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6일, 장애인권리보장법이 공포되었다.
2007년 첫 논의가 시작된 지 십구 년 만이었다.
뉴스는 이 법을 두고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에서 권리의 주체로 바꾸는 전환점이라고 전했다.
좋은 문장이다. 나는 그 문장을 화면 낭독기로 여러 번 들었다.
권리의 주체.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그런데 법이 공포되었다는 것과, 그 법이 한 사람의 하루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법은 관보에 실린다. 하지만 권리는 복도에서, 급식실에서, 오전 열한 시 사십 분의 어느 교실에서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않는다.
이것은 법이 공포되고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그 법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대구의 한 고등학교를 찾았다가, 정작 그 법이 말하려던 모든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한 학생을 만난 기록이다.
들어오는 길
보보는 그날 자기 학교에 강의가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는 탱고와 둘이 갔다.
특수교사 박선우 선생님이 정문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삼십 대 후반의 목소리였고, 걸음이 빨랐다.
"박사님,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번에 법 공포되고 나서, 선생님들 대상으로 연수를 꼭 한번 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박 선생님은 학교를 안내하며 자랑스럽게 시설을 짚어 주었다.
"여기 경사로 작년에 새로 깔았고요. 엘리베이터도 전 층 연결됐어요. 지민이 교실도 일부러 일 층으로 배정했고, 보조인력 선생님도 계세요."
복도에는 페인트 냄새가 옅게 남아 있었다. 손이 많이 간 학교였다.
나는 물었다.
"건강 지원은 어떻게 되나요?"
박 선생님의 걸음이 아주 살짝 느려졌다.
"그게... 그 부분이 제일 어려워요."
탱고가 그 미묘한 멈칫함을 느꼈는지, 박 선생님 쪽으로 고개를 한 번 돌렸다.
지민이의 사물함
연수 시작까지 시간이 남아, 박 선생님은 나를 빈 교실로 안내했다.
잠시 후 한 학생이 들어왔다. 고등학교 이 학년 한지민.
또박또박한 발음에, 인사에 군더더기가 없는 학생이었다.
"안녕하세요. 박사님 오신다고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법 만드신 분이세요?"
나는 웃었다.
"아니야. 만든 사람은 따로 있고, 나는 그냥 그 법 가지고 떠드는 사람이야."
"아, 평론가 같은 거네요."
의외로 날카로운 비유였다.
박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지민이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자기 이야기를 했다.
지민이는 일형 당뇨가 있었다. 하루에 여러 번 혈당을 재고, 식사 전에는 인슐린을 맞아야 했다.
"점심 먹기 전에 주사 맞아야 하거든요. 근데 보건실이 삼 층이에요. 저는 일 층 교실이고요."
"그럼 점심때마다 삼 층까지 올라가?"
"네. 근데 보건 선생님이 항상 계신 것도 아니에요. 출장 가시거나 다른 일 있으면 비어 있고요. 그럼 저 혼자 화장실 가서 맞아요."
지민이는 이 말을 불평이 아니라 일기예보처럼 했다.
"처음엔 누가 도와주면 좋겠다 싶었는데, 어른들이 다들 곤란해해요. 학교에서 인슐린 같은 거 바카라임지면 안 된다고. 잘못되면 누구 바카라임이냐고요. 그래서 그냥 제가 알아서 해요. 그게 제일 깔끔하더라고요."
그게 제일 깔끔하더라고요.
나는 그 문장에서 오래 멈췄다.
나도 그 문장을 안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만 시키던 시절, 내가 나에게 했던 말과 똑같은 문장이었다.
까다로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작아지는 법을 익힌 사람의 말투.
권리라는 단어
"지민아, 너 이번에 법 공포된 거 알아?"
"알아요. 뉴스에서 봤어요. 장애인이 이제 권리의 주체래요."
지민이는 그 말을 약간 흉내 내듯 말하고는 덧붙였다.
"근데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어요. 법 생겼다고 내일부터 보건 선생님이 점심마다 제 옆에 계시는 건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너무 맞아서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그날 선생님들 앞에서 하려던 발표 자료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장애학생의 건강권은 교육권과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 함께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이다.
