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철학

감이 떨어지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by김경훈

경북대 정문 앞에는 감나무가 있다.


이 사실을 처음 알려준 건 보보였다. 입학한 첫 해 가을, 보보가 말했다. "자기야, 정문 앞에 감나무가 있어. 그리고 지금 홍시가 떨어지고 있어." 나는 잠깐 그 문장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대학교 정문 앞에 감나무가 있고, 홍시가 떨어지고 있다는 게. 국립대학교 정문 앞 풍경치고는 꽤 기이하다. 아무도 따가지 않은 홍시가 익어서 떨어지고, 밟으면 미끄럽다. 나는 탱고와 함께 그 길을 조심조심 걷는다. 탱고도 이 구간에서 속도를 줄인다. 훈련으로 배운 건지 경험으로 배운 건지는 모르겠다.


가을 캠퍼스에서 나는 생각한다.


성장이 멈추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날은 목요일 오후였다.


연구실에서 나오자 공기가 달랐다. 가을 공기는 여름 공기보다 정보가 많다. 낙엽 냄새, 건조한 흙 냄새, 어딘가에서 나는 군밤 냄새. 탱고가 코를 들었다. 이 공기를 탱고도 좋아한다는 걸 나는 안다.


보보한테 카톡을 보냈다.


경훈: 자기야 오늘 백양로 산바카라하고 가자

보보: 오 좋아 첨성카페테리아 앞에서 봐

경훈: 오늘 뭔가 생각 정리하고 싶어서

보보: 논문?

경훈: 논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보보: 가는 중


첨성카페테리아와 슬롯과학대학이 마주하는 그 자리. 우리의 고정 만남의 장소다. 보보가 오는 동안 탱고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공기를 맡았다. 탱고는 이 장소에서 기다리는 걸 좋아한다. 오가는 사람들의 냄새가 다양해서 그런 것 같다.


보보가 왔다.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나는 보보가 머플러를 두르고 있다는 걸 볼 수 없지만, 목소리가 조금 아늑하게 들리는 걸로 안다. 머플러를 두르면 보보 목소리가 달라진다. 이 사실을 보보는 모른다.


"백양로 가자."



백양로는 경북대 캠퍼스 안 산바카라길이다.


오래된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서 하늘을 덮는다. 여름엔 터널이 되고, 가을엔 낙엽이 쏟아진다. 약 이백이십 미터. 짧지 않고 길지도 않다. 천천히 걷기에 딱 맞는 길이다.


낙엽 밟히는 소리가 좋다.


나는 이 소리를 좋아한다는 걸 오래 살면서 알게 됐다. 바스락, 사각, 때로는 푹 꺼지는 소리. 낙엽의 두께와 습도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 오늘은 건조하게 바스락거렸다. 선명한 가을 소리였다.


탱고는 낙엽 위를 걸을 때 신중해진다. 발밑 정보가 달라지는 걸 감지하는 거다. 이게 탱고가 좋은 안내견인 이유 중 하나다. 예측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 조심한다.


"자기야," 보보가 말했다. "뭐 생각하고 있어?"


"성장."


"논문 주제?"


"오늘 보이스오버가 읽어준 건데, 성장하는 슬롯가 건전한 슬롯라는 옛날 경제학자들 얘기가 나왔어. 근데 그게 틀렸다는 거야. 계속 팽창하는 게 아니라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거."


보보가 잠깐 걸음 속도를 늦췄다.


"그게 왜 생각 정리가 필요해?"


"나한테 직접 닿는 얘기 같아서."



보보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건 기다리는 조용함이다. 보보는 내가 말하려는 게 있을 때 기다릴 줄 안다. 철학하는 사람의 습관인지 아니면 보보 본인의 습관인지, 어쨌든 나는 이게 좋다.


"나 요즘 자꾸 더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어."


"논문?"


