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뀌르 드 뤼시

by김경훈

계단은 모두 아흔 개다.


청라언덕에서 계산성당 쪽으로 내려가는 돌계단. 3·1만세운동길이라 불리는 이 길을 1919년 봄에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품에 숨기고 내려갔다. 지금은 그냥 계단이다. 나는 손잡이를 짚고 한 칸씩 내려갔다. 돌이 발밑에서 내는 소리가 계단마다 조금씩 달랐다. 어떤 칸은 단단하고 어떤 칸은 미세하게 비었다. 백 년을 밟히면 돌도 제각각 닳는 모양이다.


탱고가 반 발짝 앞에서 속도를 맞춰 주었다. 보보는 뒤에서 계단 벽에 붙은 사진 설명을 소리 내어 읽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상대는 그 시절에 태어난 향수다. 골목이 이 모습을 갖춰가던 무렵 파리에서는 러시아 가죽이라는 이름의 향수가 병에 담기고 있었다.



연구자: 시작부터 곤란한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당신은 몇 년생입니까.


뀌르 드 뤼시: (잠시 조용해지다가) 그걸 물으실 줄 알았습니다.


연구자: 샤넬 공식 자료는 1924년이라고 적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기록들은 1927년이라고 합니다. 위키피디아도 그렇고 향수 아카이브 쪽도 그렇습니다.


뀌르 드 뤼시: 저도 제 나이를 모릅니다. 만들어진 해와 세상에 나온 해가 다르면 그런 일이 생기죠.



직업병이 도졌다. 문헌정보학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불일치는 그냥 사소한 오차가 아니다. 서지 기술에서 발행 연도는 그 자료를 특정하는 핵심 식별자다. 연도가 흔들리면 판본이 흔들리고 판본이 흔들리면 인용이 흔들린다. 그런데 이 향수의 경우 가장 권위 있는 출처인 제조사 스스로가 한쪽을 주장하고 독립적인 기록들이 다른 쪽을 주장한다. 브랜드에게 1924년은 더 매력적인 연도다. 상업적으로 널리 퍼진 최초의 가죽 향수라는 자리를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은 언제나 기록하는 자의 이해관계를 품는다.


아흔 개의 계단을 다 내려와서 나는 이 질문을 잠시 접기로 했다. 어차피 향은 연도를 모른다.



첫 향은 놀랍도록 밝다. 가죽 향수를 기대하고 왔다가 여기서 한 번 미끄러진다. 알데하이드가 탄산처럼 톡 터지면서 베르가못과 만다린의 서늘한 껍질 냄새가 올라온다. 샤넬 넘버 파이브를 만든 손에서 나온 향수라는 게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 모스크바에서 조향을 배우고 혁명을 피해 프랑스로 건너온 사람이다.


그가 샤넬을 만난 것도 러시아 사람을 통해서였다. 니콜라이 이세의 사촌이자 파리로 망명한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샤넬의 연인이었다.



연구자: 이 향수의 의뢰 내용이 꽤 사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뀌르 드 뤼시: 사적이라기보다 구체적이었습니다. 함께 지내던 집의 두툼한 실내 공기. 시트에 남아 있던 넘버 파이브의 잔향. 그리고 침대 발치에 나란히 세워져 있던 승마 부츠. 자작나무 타르로 길들인 그 부츠 말입니다.


연구자: 사랑을 향으로 옮겨 달라는 주문이었군요.


뀌르 드 뤼시: 사랑이 끝난 뒤에 남는 것을 옮겨 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게 더 정확합니다.



한 가지 더 짚어둘 것이 있다.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여러 조향 회사가 가죽 향수를 만들었는데 주된 구매층이 담배를 피우는 여성이었다. 옷과 머리에 밴 담배 냄새를 지우는 대신 그것과 어울리는 냄새를 덧입힌다는 발상이었다. 냄새를 숨기지 않고 문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쪽에 가깝다.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무는 일이 논란이던 시절에 그 논란을 향으로 승인해 준 물건이었던 셈이다. 뀌르 드 뤼시가 지금도 남성적이라거나 여성적이라거나 하는 분류를 계속 빠져나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애초에 그 경계를 넘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중반부는 꽃이다. 아이리스가 앞에 서고 재스민과 일랑일랑과 장미가 뒤를 받친다. 여기서 아이리스의 역할이 절묘하다. 촉촉한 분 냄새 같기도 하고 차가운 흙 냄새 같기도 한 이 뿌리 향료가 화사한 꽃들과 뒤에 올 가죽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든다. 꽃이 가죽으로 곧장 떨어지면 낙차가 너무 크다. 아이리스가 그 사이에 계단을 놓는다.


