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고약한 것에 끌리는가
살다 보면 처음엔 거부감이 들었던 것에 점점 빠져드는 경험을 한다.
처음 현장에 들어갈 때가 그렇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맥락들. 인터뷰 첫 회기엔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고, 솔직히 좀 도망가고 싶다. 그런데 세 번, 네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공간이 익숙해지고, 처음엔 소음처럼 들리던 것들이 데이터로 들리기 시작한다. 질적연구자들은 이걸 '라포(rapport) 형성'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더 솔직한 표현은 따로 있다. 익숙해진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치즈다. 정확히는 고린내 치즈다. 냄새만으로 사람을 물러서게 만드는, 그러나 한번 맛을 들이면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그 치즈. 이 글을 쓰는 사람은 그 맛에 완전히 함락된 쪽이다. 2009년,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의 일이다.
시애틀은 내가 처음 발을 디딘 미국 도시였다. 모든 게 낯설었다. 공기도, 소리도, 사람들이 말하는 속도도. 그 낯선 도시의 어느 식당에서 블루치즈 샐러드를 처음 먹었다. 메뉴를 고를 때 블루치즈가 뭔지 정확히 알고 시킨 건 아니었다. 그냥 이름이 예뻐서 시켰다. 그리고 한 입 먹는 순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고약했다. 근데 멈출 수가 없었다. 자극적인 냄새와 짭조름하고 진한 맛이 혀를 완전히 장악했다. 샐러드를 먹는 건지 치즈를 먹는 건지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접시가 비어가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그 뒤로 나는 블루치즈 앞에서 자제심을 잃는 사람이 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단순히 치즈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처음 맡았을 때의 그 낯설고 강렬한 자극이, 결국엔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혐오와 매혹이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걸, 나는 시애틀의 어느 식당에서 배웠다.
고린내 치즈의 냄새는 공식적으로 이렇게 묘사된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발." 이게 비유가 아니라 실제 과학적 설명이다. 브레비박테리움 리넨스라는 박테리아가 치즈 껍질을 선명한 주황색으로 물들이고 그 특유의 냄새를 만들어내는데, 이 박테리아는 인간의 발가락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치즈를 먹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이쯤에서 한 번 음미해보자. 아니, 음미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고린내 치즈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푸른곰팡이 치즈다. 로크포르나 스틸톤 같은 블루치즈가 여기에 속한다. 우유에 페니실리움 로크포르티라는 곰팡이균을 주입하고, 치즈 내부에 공기가 통하도록 구멍을 뚫는다. 곰팡이 포자가 피어나면서 그 특징적인 푸른색 무늬를 만들고, 치즈 안쪽을 부드럽게 하는 동시에 진한 암모니아 냄새를 풍긴다. 내가 시애틀에서 처음 맞닥뜨린 것이 바로 이 종류다. 그 냄새를 처음 맡은 순간은 솔직히 잠깐 당황스러웠지만, 입에 넣는 것을 막진 못했다.
두 번째는 흰 곰팡이 치즈다. 카망베르처럼 겉에 흰 가루가 피어나는 종류다. 페니실리움 카멘베르티 곰팡이균이 겉껍질을 푸석푸석하게 만들고, 치즈를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서서히 변화시킨다. 냄새는 고약하지만 맛은 버터처럼 부드럽다. 처음 만나면 경계하게 되고, 두 번째 만나면 경계가 풀리고, 세 번째 만나면 찾게 된다. 질적연구의 현장 조사와 타임라인이 묘하게 일치한다.
세 번째이자 가장 강렬한 것은 껍질을 씻어낸 치즈다. 에프와스, 라미 뒤 샹베르탱, 림버거, 스팅킹 비숍.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이 치즈들은 숙성 전에 소금물이나 술로 껍질을 세척한다. 에프와스와 라미 뒤 샹베르탱은 부르고뉴산 브랜디로, 림버거는 맥주로, 스팅킹 비숍은 배로 빚은 술로 씻는다. 이 세척 과정이 박테리아 성장을 촉진해 선명한 주황색 껍질과 독특한 냄새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치즈의 속은 나무 그릇에서 푸딩처럼 떠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진다. 냄새로 짐작한 것과 정반대의 질감이다.