"논문, 강의, 학회, 프로젝트. 뭔가 계속 쌓아야 할 것 같고, 멈추면 뒤처지는 것 같고. 장애 연구자로서 더 많이 증명해야 한다는 느낌도 있고."


보보가 조용히 들었다.


"근데 오늘 이 문장이 계속 머릿속에 있어. 팽창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우리를 압도하기 전에 그것을 중단시켜야 할 때가 왔다. 이게 국가 경제 얘기인데, 나 얘기 같아."


"자기가 팽창 중이야?"


"팽창하려고 과도하게 노력 중인 것 같아."


낙엽 밟히는 소리가 잠깐 이어졌다.


탱고가 속도를 살짝 줄였다. 내 걸음이 느려지는 걸 감지한 거다.



백양로 끝에 벤치가 있다.


우리는 거기 앉았다. 플라타너스 낙엽이 가끔 바람에 흘러내렸다. 탱고가 벤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는 탱고도 긴장을 푼다.


"노자 생각났어." 보보가 말했다.


칸트도 푸코도 뒤르켐도 아닌 이름이 나왔다. 보보의 철학 창고는 항상 예상보다 넓다는 걸 매번 새로 배운다.


"도덕경에 무위자연이라는 개념이 있잖아.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거. 계속 무언가를 쌓으려 하는 게 오히려 흐름을 거스르는 거일 수 있어."


"근데 아무것도 안 하면 뒤처지잖아."


"무위가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아니야. 자기 속도에 맞게, 자기 흐름대로 하는 거야. 억지로 팽창하려는 힘을 빼는 거지."


나는 플라타너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그러나 이 나무들이 거기 있다는 걸 안다. 냄새로, 소리로, 공기의 질감으로.


"이 나무들 있잖아," 내가 말했다. "플라타너스. 매년 커?"


"어느 시점부터는 크게 크지 않는 것 같은데."


"근데 죽지도 않잖아."


"응."


"성장을 멈춘 게 실패가 아니라는 거네."


보보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균형 상태에 도달한 거야." 보보가 말했다. "자기 크기가 됐을 때 더 이상 무리하게 커지려 하지 않는 거. 그게 건강한 거야."



그때 옆 벤치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이 든 목소리였다. 나무 쪽으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교수님이세요?" 보보가 먼저 물었다.


"아, 예. 저 농대 정년퇴임했어요. 근데 매년 가을이면 여기 와요. 이 나무들 보러."


나이는 일흔쯤 되는 목소리였다. 말이 느리고 조용했다. 자기 속도가 있는 사람 특유의 느린 말이었다.


"이 플라타너스들 오래됐나요?" 내가 물었다.


"제가 여기 부임하던 해에 이미 이랬어요. 40년 전에. 그때도 이 크기였고, 지금도 이 크기예요."


"40년 동안 안 컸어요?"


"컸죠, 조금씩. 근데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커요. 속으로 커요. 나이테가 쌓이는 거죠. 겉으로는 그대로인 것 같아도."


나는 이 말을 들으며 잠깐 멈췄다.


보보도 멈춘 것 같았다. 낙엽 소리가 없어졌다.


"속으로 큰다." 내가 말했다.


"그게 나무가 성숙한 거예요."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다 자란 나무는 더 이상 하늘을 향해 무리하게 뻗지 않아요. 그 대신 뿌리가 깊어지고, 줄기가 단단해지고, 해마다 작은 나이테가 하나씩 쌓이는 거예요."


"겉으로는 안 자라는 것처럼 보여도요." 보보가 말했다.


"그래요. 그게 성숙이에요. 성장이 멈춘 게 아니라 성장의 방향이 바뀐 거죠."



탱고가 교수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이 탱고를 발견하셨다.


"안내견이네요."


"네."


"만져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교수님이 탱고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셨다. 천천히. 나무를 다루는 사람의 손길이었다.


"저도 저 나무들한테 매년 뭔가 배워요."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뭘요?"


