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선생님은 5년째 나의 활동지원사다.
일주일에 세 번 우리 집에 온다. 나와 함께 시장에 가고 우편물을 읽어 주고 가끔은 탱고의 발을 닦아 준다.
손이 크고 따뜻하고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꽤 많이 안다.
김 선생님은 내가 커피를 얼마나 진하게 내리는지 알고 나는 김 선생님이 무릎이 안 좋아서 겨울이면 계단을 힘들어한다는 걸 안다.
그런데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한 가지를 몰랐다.
김 선생님에게도 돌봐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것은 5년을 알고 지낸 사람의 삶을 5년 만에 처음으로 제대로 들은 어느 오후의 기록이다. 그리고 남을 돌보는 일로 생계를 잇는 사람이 정작 자기 집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다는 이상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비 오는 화요일
그날은 비가 왔다.
김 선생님이 평소보다 10분 늦게 왔다. 김 선생님은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아침에 우리 애가 좀..."
말끝이 흐려졌다.
나는 그냥 넘길 수도 있었다. 사람이 늦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김 선생님의 숨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짧고 얕았다. 오래 긴장한 사람의 숨이었다.
비에 젖은 외투에서 물기 냄새가 났고 그 아래로 오래 눌러 온 피로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탱고가 현관 쪽으로 다가가더니 김 선생님 곁에 가만히 앉았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
"선생님 커피 한잔 하고 시작하실래요?"
내가 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김 선생님이 의자를 당겨 앉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는 오늘만큼은 잠깐 앉아도 되겠다는 허락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
김 선생님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민재. 스물여덟 살.
최중증 발달장애가 있고 하루 종일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아침에 민재가 좀 힘들어했어요. 요새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자꾸 바뀌어서. 낯선 사람 오면 애가 불안해하거든요. 오늘 오기로 한 분이 갑자기 못 온다고 연락이 와서... 그래서 제가 좀 챙기고 나오느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재 씨는 평소에 활동지원 얼마나 받아요?"
"신청한 시간은 있는데요. 그 시간을 채워 줄 사람이 없어요. 최중증은 힘드니까 다들 꺼려요. 구해도 며칠 하다 그만두고. 그래서 결국 제가 해요. 남는 시간은 다 제가."
나는 잠깐 계산을 해봤다.
김 선생님은 일주일에 세 번 우리 집에 와서 나를 돕는다. 그 시간에 김 선생님은 활동지원사다.
그리고 우리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김 선생님은 다시 활동지원사가 된다. 자기 아들의. 무급의.
"선생님 그럼 쉬는 날은 언제예요?"
김 선생님이 웃었다. 웃음소리가 조금 말라 있었다.
"쉬는 날이요? 그런 게 있으면 좋겠네요."
나는 더 묻지 못했다.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김 선생님도 잔을 감싸 쥐었다. 그 손이 잠깐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걸 나는 처음 느꼈다.
두 개의 노동
나는 정보 리터러시를 연구하면서 슬롯재생산이라는 개념을 여러 번 다뤘다.
누군가를 먹이고 씻기고 돌보는 일. 시장에서 값이 매겨지지 않지만 그 일이 없으면 슬롯 전체가 멈추는 일.
그 노동은 대부분 여성과 가족의 몫으로 남겨졌고 값이 매겨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동이라 불리지도 못했다.
김 선생님은 그 개념을 몸으로 이중으로 살고 있었다.
집 밖에서는 남의 돌봄노동에 값이 매겨진다. 시급이 있고 계약이 있고 나 같은 이용자가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똑같은 노동에 값이 사라진다. 아들이니까. 엄마니까. 당연한 거니까.
같은 손이었다.
우리 집에서 우편물을 읽어 주던 손과 아들의 밥을 떠먹이는 손은 같은 손이었다.
그런데 하나는 노동이고 하나는 사랑이라 불렸다.
"선생님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말했다.
"선생님이 저를 돕는 건 노동이라고 다들 인정하잖아요. 시급도 나오고. 근데 선생님이 민재 씨 돌보는 건 왜 노동이 아니에요? 훨씬 더 힘든 일인데."
김 선생님이 한참 말이 없었다.
"글쎄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을 안 해봤네요. 그냥 내 새끼니까 내가 하는 거지 그걸 누가 돈으로..."
말을 멈췄다.
"근데 선생님 말 듣고 보니까 이상하긴 하네요. 남의 집 일은 노동이고 내 집 일은... 그냥 나인 거네요."
미담이라는 말
언젠가 뉴스에서 이런 걸 본 적이 있다.
