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습(濕)이 많은 날에는 비위(脾胃)가 가라앉는다. — 《동의보감》 잡병편
비가 왔다.
약령시 골목에 비가 오면 한약 냄새가 더 진해진다. 젖은 약재 냄새가 바닥에서 올라온다. 박나리는 그 냄새를 맡으면서 창밖을 봤다.
환자가 없었다.
비 오는 날은 원래 환자가 적다. 오늘은 한 명도 없었다. 오전이 다 갔다.
김원효가 진찰실에서 나왔다.
“오늘 없지.”
“네.”
“비 와서.”
“네.”
김원효가 창가에 섰다. 골목을 내려다봤다. 박나리는 그 뒷모습을 봤다. 퇴근하고 나서도 가끔 저렇게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선생님.”
“응.”
“뭘 봐요. 거기서.”
김원효가 잠깐 가만히 있었다.
“비.”
그게 다였다.
박나리가 차를 끓였다. 쌍화차였다. 환자한테 주는 거였는데 환자가 없으니까 두 잔을 끓였다. 한 잔을 김원효한테 줬다.
“웬일이야.”
“환자가 없어서요.”
김원효가 받았다. 두 손으로 쥐었다. 따뜻한 걸 느끼는 것 같았다. 박나리도 자기 잔을 두 손으로 쥐었다.
둘이 창밖을 봤다.
비가 왔다.
“선생님.”
“응.”
“왜 여기서 해요.”
김원효가 차를 마셨다.
“뭐가.”
“부자라면서요. 왜 이런 데서.”
김원효가 잠깐 박나리를 봤다. 그리고 다시 창밖을 봤다.
“여기가 마음에 들어서.”
“어디가요.”
“냄새가.”
박나리가 그 말을 들었다. 젖은 약재 냄새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비 오는 날의 냄새였다.
더 묻지 않았다.
점심때가 됐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밥.”
“네.”
“시킬까.”
“비 와서 배달 늦을 텐데요.”
“기다리지 뭐.”
김원효가 폰을 꺼냈다. 한참 봤다. 뭘 시킬지 못 정하는 것 같았다.
“나리야.”
“네.”
“뭐 먹을래.”
“아무거나요.”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데.”
박나리가 그 말을 들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말이었다. 강민정 씨한테 했던 말이랑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결정하는 게 제일 어렵다는 그 말.
선생님도 결정을 못 하는구나.
박나리는 그게 좀 의외였다.
“된장찌개요.”
박나리가 정했다.
“순남식당?”
“배달 되나 모르겠네요.”
“전화해봐.”
박나리가 전화했다. 순남식당이었다. 비 오는 날인데도 받았다.
“배달은 안 하는데.”
박순남 목소리였다.
“아, 그럼 됐어요.”
“어디예요?”
“약령시요. 심의당이요.”
전화기 너머로 박순남이 잠깐 있었다.
“거기 원장님 한의원이요?”
“네.”
“내가 갖다줄게요.”
“네?”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비 와서.”
삼십 분 뒤에 박순남이 왔다.
우산을 접으면서 계단을 올라왔다. 삐걱, 끼익. 손에 보온 가방을 들고 있었다. 된장찌개 두 그릇과 밥과 반찬이었다.
“비 오는데 죄송해요.”
“아니에요. 나도 바람 쐬고 좋지.”
박순남이 가방을 풀었다. 된장찌개 냄새가 한약 냄새 사이로 퍼졌다. 두 냄새가 섞였다. 이상하게 어울렸다.
김원효가 진찰실에서 나왔다.
“박순남 씨.”
“어, 원장님.”
박순남이 김원효를 봤다. 지난번 진료 이후로 가슴 두근거림이 좀 나아졌다는 걸 말하려다가 말았다. 비 오는 날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어색했다.
“밥 갖다드리러 왔어요.”
“고맙습니더.”
셋이 대기실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환자용 테이블이었다. 진료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앉는 자리였다. 거기서 셋이 된장찌개를 먹었다. 박순남이 가운데였다. 김원효가 한쪽, 박나리가 한쪽이었다.
“맛있네요.”
김원효가 말했다. 박순남이 김원효를 봤다.
“식의(食醫)라는 게 있거든요.”
“그게 뭔데요.”
“음식으로 고치는 의사요. 약보다 위에 있는 의사라예.”
박순남이 그 말을 들었다.
“나는 그냥 밥장사하는 건데요.”
“그게 식의라예.”
박순남이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장사 이십사 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밥을 다 먹고 박순남이 그릇을 챙겼다.
“얼마예요.”
“아니에요. 그냥 드시라고 가져온 거예요.”
“그럼 안 되지.”
김원효가 지갑을 꺼냈다. 박순남이 손을 저었다.
“대신.”
“네.”
“다음에 우리 딸 내려오면 한 번 봐줘요. 서울 가서 편의점 밥만 먹는다고.”
김원효가 잠깐 박순남을 봤다.
“데려오이소.”
“네.”
박순남이 갔다. 우산을 펴고 계단을 내려갔다. 삐걱, 끼익.
박나리가 창문으로 봤다. 박순남이 골목을 걸어 나갔다. 비 사이로. 보온 가방을 들고.
골목 입구에 포르쉐가 서 있었다. 비를 맞고 있었다. 박순남이 그 옆을 지나갔다. 차를 한 번 봤다. 그리고 지나갔다.
“선생님.”
“응.”
“아까 식의라는 거요.”
“응.”
“약의(藥醫)랑 식의랑 심의(心醫)랑 있다고 했잖아요. 전에.”
“그랬지.”
“선생님은 뭐예요.”
김원효가 차를 마셨다. 식은 차였다.
“나는.”
잠깐 있었다.
“아직 모르지.”
박나리가 그 대답을 들었다. 의사가 자기가 뭔지 모른다고 했다. 이상한데 이상하지 않았다.
오후에도 환자가 오지 않았다.
비가 계속 왔다. 박나리는 폰을 보다가 내려놓았다. 김원효는 진찰실에 있었다. 가끔 뭔가 적는 소리가 났다. 수첩인 것 같았다.
박나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창밖을 봤다.
비 오는 날의 심의당은 조용했다. 환자도 없고 약침도 없고 탕약도 없었다. 그냥 두 사람이 있었다. 한약 냄새 사이에 된장찌개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퇴근할 때 비가 그쳤다.
박나리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위를 봤다. 진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김원효는 아직 있었다.
항상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
박나리는 골목을 걸어 나갔다. 비가 그친 약령시 골목은 젖어 있었다. 한약 냄새가 바닥에서 올라왔다.
선생님이 이 냄새가 마음에 들어서 여기 있는다고 했다.
박나리는 그 냄새를 한 번 더 맡았다.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