"서두르지 말라는 거요. 나무는 절대 서두르지 않아요. 제 속도가 있고, 제 때가 있어요. 봄에 잎이 나고, 가을에 지고, 겨울에 기다리고. 그 순서를 어기지 않아요."


"근데 인간은 순서를 어기려 하죠." 내가 말했다.


"그래서 자꾸 다치는 거예요." 교수님이 조용히 웃으셨다.



교수님이 가시고 나서 보보가 말했다.


"자기야, 교수님 말이랑 오늘 자기가 읽은 거랑 같은 얘기야."


"응."


"힘의 균형. 조화. 나무가 그걸 살고 있는 거네."


나는 잠깐 정문 쪽을 생각했다. 거기 감나무가 있다. 지금쯤 홍시 몇 개가 더 떨어졌을 거다.


"감나무 있잖아." 내가 말했다.


"응, 정문 앞에."


"감이 떨어지는 거, 실패가 아니잖아."


"당연하지. 다 익은 거잖아."


"근데 사람들은 논문이 반려되거나 프로젝트가 안 되거나 하면 떨어진 것처럼 생각하잖아. 근데 어쩌면 그게 다 익어서 제 속도로 내려온 거일 수도 있어."


"아니면 아직 때가 아닌 것들은 그냥 나무에 붙어있는 거고."


나는 잠깐 그 말을 받아들였다.


아직 때가 아닌 것들은 붙어있는 거고, 다 된 것들은 떨어지는 거다. 억지로 떨어뜨리려 하거나 억지로 붙잡으려 하면 다 망가진다.


"자기야," 보보가 말했다. "자기 연구 잘 되고 있어."


"근거 있어?"


"나이테 쌓이고 있잖아. 겉으로는 안 보여도."



정문 앞을 지나쳤다.


탱고가 속도를 줄였다. 홍시 구간이었다. 발밑에서 물컹한 것들이 느껴졌다. 다 익어서 떨어진 것들. 나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탱고가 더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보보가 말했다.


"자기야, 홍시 세 개 떨어져있어."


"오늘 몇 개야."


"어제보다 많은 것 같아."


"날이 추워지면 더 많이 떨어지겠지."


"응. 다들 때가 있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늘 탱고는 많이 걸었다. 백양로 낙엽 위를, 정문 홍시 구간을,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탱고는 서두르지 않는다. 제 속도가 있다.


나이테가 쌓이는 방식으로.


집에 와서 설거지를 했다. 뜨거운 물에 거품이 올라왔다. 거품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헹궜다. 이것도 속도가 있다. 서두르면 거품이 남는다.


성장에도 속도가 있다.


겉으로는 멈춘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 나이테가 쌓이는 속도.



[비하인드 스토리]


안녕하세오. 탱고예오.

오늘 백양로를 걸었어오. 낙엽이 많았어오. 저는 낙엽 위를 걸을 때 신중해져오. 발밑이 달라지니까요. 이게 훈련인지 본능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오. 그냥 그렇게 됐어오.

오늘 형이 성장에 대해 이야기했어오. 멈추는 게 실패가 아니라는 거였어오. 저는 이 이야기에 공감해오. 저도 매일 조금씩 성장하지만 겉으로는 티가 안 나오. 그러나 저는 알아오. 오늘도 나이테 하나 쌓았어오.

정문 앞 홍시 구간은 항상 조심해오. 물컹하고 미끄러워오. 형이 밟으면 안 되니까 제가 미리 속도를 줄여오. 이게 저의 나이테예오. 매년 가을마다 쌓이는.

P.S. 교수님이 저를 쓰다듬을 때 손이 따뜻했어오. 나무를 오래 만진 사람의 손 같았어오. 좋았어오. 저도 나무처럼 제 속도로 크고 있어오. 논문 기여도 재요청은 이번엔 잠시 쉬겠어오. 저도 무위자연이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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