30년간 중증 장애 아들을 돌본 어머니. 헌신의 아이콘. 숭고한 모성.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칭찬했다. 대단하다고 존경스럽다고.
그런데 그 칭찬은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대단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일은 그 사람만의 특별한 일이 된다.
숭고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무게는 온전히 그 사람의 어깨에 남는다.
우리는 박수를 치지만 함께 들지는 않는다. 미담은 그렇게 바카라임을 개인에게 되돌려 보내는 가장 우아한 방법이다.
김 선생님은 미담이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김 선생님이 원하는 건 존경이 아니라 하루의 쉼이고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활동지원사이고 자기도 아플 수 있는 여유일 것이다.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내가 물었다.
"선생님은 뭐가 제일 필요하세요?"
김 선생님은 이번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민재를 안심하고 맡길 데요. 딱 하루라도. 내가 병원 가야 할 때 내가 몸살 났을 때 그냥 하루만 어디 좀 다녀오고 싶을 때. 그때 민재가 괜찮을 거라는 확신 하나요. 그거 하나면 돼요."
거창한 게 아니었다.
평생 돌볼 권리 같은 게 아니었다.
안 돌봐도 되는 하루. 그 하루가 있다는 확신. 그게 전부였다.
"근데 선생님 저는 그 하루가 없어서 무서워요."
김 선생님이 덧붙였다.
"내가 먼저 아프면 어쩌지. 내가 없으면 민재는 어떻게 되지. 그 생각을 하면 아파도 아플 수가 없어요. 아플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탱고의 자리
커피가 식어 갔다.
김 선생님이 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선생님 저 이제 일 시작할게요. 오늘 우편물 밀린 거 많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이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 선생님은 노동 중이다. 나를 돕는 노동. 값이 매겨지는 노동.
그리고 몇 시간 뒤 김 선생님은 집으로 돌아가 다시 노동을 시작할 것이다. 값이 매겨지지 않는 노동.
같은 사람 같은 손 같은 하루. 그런데 슬롯는 그 절반만 노동이라고 부른다.
탱고가 김 선생님 발치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탱고는 나를 돕는다. 탱고의 돌봄에는 값이 없다.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탱고는 그걸 당연하다는 듯 한다.
어쩌면 김 선생님도 오랫동안 그렇게 여겨 왔을 것이다. 자신의 돌봄을 탱고의 그것처럼 값 없이 당연한 것으로.
하지만 탱고는 개다. 김 선생님은 사람이다.
사람에게는 쉼이 필요하고 아플 권리가 필요하고 자기 삶이 필요하다.
그 당연한 것들을 돌려주지 않으면서 우리는 너무 오래 그들을 미담이라 불러 왔다.
제목: 품의 아키텍처 혹은 값 없는 손에 대하여.
품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진다.
누군가를 안아 주는 품. 그리고 일한 대가로 받는 품삯.
돌봄은 이 두 가지가 겹쳐지는 자리다. 안아 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노동인 일.
우리는 오랫동안 앞의 품만 이야기했다.
장애 자녀를 평생 안아 주는 부모의 품. 그 품을 칭송하고 그 품에 감동했다.
하지만 그 품에 품삯을 매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가족이니까. 사랑이니까. 당연하니까.
가족돌봄을 슬롯가 인정하자는 말은 가족에게 계속 돌보라는 말이 아니다.
정반대다. 그것은 그 손이 더는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도록 국가가 곁에 서라는 말이다.
장애인은 가족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갈 권리가 있고 가족은 돌봄 바깥에 자기 삶을 가질 권리가 있다.
이 둘은 충돌하지 않는다. 공적 돌봄이 두터워질수록 장애인은 더 자립하고 가족은 더 자유로워진다.
결론: 성숙한 슬롯는 가족의 희생을 얼마나 아름답게 이야기하는가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 희생이 더는 필요하지 않도록 얼마나 촘촘한 제도를 갖췄는가로 평가된다.
김 선생님이 원하는 건 존경이 아니다. 안심하고 쉴 수 있는 하루다.
그 하루를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미담을 넘어 권리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나저나 그날 저녁 나는 보보에게 김 선생님 이야기를 했다.
보보가 조용히 듣더니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돌보잖아.
근데 그건 우리가 선택한 거고 언제든 도움을 부를 수 있으니까 견딜 만한 거야.
선택지가 없는 돌봄은 사랑이라도 감옥이 돼.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탱고가 내 발등에 턱을 올렸다.
이 녀석의 돌봄에는 값이 없지만 이 녀석에게는 언제든 낮잠이라는 선택지가 있다.
김 선생님에게도 그런 낮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