치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이해하려면 우유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유에 단백질을 응고시키는 효소 레닛을 첨가하면 지방도 고체화되며 분리된다. 여기에 종균 배양을 더해 발효시키고, 응유에서 수분을 분리한다. 마지막으로 그 고체를 일정한 환경에서 숙성시킨다. 치즈의 다양성은 이 과정의 어느 지점을 어떻게 변형하느냐로 결정된다. 어떤 우유를 쓰는지, 발효를 언제 시작하고 끝내는지, 응유를 언제 분리하는지, 숙성 전에 어떤 처리를 하는지.
치즈 장인의 역할이 흥미롭다. 그는 직접 개입하기보다 자연의 과정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아주 가끔씩만 참견한다. 질적연구자가 현장에서 하는 일과 비슷하다. 분석하고 조작하기보다 관찰하고, 때가 됐을 때 조심스럽게 개입한다. 치즈도 논문도 결국 시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고린내 치즈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길다.
고대 수메르-아카드 문명에서는 치즈를 가리키는 단어가 따로 있었는데, 고린내 나는 치즈를 뜻하는 단어는 또 별도로 있었다. '나가후.' 그리고 이 단어는 누군가를 향한 점잖은 욕설로도 쓰였다. 수천 년 전 사람들도 이 냄새를 욕에 비유할 만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이것을 먹어왔고, 오랫동안 이것을 욕으로도 써왔다. 사랑과 욕이 한 단어에서 나온다는 것, 어딘가 낭만적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샤를마뉴 황제가 금요일에 가톨릭 주교를 방문했다. 육식을 금하는 날이었으므로 주교는 최고의 치즈를 내놓았는데, 낯설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푸른 줄무늬는 제거하고 황제에게 권했다. 황제는 처음엔 주교가 권하는 대로 조심스럽게 먹다가 점점 빠져들었고, 결국 자신의 궁으로 정기 배송까지 주문했다. 천하를 호령한 황제도 블루치즈 앞에서는 똑같이 함락됐다. 나는 이 에피소드에서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18세기 작가 대니얼 디포는 진드기와 구더기가 잔뜩 붙어 있어 숟가락으로 함께 떠먹어야 하는 스틸톤 치즈를 왕성하게 먹어댔다고 전해진다. 이 사람이 로빈슨 크루소를 쓴 사람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납득이 된다. 무엇이든 일단 먹어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좋은 연구자의 조건과도 겹친다.
구더기 치즈 얘기도 빠뜨리면 섭섭하다. 사르디니아의 전통 치즈 카수 마르주는 치즈 안에 파리를 넣어 알을 낳게 하고, 그 유충이 치즈 속 지방을 먹으며 발효를 촉진해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치즈를 만든다. 이 치즈를 종이봉투에 넣어 보관하면 산소가 부족해진 구더기들이 탈출하려고 봉투에 몸을 던진다. 그 소리가 멈추면, 즉 구더기가 모두 질식사하면, 그때가 먹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고 한다. 이 치즈를 먹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아마도 꽤 다른 종류의 인생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고약한 냄새 앞에서 주춤하는가.
2017년 이그노벨상을 받은 연구가 있다. 프랑스인 참가자들을 치즈 애호가와 치즈 혐오자로 나눠 fMRI로 뇌를 스캔하면서 치즈를 먹게 한 실험이다. 결과가 흥미롭다. 치즈 혐오자의 뇌에서는 음식 인지와 관련된 보상센터가 재빨리 닫히면서 치즈를 음식으로 인식하기를 거부했다. 자의식과 관련된 뇌섬엽도 가세했다. 고린내 나는 것을 게걸스레 먹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내며 혐오감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뇌섬엽은 꽤 나쁜 친구다. 정작 먹지도 않았는데 창피함을 먼저 공급한다.
질적연구자 입장에서 이 결과를 보면 익숙한 메커니즘이다. 우리가 낯선 현장에 처음 들어갈 때 느끼는 불편함도 구조적으로 같다. 뇌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일단 위험 신호로 처리한다. 냄새가 고약하면 부패한 것일 수 있고, 맥락이 낯설면 위험할 수 있다. 빠르고 단순한 판단이다. 생존에는 유리하지만, 이해에는 불리하다.