성당 앞에 도착했을 때 마침 종소리가 울렸다. 1902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했다. 붉은 벽돌과 쌍둥이 첨탑.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의 밀도가 바뀌었다. 소리가 천장 높은 곳으로 빨려 올라가면서 발소리가 이상하게 멀게 들렸다. 오래된 목재와 초와 돌이 섞인 냄새. 그 안에서 손목의 향이 세 번째 얼굴을 꺼냈다.


자작나무 타르다.



연구자: 이 재료를 세 번째 만납니다. 패츌리 24에서 한 번 투스칸 레더에서 한 번.


뀌르 드 뤼시: 같은 재료로 완전히 다른 인물이 만들어집니다. 그 친구들은 저보다 팔십 년 늦게 태어났고 저보다 훨씬 크게 말합니다.


연구자: 당신은 작게 말하는군요.


뀌르 드 뤼시: 저는 부츠 자체가 아니라 부츠가 놓여 있던 방의 냄새입니다. 가죽에서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맡는 가죽이죠. 그래서 흐릿합니다.



러시아 병사들은 부츠에 물이 스미지 않도록 자작나무 껍질을 태운 타르를 발랐다. 그 방수 처리가 남긴 특유의 탄내가 러시아 가죽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실용에서 나온 냄새가 백 년 뒤에 사치품이 된 셈이다. 대부분의 향은 이런 식으로 신분이 바뀐다. 무두질 공장의 냄새가 향수병에 들어가고 절의 향 연기가 백화점 진열대에 오른다.


베이스에서 가죽과 베티버와 스티락스와 바닐라가 자리를 잡는다. 투스칸 레더의 가죽이 아직 재단되지 않은 원단이라면 뀌르 드 뤼시의 가죽은 이미 오래 신어 뒤축이 닳은 부츠다. 날이 서 있지 않다. 대신 시간이 배어 있다. 뜨겁지 않고 미지근하며 어딘가 쓸쓸하다. 여러 사람이 이 향수를 두고 우울하다고 표현하는데 정확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연애가 한창일 때의 향이 아니라 끝나고 한참 지난 뒤에 그 방을 다시 떠올리는 사람의 향이다. 잔향이 사라지는 방식도 조용하다. 어느 순간 없어졌다기보다 언제부터 없었는지 모르게 옅어진다. 손목을 코에 대면 아직 있고 팔을 내리면 사라진다. 그 정도 거리에서만 존재하는 향수다.


성당을 나오면서 보보가 물었다. 백 년 전 향수를 지금 뿌리는 게 이상하지 않냐고. 나는 이상하지 않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밟고 온 계단도 백 년 됐고 방금 나온 건물은 그보다 더 오래됐다. 그것들은 여전히 제 기능을 한다. 계단은 사람을 내려보내고 건물은 사람을 앉힌다. 향수도 마찬가지다. 백 년 전 조향사가 배열한 분자들이 오늘 내 손목 위에서 똑같이 증발한다. 화학은 유행을 타지 않는다.


성당에서 몇 골목 건너에 진골목이 있다. 길다는 뜻의 대구 사투리 질다에서 나온 이름이라고 했다. 예전에 이 도시의 부자들이 살던 골목이다. 지금은 오래된 식당과 찻집이 남아 있다. 그 길을 걸으며 나는 이 향수와 이 골목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둘 다 전성기가 지난 자리에 남아 있고 둘 다 그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화려했던 시절을 복원하려 애쓰지 않고 그냥 지금의 속도로 있다.


다만 하나는 다르다. 계단은 밟히면서 닳지만 향수는 병에 남아 있는 한 닳지 않는다. 열어서 쓰는 순간에만 줄어든다. 쓰지 않으면 영원하지만 쓰지 않는 향수는 향수가 아니다.


뀌르 드 뤼시는 오래 곁에 두고 가끔 꺼내 쓰기 좋은 향수다. 매일 뿌리기에는 지나치게 사연이 많고 특별한 날에만 쓰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하다. 그 애매한 자리가 이 향수의 자리다. 아무 일도 없는 저녁에 혼자 오래된 것을 만지고 싶은 날이 있다면 그날이 이 향수의 날이다.


탱고가 계단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당 안까지 함께 들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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