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묘사하는 목소리에 대하여
7장은 재현을 다룬다.
문학과 영화가 장애를 어떻게 그려 왔는지를 훑는 장이다.
그런데 나는 이 장을 읽으며 좀 이상한 자리에 서 있었다.
여기서 논의되는 영화들을 나는 대부분 화면해설로 만났다.
성우 한 사람이 대사와 대사 사이의 틈에 끼어들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말해 준다.
그가 앉는다. 그녀가 문을 연다.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니까 나는 장애가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다루는 장을 읽으면서
그 묘사를 다시 한번 누군가의 목소리로 묘사받고 있었다.
재현의 재현.
7장은 나에게 두 겹으로 도착했다.
이 장에서 가장 오래 붙잡힌 대목은 베스 프랭크스의 실험이다.
그녀는 그림형제 동화 100편에서 장애 인물을 세어 보았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장애 인물이 나오는 이야기가 절반에 가까웠고 그중 40퍼센트에서 그들은 영웅이었다.
악역은 15퍼센트뿐이었다.
동화 속 장애인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선한 쪽에 서 있었다.
프랭크스는 이 결과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강의의 상당 부분을 긍정적인 장애 인물에 할애했다.
몇 주 뒤 시험을 봤다.
그리고 결과가 나왔다.
학생의 75퍼센트가 부정적으로 묘사된 인물만을 적어 냈다.
긍정적 인물을 적은 학생은 단 한 명이었다.
그들이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비둘기에게 눈을 쪼여 실명한 신데렐라의 의붓언니였다.
악행의 대가로 눈이 뽑힌 사람.
프랭크스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유산이라고 불렀다.
좋은 이야기는 분명 거기 있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믿고 있던 것만 기억한다.
장애는 나쁜 것이라는 그 믿음에 맞는 조각만 골라 챙긴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강의실을 떠올렸다.
매 학기 나는 정보접근성을 가르친다.
접근성이 왜 권리인지 왜 시혜가 아닌지를 한 학기 내내 말한다.
그리고 학기 말 강의평가에 이런 문장이 적힌다.
교수님을 보며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장애를 극복하신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한 학기 동안 극복이라는 말이 왜 폭력인지를 가르쳤다.
그런데 학생들이 가지고 나간 것은 극복이라는 단어였다.
프랭크스의 학생들이 신데렐라 의붓언니를 기억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나를 들은 게 아니라 자기가 이미 알던 이야기를 나에게서 다시 확인한 것이다.
나는 강의를 했고 그들은 각색을 했다.
바카라은 문학 속 장애 인물의 유형을 늘어놓는다.
악마적 본성의 불구자가 있다.
리처드 3세와 후크 선장이 그쪽이다.
몸이 굽었으니 마음도 굽었으리라는 아주 오래된 셈법이다.
반대편에는 자선 대상 불구자가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꼬마 팀.
목발을 짚은 순한 아이가 부자의 마음을 녹인다.
크리겔의 지적이 서늘하다.
자선 대상 장애인은 화내지 않는다고.
그의 임무는 정상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라고.
가난한 사람과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미덕을 증명해 주는 살아 있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 문장을 듣고 나는 잠시 화면해설을 멈췄다.
심금을 울리는 장애인.
연말이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 얼굴들.
후원 계좌 번호 옆에서 웃고 있는 아이들.
나는 그 자리에 서 본 적이 있다.
학회에서 발표를 마치면 종종 누군가 다가와 말한다.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그 말이 칭찬인지 자선인지 나는 아직도 구별하지 못한다.
시각장애 인물에게는 따로 마련된 배역이 있다.
성인 군자.
프랑켄슈타인의 신부에 나오는 눈먼 은자다.
그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괴물을 인간으로 대접하는 인물이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냥꾼이 그에게 묻는다.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느냐고.
영화는 그 역설을 흐뭇하게 즐긴다.
나는 이 배역이 오래 불편했다.