문제는 이 판단이 항상 맞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고린내 치즈의 냄새는 부패가 아니라 발효의 신호다. 같은 미생물이 작동하지만 방향이 다르다. 위험한 것과 복잡한 것을 혼동하는 것, 이것이 뇌섬엽의 한계다. 그리고 이 한계는 치즈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낯선 사람, 낯선 문화, 낯선 데이터 앞에서도 뇌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후각이 유독 이런 경향이 강한 건 진화적 이유가 있다. 냄새는 잠재적 위험을 감지하기 위한 감각이고, 그래서 판단이 빠르다. 생각보다 먼저 반응한다. 고린내 치즈 냄새를 처음 맡으면 뇌는 즉각적으로 경고를 보낸다. 이거 너무 오래된 거 아냐? 박테리아 너무 많은 거 아냐? 이걸 먹어서 좋을 게 뭐야? 혐오감은 미생물처럼 빠르게, 보이지 않으면서 마음속을 휘젓는다. 합리적 판단이 끼어들기도 전에 이미 결론이 나 있다.
탱고도 처음 블루치즈 냄새를 맡았을 때 고개를 돌렸다. 탱고의 뇌섬엽도 나름 열심히 작동한 것이다. 하지만 탱고는 그 판단이 옳았다. 개한테는 진짜로 위험한 경우가 많으니까. 인간과 개의 차이는 결국, 인간은 가끔 뇌섬엽을 무시하고 한 입 먹어볼 용기가 있다는 거다.
치즈는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주변의 모든 것을 흡수한다. 소가 먹은 풀, 숙성 동굴의 공기, 껍질을 씻어낸 술의 향. 한 조각의 치즈 안에는 그 치즈가 존재해온 시간과 장소가 통째로 들어 있다. 이걸 질적연구 용어로 바꾸면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이 된다. 표면만 보지 않고, 그것이 형성되어온 맥락 전체를 읽어내는 것. 치즈 한 조각이 사실은 상당히 두터운 기술의 산물이다.
치즈를 입에 넣었을 때의 경험이 그 두터움을 드러낸다. 처음엔 발 냄새 같은 충격이 오고, 그 다음엔 스르르 녹으며 전혀 다른 풍미가 펼쳐진다. 마늘, 달걀, 버터, 그리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무언가. 냄새로는 절대 예측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코로 직접 맡을 때와 입 안에서 느껴지는 역류성 비강 후각이 전혀 다른 정보를 전달한다. 같은 치즈를 두 가지 방식으로 경험하면, 이것이 정말 같은 치즈인가 싶을 정도다.
2009년 시애틀에서 처음 블루치즈 샐러드를 먹었을 때도 그랬다. 포크를 들기 전에는 잠깐 망설였다. 낯선 냄새가 먼저 왔으니까. 그런데 한 입 먹는 순간 그 망설임은 완전히 사라졌다. 짭조름하고 진하고, 샐러드의 신선한 채소와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균형이 예상 밖이었다. 접시가 비어갈수록 확신이 커졌다. 이건 좋은 거다. 뇌섬엽을 무시하길 잘했다.
결국 혐오는 정보의 부재에서 온다. 익숙하지 않은 것, 설명되지 않는 것, 맥락을 모르는 것 앞에서 뇌는 일단 문을 닫는다. 그 문을 여는 것이 경험이고, 반복이고, 때로는 그냥 일단 먹어보는 용기다. 샤를마뉴 황제도, 대니얼 디포도, 시애틀의 식당에서 블루치즈 샐러드를 시킨 나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그 문을 열었다.
질적연구자가 현장에서 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처음엔 낯설고 불편한 것들을 반복해서 마주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데이터가 되고, 의미가 되고, 이해가 된다. 처음의 혐오감이 나중엔 가장 풍부한 분석의 출발점이 된다. 가장 불편했던 인터뷰가 가장 중요한 챕터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고린내 치즈가 그렇다. 처음 냄새를 맡았을 때 물러서게 만드는 바로 그것이, 나중엔 가장 복잡하고 풍부한 맛의 원천이 된다. 혐오는 낯섦의 다른 이름이고, 낯섦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어쩌면 혐오는 관심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블루치즈 앞에서 그 사실을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