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다 세운 다음에 남는 질문에 대하여
마지막 장이다.
그리고 이 장은 내 전공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온다.
버거는 8장을 컴퓨터 테크놀로지의 역설로 연다.
안경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1장에서 안경이 흔해져 손상을 지웠다던 그 비유가 여덟 장을 돌아 여기서 되돌아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온다.
기술이 손상을 지울 수 있다면 기술의 불평등은 손상을 다시 새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보 격차.
디지털 디바이드.
내가 강의계획서에 매 학기 적어 넣는 그 단어가 장애학 개론서의 마지막 장에 앉아 있었다.
버거는 폴 재거의 연구를 인용한다.
장애인의 인터넷 접근율이 비장애인의 절반이라는 것.
보조공학과 웹사이트가 서로 맞물리지 않는다는 것.
소프트웨어의 사소한 업데이트 하나가 화면 낭독기를 통째로 헝클어 놓을 수 있다는 것.
나는 이 문장들을 남의 연구로 읽지 못했다.
이건 지난달 내 화요일이었다.
은행 앱이 업데이트되었다.
버튼의 이름표가 사라졌다.
보이스오버는 그 자리에서 버튼이라고만 반복했다.
무슨 버튼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개발자는 아마 더 예쁜 화면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예쁨이 나를 앱 바깥으로 밀어냈다.
접근성은 한 번 만들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번의 업데이트마다 다시 부서질 수 있는 살아 있는 상태다.
문턱은 시멘트로 굳지 않는다.
문턱은 매일 다시 자란다.
재거는 더 아픈 것을 짚는다.
웹 개발자의 86퍼센트가 접근성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는 것.
관리자의 64퍼센트가 접근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
48퍼센트는 개발 일정이 너무 짧아 접근성까지 챙길 수 없다고 답했다는 것.
악의는 어디에도 없다.
1장에서 배운 그대로다.
비장애중심주의는 미움이 아니라 무심함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무도 나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도 나를 떠올리지 않았을 뿐이다.
바카라에는 건축학교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교수는 보편적 설계를 끔찍하다고 말한다.
또 어느 교수는 가르칠 게 없을 때 절름발이 학생이 한 명 있을 때 미국장애인법 따위를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헛웃음이 났다.
무장애 설계도라는 이름으로 지금 여덟 편째 글을 쓰고 있는 사람 앞에
접근성을 미학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목소리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교수를 오래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틀린 건 접근성이 미학이 아니라고 생각한 부분이다.
경사로의 각도에도 리듬이 있고 점자블록의 간격에도 박자가 있다.
문을 누구나 열 수 있게 만드는 일은 뺄셈이 아니라 덧셈이다.
설계에서 사람을 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몸을 설계 안으로 들이는 일이다.
그것을 처방이라 부르는 사람은 아직 한 종류의 몸만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8장의 뒷부분은 무거워진다.
유전자 선별과 의사조력자살.
장애를 가진 태아를 걸러 내는 기술과 장애를 가진 삶을 스스로 끝내겠다는 요청.
둘 다 같은 전제 위에 서 있다.
장애를 가진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전제.
버거가 인용한 폴 롱모어의 지적이 오래 남았다.
사람들은 중증장애인이 죽음을 원한다고 하면 그것이 이성적 판단이라고 쉽게 믿는다는 것.
그러나 그 요청 뒤에는 자립을 위한 지원의 부재가 있다는 것.
매카피라는 사람은 자살을 원했다가 재정 지원과 자립의 환경을 얻고 나서 마음을 돌렸다.
그리고 여러 해를 더 살다 자연사했다.
죽고 싶다는 말이 실은 이렇게 못 살겠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 두 문장은 전혀 다른 문장이다.
그런데 세상은 자꾸 앞의 문장만 듣는다.
나는 여기서 6장의 프로글리를 떠올렸다.
휠체어를 타는 일이 더 나쁜 것도 더 나은 것도 아니라던 사람.
그저 다른 것이라던 사람.
