 남고 만든 사람은 사라졌다. 우리는 샤넬 넘버 파이브를 알지만 에르네스트 보를 모른 채 백 년을 보냈다.
프레데릭 말이 2000년에 한 일은 그 관행을 뒤집은 것이다. 조향사에게 시간과 예산의 제약을 걷어내 주고 대신 이름을 걸게 했다. 익명의 상품이던 것이 서명된 작품이 되었다.
연구자: 그러면 당신은 누구의 작품입니까.
이리스 뿌드르: 피에르 부르동입니다. 에드몽 루드니츠카의 제자죠. 1960년대 디올의 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입니다.
연구자: 그리움이 재료가 될 수 있습니까.
이리스 뿌드르: (잠시 멈췄다가) 저는 20세기 알데하이드 플로럴에 바치는 헌사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 사라진 것을 다시 읽으려고 태어났어요.
지난 호에 만난 뀌르 드 뤼시를 떠올렸다. 에르네스트 보가 알데하이드를 터뜨리며 시작하던 그 향수. 이리스 뿌드르는 그 계보의 후손이다. 팔십 년 뒤에 태어나 앞선 세대를 인용한다. 학술 논문이 선행 연구를 각주로 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향수는 각주를 달 수 없으니 냄새로 인용한다.
첫 향에서 알데하이드가 터진다. 비누 거품이 손바닥에서 부서질 때의 그 미끄럽고 서늘한 느낌이 코로 온다. 실제로 냄새가 있는 게 아니라 냄새의 온도가 먼저 바뀌는 것 같다. 그 위로 카네이션의 알싸함과 계피의 마른 단내가 스친다.
알데하이드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이 재료는 자연에서 캐낸 것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합성 분자다. 20세기 초에 조향사들이 이것을 쓰기 시작하면서 향수는 처음으로 자연에 없는 냄새를 갖게 되었다. 꽃도 나무도 아닌 것이 병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을 텐데 지금은 고전의 상징이 되었다. 새로움은 시간이 지나면 전통이 되고 전통은 다시 인용의 대상이 된다. 앞선 세대가 발명한 파격을 뒤 세대가 정중하게 베껴 쓰는 일이 예술사에서 반복된다. 이리스 뿌드르는 그 반복의 자리에 놓인 향수다.
그리고 아이리스가 온다.
아이리스는 꽃에서 얻는 향료가 아니다. 뿌리에서 얻는다. 정확히는 붓꽃의 땅속줄기를 캐서 껍질을 벗기고 삼 년에서 오 년을 말려야 한다. 갓 캔 뿌리에서는 거의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건조되는 동안 내부의 성분이 서서히 산화되면서 그제야 향이 생긴다. 시간이 재료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리스는 조향사의 서랍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든다.
이 대목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보존과 숙성은 다르다. 보존은 변하지 않게 지키는 일이고 숙성은 변하도록 두는 일이다. 자료를 다루는 사람은 대개 전자를 훈련받는다. 온도와 습도를 통제하고 산화를 막고 원본을 고정한다. 그런데 아이리스는 반대다. 삼 년을 그냥 두어야 쓸모가 생긴다. 어떤 것들은 지켜서가 아니라 늙어서 가치가 된다.
아이리스의 냄새는 설명하기 까다롭다. 분 냄새 같기도 하고 차가운 흙 냄새 같기도 하고 잘 다린 면 셔츠에 코를 대었을 때 나는 냄새 같기도 하다. 촉촉하면서 건조하다는 모순된 표현이 가장 가깝다. 여기에 장미와 바이올렛이 얹히면서 화장대의 인상이 완성된다. 화장품이 화장품이던 시절의 냄새다. 향이 아니라 질감으로 먼저 도착하는 종류의.
연구자: 당신은 지난 호의 뀌르 드 뤼시와 어떻게 다릅니까.
이리스 뿌드르: 그분에게 아이리스는 완충지대였습니다. 꽃과 가죽 사이에 놓은 계단이었죠. 저에게는 아이리스가 목적지입니다.
연구자: 가죽은 없습니까.
이리스 뿌드르: 없습니다. 저는 부츠가 아니라 그 방의 화장대입니다. 같은 집의 다른 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녁에 집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더니 보보가 흥미로워했다. 철학 논문도 사정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어떤 개념은 처음 쓴 사람의 이름이 붙어서 계속 불리고 어떤 개념은 누가 먼저 썼는지 잊힌 채로 모두가 쓴다. 이름이 남는 쪽과 남지 않는 쪽을 가르는 기준이 실력만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향수도 그렇다고 답했다. 백 년 동안 병에서 지워졌던 이름들이 지금 와서 복원되고 있지만 이미 복원할 수 없게 된 것들도 많다.
베이스에서 통카빈과 바닐라와 화이트 머스크가 자리를 잡는다. 여기서 이 향수가 왜 그렇게 오래 사랑받는지가 드러난다. 아이리스는 차갑고 파우더리해서 자칫 사람을 밀어낸다. 그런데 통카빈의 크리미한 단맛이 그 차가움에 체온을 넣는다. 서늘한 분 냄새가 어느 순간 살냄새로 바뀐다. 그 전환이 아주 부드러워서 언제 넘어갔는지 알아채기 어렵다.
확산력은 크지 않다. 팔을 뻗으면 사라지고 손목을 코에 대면 있다. 그래서 이 향수는 방 전체를 채우지 않는다. 대신 옷깃 안쪽에 하루 종일 머문다. 저녁에 옷을 벗을 때 한 번 더 올라오는데 그 마지막 인사가 하루 중 가장 좋다.
재석 씨가 잔을 치우러 오면서 잠깐 멈췄다. 오늘 향이 다르네요라고 했다. 어떠냐고 물었더니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옛날 냄새 같은데 낡은 건 아니라고. 나는 그 문장이 이 향수를 가장 정확히 요약했다고 생각했다. 향수 리뷰를 업으로 삼은 사람보다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 더 정확한 문장을 내놓는 일은 자주 있다.
이리스 뿌드르는 화려하지 않다. 처음 맡으면 심심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이 향수는 처음에 판정하는 향수가 아니다. 세 시간쯤 지나 옷깃에서 올라올 때 비로소 제 얼굴을 보여준다. 아이리스가 삼 년을 말려야 향이 생기듯 이 향수도 사람 위에서 몇 시간을 지나야 완성된다. 만드는 방식과 입는 방식이 같은 원리를 따르는 셈이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장이 있다. 이 향수가 그렇다. 급하게 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종류의 글처럼.
카페를 나설 때 탱고가 몸을 일으키며 크게 하품했다. 문을 밀자 바깥 공기가 훅 들어왔고 손목의 향이 잠깐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