멋진 문장이었다. 그리고 지민이는 그 문장을 십육 년째 몸으로 살고 있었다.
"지민아, 너는 학교에서 뭐가 제일 필요해?"
지민이는 생각보다 빨리 답했다.
"누가 제 혈당 바카라임지는 걸 무서워하지 않는 거요. 다들 저를 도와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잘못될까 봐 무서워서 안 도와주는 거거든요. 저는 그게 더 슬퍼요. 미워할 수도 없으니까."
탱고가 슬그머니 지민이 발치로 가 엎드렸다.
지민이가 탱고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얘는 바카라임지는 거 안 무서워하나 봐요."
나는 웃지 못했다.
발표 자료를 덮으며
연수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들이 시청각실에 모였고, 나는 단상 앞에 섰다.
준비해 온 발표 자료가 노트북에 그대로 있었다. 법의 제정 배경, 조문 해설, 학교의 과제. 사십 분 분량.
나는 그 자료를 열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시작했다.
"오늘 저는 이 법이 무엇인지 설명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전에, 이 법이 말하려던 걸 저보다 훨씬 잘 아는 학생을 만났습니다."
나는 지민이의 이야기를 했다. 이름은 빼고, 점심마다 삼 층을 오르내리는 한 학생의 이야기를.
혈당을 바카라임지는 걸 무서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 학생이 학교에 바라는 전부라는 것.
"법은 오늘 우리에게 권리의 주체라는 단어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진짜가 되는 건 관보가 아니라 여기, 이 학교의 점심시간입니다. 보건실이 비어 있을 때 누가 그 아이 곁에 있는가. 그 질문에 학교가 답하지 못하면, 이 법은 그 아이에게 그냥 뉴스일 뿐입니다."
박선우 선생님이 맨 앞줄에서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들었다. 박 선생님은 이 년째 교육청에 지민이 건강 지원 인력을 요청해 왔지만, 번번이 바카라임 소재 문제로 막혀 왔다고.
오늘 박 선생님이 나를 부른 건, 어쩌면 새 법이라는 이름의 지렛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지렛대가 되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날 내가 한 건 지민이의 말을 옮긴 것뿐이었다.
제목: 권리의 아키텍처, 혹은 법과 복도 사이의 거리.
법은 설계도다.
설계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만으로는 비를 막아 주지 못한다.
누군가 그 도면을 들고 현장에 서서,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어야 비로소 집이 된다.
장애인권리보장법은 십구 년 만에 나온 훌륭한 설계도다.
장애인을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 적어 넣은, 우리 슬롯의 기준을 바꿀 도면이다.
하지만 도면은 관보에 실리고, 권리는 복도에서 산다.
지민이의 권리는 조문 몇 항이 아니라, 점심시간 보건실이 비어 있을 때 누가 그 아이 곁에 서느냐에 달려 있다.
장애학생의 건강권은 교육권과 분리된 문제가 아니다.
건강이 보장되지 않으면 학습도 보장되지 않는다.
삼 층까지 오르내리느라, 혹은 화장실에서 혼자 주사를 놓느라 쓰는 그 시간과 마음은, 고스란히 수업에서 빠져나가는 시간이고 마음이다.
건강권은 곧 학습권이고, 학습권은 곧 그 아이가 교실에서 동등한 한 명의 학생으로 존재할 권리다.
결론: 권리는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건축되는 것이다.
법은 우리에게 도면을 주었다. 이제 벽을 세우는 일은 학교의 몫이고, 교육청의 몫이고, 우리 모두의 몫이다.
그리고 그 건축의 첫 삽은 의외로 단순한 데서 시작된다.
한 아이의 혈당을 바카라임지는 일을, 더는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그나저나 집에 돌아오니 보보가 강의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지민이 이야기를 했다.
보보는 한참 듣더니 말했다.
그 학생, 나중에 좋은 연구자 되겠다.
탱고는 그날따라 내 옆에 유난히 바짝 붙어 잤다.
누가 곁을 지키는 일이 뭔지, 저 녀석은 진작에 아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