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웬 더 레인 스탑스

by김경훈

이번 면담은 제주에서 이뤄졌다.


보보와 함께 떠난 초여름의 여행이었다. 렌터카를 몰고 사려니숲길 초입에 닿았을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주의 비는 육지의 비와 다르다. 예고 없이 쏟아지고 예고 없이 그친다. 우산을 폈다 접었다 하기를 몇 번, 결국 우리는 그냥 맞기로 했다. 탱고가 앞장서서 젖은 흙길을 밟았다. 발밑에서 삼나무 낙엽이 물을 머금고 폭신하게 꺼지는 소리가 났다.


숲은 온통 냄새로 가득했다. 젖은 나무껍질, 이끼가 머금은 물, 어딘가에서 썩어가는 낙엽, 그리고 그 모든 것 위로 퍼지는 삼나무의 서늘한 수지 냄새. 빗소리가 잎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그때 손목에 미리 올려둔 오늘의 면담 상대가 습기를 만나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연구자: 당신을 만나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겠네요.


웬 더 레인 스탑스: (빗소리에 섞여) 저는 비를 담은 향수가 아닙니다. 자주 오해받죠.


연구자: 비가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웬 더 레인 스탑스: 이름을 다시 읽어보세요. 비가 올 때가 아니라, 비가 그칠 때입니다. 저는 그 사이의 순간이에요. 빗소리가 잦아들고, 공기가 무거움을 내려놓기 직전의 그 짧은 틈.



조향사 패니 발이 2022년 이 향수를 만들며 담고자 한 것은 비 그 자체가 아니라 비가 그친 뒤 돌아오는 고요와 온기였다. 태양은 언제나 더 나은 내일의 약속처럼 다시 돌아온다는 것. 레플리카 라인이 늘 그렇듯, 이 향수도 특정한 순간의 기억을 복제한다. 다만 이번에 복제한 것은 장면이 아니라 전환이다. 젖음에서 마름으로,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


첫 향은 서늘하고 푸르다. 그린 노트와 베르가못이 빗물에 씻긴 잎사귀처럼 맑게 올라오고, 핑크 페퍼가 아주 옅은 알싸함을 더한다. 코를 자극하지 않는다. 오히려 콧속을 헹구는 느낌에 가깝다. 숲의 젖은 공기와 향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섞였다.



연구자: 지금 이 숲의 냄새와 당신의 냄새가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웬 더 레인 스탑스: 그게 제가 가장 듣고 싶은 말입니다. 향수가 사람 위에서 튀지 않고 그 자리의 공기가 되는 것. 저는 존재를 주장하지 않아요. 스며들 뿐입니다.


연구자: 겸손한 향수군요.


웬 더 레인 스탑스: 비가 그친 뒤를 생각해보세요. 요란하지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젖은 것들이 마르기 시작할 뿐이죠.



한참을 걷다가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잎을 때리던 물방울 소리가 성글어지더니, 이내 나뭇가지 끝에서 떨어지는 굵은 낙수 소리만 이따금 들렸다. 그리고 팔뚝에 닿는 공기의 온도가 바뀌었다. 축축하게 감기던 습기가 걷히고, 어깨 위로 미지근한 온기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보보가 "그쳤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기 전에 이미 손목에서 알았다.


향이 바뀌고 있었다. 미들의 워터리 노트와 레인 노트가 터키쉬 로즈, 재스민과 만나면서 젖은 꽃의 냄새를 피워 올렸다. 화병에 꽂힌 꽃이 아니라 비 맞은 정원의 꽃. 물기를 잔뜩 머금어 향이 무거워진 장미. 앞서 롬브르 단 로에서 만난 적 있는 그 젖은 장미의 사촌 격이다. 다만 이쪽은 비가 그치는 중이라 조금 더 밝다.


베이스로 내려가면 마침내 이 향수의 뿌리가 드러난다. 소나무와 모스와 패츌리. 사려니숲길 그 자체다. 젖은 침엽수, 바위에 낀 이끼, 발밑에 밟히는 흙. 제주의 숲이 통째로 손목에 옮겨 앉은 것 같았다. 조향사가 프랑스에서 이 향을 만들 때 제주를 떠올렸을 리 없는데, 향은 신기하게도 이 자리에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좋은 향수는 만든 사람의 의도를 넘어 맡는 사람의 기억에 가서 앉는다.


숲을 빠져나올 무렵 어깨가 제법 따뜻해져 있었다. 탱고가 몸을 한 번 크게 털어 물기를 날렸다. 보보가 웃었다. 비가 그친 제주의 숲에서, 나는 비가 그치는 순간을 담은 향수를 손목에 얹고 있었다. 향과 장소와 날씨가 이렇게까지 겹치는 경험은 드물다.


웬 더 레인 스탑스는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어울리는 향수다. 한바탕 쏟아진 뒤, 아직 다 마르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괜찮아질 것 같은 그 순간. 비를 원망하지 않고, 그렇다고 억지로 밝은 척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조용히 다음을 기다리는 마음. 그런 마음에게 이 향수는 가만히 어깨를 내어준다.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메종 마르지엘라 레플리카 바이 더 파이어플레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