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미학

우리는 왜 울고 싶어서 돈을 내는가

by김경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제일 늦게 아는 경우가 있다.


인터뷰 현장에서 참여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목이 메는 순간이 있다. 직업적으로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는 건데, 몸은 다른 반응을 한다. 현상학에서는 이걸 두고 신체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의식이 판단을 내리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연구자가 현장에서 감정을 느끼는 건 방법론적 오염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한 신호다. 문제는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슬픔을 피하고 싶어 한다고 말하면서, 돈을 내고 슬픈 음악을 듣고, 비극적인 영화 앞에 줄을 선다. 이 모순, 생각보다 오래된 질문이다.



도쿄대학교 오카노야 교수는 슬픈 음악을 들으면 쾌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연구로 증명했다. 지식과 감정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머리로는 슬픈 노래인 줄 알면서, 몸은 쾌감을 느낀다. 미국 볼링그린 주립대학교의 팽크세프 교수 연구팀은 한발 더 나아갔다. 슬픈 음악이 유발하는 쾌감은 신나는 음악보다 효율적이며, 그 강도가 오르가슴에 가깝다고 했다. 이 연구 결과를 처음 접했을 때 잠깐 멍했다. 라 보엠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행위의 신경생물학적 정체가 그것이라는 게. 푸치니가 알았다면 꽤 만족스러워했을 것 같다.


슬픈 음악이 쾌감을 주는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설명을 내놓았다.


첫 번째는 공명이다. 슬픈 음악을 통해 작곡가, 가수, 그리고 같은 감정을 느끼는 다른 청중들과 마음이 연결된다. 희로애락을 타인과 나누는 감정 교류는 인간 슬롯에서 필수적인데, 음악이 그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 혼자 울고 있지만, 사실 함께 울고 있는 것이다. 현상학적으로 보면 이건 상호주관성의 문제다. 나의 경험이 타인의 경험과 구조적으로 연결될 때, 고립감이 사라지고 존재가 확인된다.


두 번째는 자기 확인이다.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레빈슨 교수의 설명인데, 슬픈 음악에 동정할 수 있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라는 것이다. 가족의 장례식이 매일 있지는 않다. 대부분의 날은 담담하게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내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인지 의심스러워진다. 슬픈 음악 앞에서 눈물이 나면, 아직 살아있다는 확인이 된다. 감정 배터리 잔량 체크다.


세 번째가 가장 불편하고, 가장 흥미롭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즉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쾌감이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타루피 교수 연구팀이 772명에게 슬픈 음악을 듣는 심리를 물었다. 가장 많이 나온 답은 노스탤지어였다. 과거의 유사한 경험을 추억하고 우수에 잠긴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예상 가능하다. 그런데 연구팀은 그 추억의 이면을 더 팠다. 거기서 흥미로운 심리가 나왔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가공의 매체이며, 현실의 나와는 무관하다는 강한 인식. 쉽게 말하면, 어차피 남의 일이라는 안도감이었다.


이게 쾌감의 실체였다.


라 보엠의 마지막 장에서 연인이 죽어가는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관객은, 사실 동시에 안도하고 있다. 저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지금 여기 살아있다. 극장 밖으로 나가면 나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슬픔을 느끼면서 동시에 살아남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구조, 처음 알았을 때 좀 민망했다. 내가 감동받았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들의 일부가 사실 이런 메커니즘이었다는 게.


현상학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직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가 드러난다고 했다. 존재는 유한성을 인식할 때 깨어난다. 슬픈 음악이나 비극은 죽음과 상실을 안전한 거리에서 경험하게 해주는 장치일 수 있다. 실제로 죽음을 겪지 않고도 그 감각을 통과함으로써, 지금 여기 살아있는 것의 감각이 선명해진다. 입장료를 내고 유한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꽤 합리적인 거래다.



그렇다고 우리가 비열한 존재냐, 꼭 그렇지는 않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동료를 밟고 올라서서라도 내 유전자를 남기려는 자기 보존 본능이 있다. 타인의 불행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도 이 본능의 연장선에 있다. 그런데 이 본능이 슬픈 음악을 매개로 할 때는 실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가공의 불행 앞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그 감정으로 공동체와 연결되고, 자신의 감수성을 확인한다. 진화적으로 꽤 영리한 해결바카라이다. 직접 해치지 않고도 그 쾌감을 취하면서, 동시에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슬롯적 지위까지 얻는다. 오페라 관람은 사실 상당히 효율적인 생존 전략이었던 셈이다.


정보 리터러시 관점에서 보면 이 현상이 다르게 읽힌다. 우리는 정보를 처리할 때 늘 의식 수준과 무의식 수준이 동시에 작동한다. 슬픈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 하나에도, 공명, 자기 확인, 안도감, 진화적 쾌감이 층층이 깔려 있다. 어떤 정보를 접할 때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를 안다는 것, 그리고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단순한 감상을 넘어서는 일이다. 현상학이 경험의 구조를 묻는 이유가 여기 있다. 겉으로 드러난 반응 아래 무엇이 작동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



탱고는 슬픈 음악을 들으면 가끔 귀를 쫑긋 세운다. 특정 주파수의 음악에 반응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할 때 그걸 감지하는 건지는 모른다. 어느 쪽이든, 탱고는 내가 음악 앞에서 뭔가를 느끼고 있다는 걸 나보다 먼저 알아채는 것 같다. 신체가 이미 알고 있다는 현상학의 주장을 탱고가 매번 입증한다.


연구자로서 나는 슬픈 음악 앞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 감동받고, 그 감동의 구조를 분석한다. 이 두 가지가 서로를 방해하느냐고 묻는다면, 생각보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왜 이 음악이 나를 건드리는지를 알수록, 그 경험이 더 두터워진다. 슬픔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슬픔을 없애지 않는다. 라 보엠의 마지막 장은 그 구조를 다 알고도 여전히 울컥하게 만든다.


어차피 남의 일인 줄 알면서도, 그래서 더 마음껏 슬퍼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예술이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 라 보엠을 들을 예정이다. 학문적으로 완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마지막 장에서 어김없이 울 것이다. 탱고는 귀를 세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게 어차피 남의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주인공의 슬픔 안으로 기꺼이 들어갈 것이다.


그것이 슬픔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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