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견과 함께 걷는 몸에 대하여
6장에서 이 바카라은 드디어 몸으로 들어온다.
현상학이라는 말이 앞의 장들에서 여러 번 스쳐 지나갔지만 여기서는 본편이 된다.
손상을 가진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는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걷지 않고 어떻게 세계 안에 있는가.
나는 이 장을 들으며 여러 번 멈췄다.
내가 밥벌이로 삼는 방법론이 마침내 내 몸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구자로서 나는 이 장을 읽는다.
동시에 이 장은 나를 읽는다.
장의 첫머리는 헬렌 켈러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그녀가 어떻게 세계를 알았는지를 이 바카라은 길게 인용한다.
그녀는 자기 몸의 모든 원자가 진동계라고 적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에서 어른과 아이를 갈랐고 남자와 여자를 갈랐다.
피아노 뚜껑에 손을 얹으면 선율이 손바닥으로 다시 들려왔다고 했다.
철공소에서 일하는 사람과 목수를 냄새로 구별했고 부엌에서 온 사람과 정원에서 온 사람을 알아맞혔다.
좋아하는 사람의 향기는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다고 그녀는 적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나도 그 향기만은 단번에 알아볼 것이라고.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머물렀다.
켈러가 열거한 것들은 내가 텍스트 다이닝이라는 이름으로 매번 붙잡으려 애쓰던 감각들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문학적 기교로 쓴 게 아니었다.
그것이 그녀의 인식론이었다.
진동과 냄새와 온도가 그녀에게는 이론이자 세계였다.
백 년도 더 전에 한 여자가 자신의 몸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만들어 두었다.
바카라은 곧 켈러에서 내려온다.
법적 맹의 대부분은 시력을 완전히 잃지 않는다고 이 장은 적는다.
그리고 베스 오만스키를 다시 불러온다.
4장에서 부모의 바람에 떠밀려 정상의 편에 세워졌던 그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이 맹의 경계에 산다고 말한다.
완전히 보이지도 완전히 안 보이지도 않는 자리.
세상은 그녀에게 어느 한쪽에 속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다 정작 필요한 편의를 요청하면 그 틈새로 떨어진다.
이 장에는 래리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의 시력은 날씨에 따라 변한다.
비 오는 날과 흐린 날이 다르고 안개 낀 날과 구름 낀 날이 또 다르다.
칼을 쓸 때 조명이 조금만 어두우면 토마토 대신 당근을 썰게 될지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이 문장에서 웃었다.
웃고 나서 오래 조용해졌다.
비장애인은 시각장애를 스위치라고 생각한다.
켜져 있거나 꺼져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러나 그것은 날씨다.
습도이고 각도이고 그날의 피로다.
같은 사람이 어제는 하던 일을 오늘은 못 한다.
그럴 때 누군가는 말한다.
어제는 되지 않았느냐고.
오만스키는 그 경계의 삶이 통증을 동반한다고도 적는다.
남은 시력을 최대한 짜내려고 몸을 기울이다 보면 목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다.
바카라을 얼굴에서 2인치 떨어뜨려 붙들고 있으면 팔이 저려 온다고 그녀는 썼다.
정상으로 보이려는 자세가 그 몸을 병들게 한다.
이 문장은 4장에서 내가 큰 글씨 교과서를 코앞에 대고 한 줄을 읽던 아이 이야기와 정확히 겹친다.
그때 아팠던 것은 눈이 아니라 목이었다.
이 장의 한복판에 있는 개념은 휠체어-되기다.
크리스티나 파파디미트리우라는 연구자가 척수손상 이후의 회복을 현상학으로 들여다보며 붙인 이름이다.
그녀는 그것을 재신체화라고 부른다.
새로운 몸을 다시 만들어 가는 창조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회복이란 잃어버린 몸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할 수 없다는 자리에서 할 수 있다는 자리로 옮겨 앉는 일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휠체어는 도구이기를 그친다.
한 남성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는 휠체어를 옷에 맞춰 입는다고.
그것은 자기의 일부라고.
다른 남성은 더 멀리 간다.
정신이 자기의 반쪽이라면 휠체어가 나머지 반쪽이라고.
휠체어가 곧 자기 몸이라고.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 휠체어를 사는 사람.