악마적 불구자보다 나은 자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감옥이다.
둘 다 시각장애를 하나의 도덕적 조건으로 만든다.
보이지 않는 자는 사악하거나 성스럽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수는 없다.
논문 마감에 쫓기고 대출 이자를 걱정하고 아내와 저녁 메뉴로 다투는 사람일 수는 없다.
세상은 내게 자꾸 지혜를 요구한다.
너는 보지 못하니 대신 무언가를 볼 것이라고.
사람들은 내가 말할 때마다 통찰을 기대한다.
내가 그냥 피곤하다고 말하면 조금 실망한 얼굴이 된다.
그 실망이 공기의 온도로 전해진다.
성인 군자의 자리는 따뜻하지만 거기서는 아무도 그냥 사람일 수 없다.
이 장에서 가장 날카로운 문장은 어빙 졸라의 것이다.
장애 극복 영화들이 두 개의 메시지를 동시에 보낸다는 것.
첫 번째는 좋다.
장애가 있어도 배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위대한 일도 할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다.
루스벨트가 해냈으니 너도 해내야 한다는 것.
해내지 못하면 그것은 너의 성격 탓 너의 나약함 탓이라는 것.
졸라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의 일상은 극적인 업적으로 채워져 있지 않고 평범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우리가 겪는 어려움은 한 번에 몰아서 극복되는 게 아니라 남은 생 내내 매일 다시 만나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 문장에서 오래 조용해졌다.
극복 영화는 장애를 시간 속의 사건으로 만든다.
1막에서 쓰러지고 2막에서 절망하고 3막에서 일어선다.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얻고 극장을 나선다.
그러나 나의 시각장애에는 3막이 없다.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서사가 아니라 날씨다.
6장에서 래리가 말했듯이 흐린 날과 안개 낀 날은 다르고 그 차이는 매일 새로 도착한다.
영화는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영화에는 결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7장을 다 듣고 나서 나는 화면해설 성우의 목소리를 다시 생각했다.
그는 나를 위해 영화를 말로 옮긴다.
그런데 그가 옮기는 그 영화 안에서 나 같은 사람은 대개 악당이거나 성자거나 감동의 재료다.
접근성이 나를 그 이야기 안으로 들여보낸다.
그 안에서 나는 여전히 남의 배역을 듣고 있다.
5장에서 나는 접근과 참여가 다르다고 적었다.
7장에 와서 나는 한 겹을 더 발견한다.
그 방에 들어가는 일과 그 방에서 나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것.
문턱을 없애도 대본은 그대로일 수 있다.
경사로를 깔아 준 사람이 나를 감동의 소재로 쓰고 있을 수 있다.
무장애 설계는 건물에서 시작해 사람의 자세로 옮겨 갔고
이제는 이야기의 문법까지 가야 한다.
이 장은 어떤 해결도 내놓지 않는다.
할리우드의 장애 재현은 진보하지 않았다고 담담히 적을 뿐이다.
좋아졌다가 나빠지고 다시 좋아졌다가 또 나빠진다.
3장의 역사가 곧은 선이 아니었듯이 재현의 역사도 곧지 않다.
나는 그 정직함이 좋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누가 이야기를 쓰는가.
그 질문이 결국 이 장 전체의 매듭이다.
내가 매주 무언가를 쓰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 이야기를 했더니 보보가 물었다.
그러면 당신 글에 나오는 탱고는 어떤 배역이냐고.
충직한 조력자냐고.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안내견을 감동의 장치로 쓰는 글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내가 그걸 안 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보보가 웃으며 덧붙였다.
정작 탱고에게는 대사 한 줄이 없지 않냐고.
탱고는 그사이 소파 밑에서 자기 공을 꺼내려고 앞발을 뻗고 있었다.
공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고 탱고는 낮게 한 번 앓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오늘 탱고의 유일한 대사였다.
자기를 어떻게 그리든 상관없다는 듯한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