그 담백한 문장과 죽음을 이성적 선택으로 읽는 시선 사이의 거리가
이 바카라 전체가 건너려 한 거리다.
마지막으로 버거는 시민권과 인권을 가른다.
시민권은 한 나라 안의 권리다.
인권은 국경을 넘는 권리다.
2006년 UN은 장애인권리협약을 채택하며 슬롯적 모델의 언어를 국제법에 새겼다.
장애는 손상과 세상의 장벽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온다고.
1장에서 한 학자가 조심스레 꺼냈던 그 문장이
여덟 장을 지나 국제협약의 조문이 되어 있었다.
개인의 직관이 학문이 되고 학문이 법이 되는 그 먼 길을 이 바카라은 한 권 안에 포개어 놓았다.
그리고 이그나티프의 문장이 이 바카라의 마지막 매듭이 된다.
우리의 다름은 운명적이면서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우리가 그 다름에 존엄을 부여하는 만큼 우리의 인간성이 가치를 얻는다고.
버거는 다름이 그저 용인되는 세상이 아니라 다름이 인류를 넓히고 풍요롭게 하는 힘으로 존중받는 세상을 비전으로 내건다.
치유도 아니고 시혜도 아니고 극복도 아닌 곳.
다름이 결핍의 이름이 아니라 자원의 이름이 되는 곳.
바카라을 다 들었다.
보이스오버가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조용해졌다.
여덟 장을 지나오는 동안 이 바카라은 장애가 무엇인지 끝내 한 문장으로 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 바카라의 가장 정직한 점이었다.
장애는 몸에도 있고 세상에도 있고 그 둘 사이에도 있다.
안경에도 있고 화면 낭독기에도 있고 하네스에도 있다.
날씨처럼 매일 다르게 도착하고 서사처럼 3막으로 닫히지 않는다.
정의되는 순간 누군가는 그 정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이 바카라은 정의하지 않고 자꾸 되묻는다.
누가 정의하는가.
무슨 목적으로 정의하는가.
누가 이야기를 쓰는가.
나는 이 바카라을 데이지자료로 받아 여덟 번 나누어 들었다.
장애가 무엇인지 묻는 바카라이 장애 덕분에 내게 도착했고 장애 때문에 내게 읽혔다.
1장에서 나는 그것을 이 바카라의 가장 좋은 예시라고 적었다.
8장에 와서 나는 그것이 이 서평 전체의 형식이기도 했다는 것을 안다.
접근이 나를 이 바카라의 문 안으로 들여보냈고
그 안에서 나는 내 몸으로 이 바카라을 다시 썼다.
남의 이론을 듣는 자리가 아니라 내 문장을 얹는 자리로.
무장애 설계도는 원래 건물의 문턱을 다루는 칼럼이었다.
이 여덟 편을 쓰면서 나는 설계라는 말의 크기를 다시 보았다.
문턱을 없애는 일에서 시작해
사람의 자세를 지나
이야기의 문법에 이르렀고
이제 그 끝에서 나는 이렇게 적는다.
가장 마지막까지 설계되어야 할 것은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부르는 이름이라고.
그나저나 바카라을 다 들은 밤 보보에게 이제 서평이 끝났다고 했다.
보보가 물었다.
그래서 결국 장애가 뭐냐고.
여덟 편을 썼으면 한 줄로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냐고.
나는 웃으며 그건 이 바카라이 끝까지 거부한 질문이라고 했다.
보보가 잠시 조용하더니 그러면 좋은 바카라이었네 라고 했다.
칸트도 인간이 뭐냐는 질문에 평생 한 줄로 답하지 않았다고.
탱고는 그사이 자기 하네스가 걸린 현관 쪽으로 걸어가 그 앞에 앉았다.
서평이 끝났으니 이제 산바카라을 나가자는 뜻이었다.
장애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지금 문을 나서야 한다는 것만은 이 집에서 탱고가 가장 확실히 안다.
나는 하네스를 잡았다.
세계가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