파파디미트리우는 그 전환을 세계 내 존재의 방식이 바뀌는 일이라고 적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바카라을 멈추고 발밑으로 손을 내렸다.
탱고의 등이 만져졌다.
숨결에 맞춰 오르내리는 따뜻한 곡선.
안내견은 도구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반려견도 아니다.
그 중간의 어떤 자리에 정확한 이름이 없다.
파파디미트리우의 문장을 빌리면 그 이름은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개-되기.
나는 탱고와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탱고를 통해 걷는다.
하네스를 잡으면 세계가 켜진다.
그 금속 손잡이는 내 손이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내 감각이 시작되는 자리다.
탱고의 어깨가 왼쪽으로 반 뼘 기울면 앞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걸음이 아주 살짝 느려지면 바닥의 결이 바뀐다는 뜻이다.
탱고가 멈추면 내 발이 멈추기 전에 내 몸이 먼저 안다.
그 정보는 시각이 아니다.
청각도 아니다.
그것은 하네스를 타고 손목의 뼈로 곧장 올라오는 어떤 문법이다.
나는 그 문법을 배운 적이 없다.
2년 동안 함께 걸으면서 그것이 내 몸에 자랐다.
훈련소에서 배운 명령어들이 있다.
직진 좌회전 우회전 앞으로.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쓰는 언어는 그 목록에 없다.
탱고가 내 무릎 옆으로 아주 조금 붙어 서면 그것은 여기 계단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서두르지 말라는 말이다.
내가 손목에 힘을 빼면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네 판단을 믿는다는 말이다.
5장에서 활동 보조인을 자기 리듬으로 다시 가르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기서 되돌아온다.
교재를 다 통과한 뒤에야 진짜 언어가 시작된다.
그러니 내가 시각장애인이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이제 조금 망설인다.
하네스를 잡고 있을 때의 나와 놓고 있을 때의 나는 다른 몸이다.
탱고가 옆에 있을 때 나는 세계를 지각한다.
탱고가 없을 때 나는 세계를 더듬는다.
손상은 그대로인데 몸이 달라진다.
1장에서 안경이 손상을 지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화면 낭독기를 떠올렸다.
6장에 와서야 나는 더 정확한 대답을 얻는다.
내 몸은 나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네스를 지나 네 발로 이어진다.
바카라은 이 장의 어딘가에서 존 호켄베리의 문장을 인용한다.
감각이 없는 몸도 여전히 당신의 몸이라고.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 살과 물로 된 오랜 주머니는 당신 것이라고.
삶은 그저 계속된다고.
나는 그 담백함이 좋았다.
그리고 마이크 프로글리라는 사람의 말이 이 장의 마지막 매듭이 된다.
휠체어를 타는 일이 더 나쁘거나 더 나은 문제가 아니라고.
그저 다른 것일 뿐이라고.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되돌려 들었다.
극복이라는 말도 없고 초월이라는 말도 없다.
비극도 없고 기적도 없다.
다만 다르다는 말 하나가 있다.
3장의 헬렌 켈러가 성녀의 자리에 갇혔던 것을 떠올리면 이 담백함이 얼마나 귀한지 알 수 있다.
6장은 장애가 무엇인지 끝내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장애를 사는 몸들이 각자 자기 세계를 어떻게 지어 올리는지를 보여 준다.
진동으로 짓기도 하고 냄새로 짓기도 하고 바퀴로 짓기도 한다.
나는 네 발과 하네스로 짓는다.
설계도는 저마다 다르고 어느 것도 표준이 아니다.
그것이 이 장이 내게 준 유일한 결론이다.
그나저나 오늘 산바카라길에 탱고가 갑자기 멈췄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잠시 뒤 자전거 한 대가 우리 앞을 지나갔다.
집에 돌아와 보보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보보가 말했다.
그럼 그 자전거를 먼저 안 건 누구냐고.
탱고냐 나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알아챈 건 탱고였지만 멈춘 건 나였고 놀란 것도 나였다.
보보가 웃으며 그러면 논문 한 편은 나오겠다고 했다.
탱고는 그사이 물을 한참 마시고 와서 내 발등에 턱을 얹었다.
자기가 오늘 무슨 대단한 인식론적 사건을 일으켰는지는 전혀 모르는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