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설명하는 문법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2장을 듣다가 한 대목에서 보이스오버를 멈췄다.
1969년에 로버트 스콧이라는 슬롯학자가 시각장애인을 연구했다는 부분이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복지 전문가 앞에서 자신을 일부러 더 의존적이고 더 순응적인 사람으로 내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서비스를 받으려면 전문가가 기대하는 모습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작년 가을의 한 오후를 떠올렸다.
활동지원 종합조사를 받던 날이었다.
조사원이 집으로 와서 항목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혼자 식사를 할 수 있습니까. 혼자 외출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할 수 있다.
탱고와 함께라면 동네 어디든 간다.
보이스오버로 배달도 시키고 송금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날 그 능력들을 조금씩 접어 두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할 수 있다는 말 뒤에 붙는 단서들을 더 길게 말했다.
도움이 있으면요. 익숙한 길이라면요. 시간이 많이 걸리긴 하지만요.
유능한 쪽이 아니라 곤란한 쪽으로 조명이 비추도록 몸의 각도를 틀었다.
그 조사표의 점수는 내가 무엇을 못 하는지를 적을 때만 올라갔기 때문이다.
조사원이 돌아간 뒤 나는 조금 지쳤다.
부족함을 연기하는 일은 능력을 쓰는 일보다 더 피로했다.
스콧은 1969년에 이미 그 피로에 이름을 붙여 두었던 것이다.
2장은 장애를 설명하는 여러 모델을 늘어놓는다.
의료적 모델은 장애가 내 몸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바뀌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다.
슬롯적 모델은 정반대로 말한다.
장애는 내 몸이 아니라 그 몸을 들이지 않는 세상의 설계 안에 있다.
계단과 보안 문자와 편견 어린 시선이 장애를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오래 슬롯적 모델 쪽 사람이었다.
무장애 설계도라는 이름으로 매주 그 이야기를 써 왔으니까.
문제는 몸이 아니라 설계다.
그 문장은 내 글의 척추였다.
그런데 활동지원 종합조사 앞에서 나는 의료적 모델의 저울에 내 몸을 올려놓고 있었다.
세상의 설계를 비판하는 사람이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내 몸의 결손을 증명해야 했다.
두 모델은 바카라 속에서는 사이좋게 두 절로 나뉘어 있었지만 내 삶에서는 같은 오후에 충돌했다.
그래서 2장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현상학을 다루는 짧은 대목이었다.
거기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곧 우리의 몸이라고.
슬롯적 모델은 장애를 세상의 문제로 옮겨 놓는 데 성공했지만 그러느라 몸 자체를 그림 밖으로 밀어냈다는 지적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완벽하게 설계되어 모든 문이 열리고 모든 화면이 읽힌다 해도 내 시각 손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온종일 귀로 읽는 일의 피로도 사라지지 않는다.
내 몸은 슬롯가 구성한 허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내가 깨어나 빛 대신 소리로 방의 윤곽을 더듬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사실이다.
현상학적 질적연구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자리를 안다.
체화된 경험에서 시작하라는 것.
손상도 설계도 결국 한 몸 안에서 만난다는 것.
2장은 내가 연구실에서 쓰는 방법론의 족보를 슬쩍 펼쳐 보여 주었다.
2장에는 비장애가 어떻게 정체성이 아닌 척하는지를 말하는 대목도 있다.
비장애는 너무 당연해서 자신을 하나의 정체성으로조차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상이라는 것은 늘 이름표를 떼고 다닌다.
이름표를 단 쪽은 언제나 다른 몸들이다.
또 한 대목에서는 해방적 연구라는 말이 나온다.
연구자는 장애인을 위한 연구를 혼자 해낼 수 없으며 다만 스스로를 해방하려는 사람들 곁에 함께 설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다시 돌려 들었다.
정보소외계층을 연구한다고 적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까닭을 그것이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나도 그 곁의 한 자리다.
2장을 다 듣고 나서도 어느 모델이 맞는지는 끝내 정해지지 않았다.
바카라은 한 이론을 왕좌에 앉히지 않는다.
의료적 모델도 슬롯적 모델도 현상학도 정치경제학도 각자 한 귀퉁이씩만 밝힌다.
나는 그 미결이 다행스러웠다.
하나의 문법이 나를 다 설명하는 순간 나는 그 문법의 예문이 되어 버릴 테니까.
어느 것도 혼자서는 나를 가지지 못한다.
활동지원 종합조사 앞의 나와 무장애 설계도를 쓰는 나와 아침마다 소리로 방을 더듬는 나는 서로 다른 모델의 예문이다.
그리고 그 셋은 같은 사람이다.
그나저나 2장 이야기를 했더니 보보가 반가워했다.
철학과에서도 평생 하는 일이 결국 어느 렌즈로 세상을 볼지 고르는 일이라며.
칸트로 볼지 흄으로 볼지를 두고 사람들이 학회에서 얼굴을 붉힌다고.
나는 우리가 렌즈를 고르느라 이렇게 피곤한데 누군가는 참 속 편하겠다고 했다.
탱고는 그사이 밥그릇 앞에 앉아 있었다.
세상을 설명하는 탱고의 유일한 모델은 분명했다.
밥이 있으면 좋은 세상이고 없으면 나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