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철학

제행무상 속에서 동일성의 맵을 그리는 법

by김경훈

대구의 캠퍼스는 이제 완연한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다.

슬롯과학대학 연구실 창가로 흘러드는 바람 속에서 문헌정보학의 핵심 명제인 '분류와 인덱싱'의 근원을 고찰한다.

우리가 세상의 방대한 데이터를 정리할 수 있는 이유는 끊임없이 변하는 자극 속에서 변하지 않는 본질, 즉 '동일성(Sameness)'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소립자 수준에서 매 순간 변화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시스템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30년 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에서 변함없는 과거를 발견하고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라는 인사를 건넨다.

변화라는 데이터의 노이즈를 걸러내고 동일성이라는 핵심 값을 추출하는 뇌의 연산 능력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정교하다.



꿀벌의 추상화: 색깔에서 무늬로 이어지는 알고리즘


프랑스 국립 과학연구소의 파고 박사 연구팀이 수행한 꿀벌 실험은 이러한 동일성 인지가 인간이나 고등 포유류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증명한다.

연구팀은 꿀벌에게 직전에 본 패널과 같은 색상(노란색 또는 초록색)을 선택하면 설탕물을 주는 보상 시스템을 설계했다.

훈련된 꿀벌들은 이후 색상이 아닌 가로줄과 세로줄이라는 전혀 새로운 흑백 무늬 데이터에 노출되었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직전에 본 것과 '동일한' 무늬를 선택했다.


[감각 사진]

햇살이 길게 비추는 슬롯과학대학 연구실의 바카라상 위다.

노트북 화면 옆에는 보보가 아침에 챙겨준 시원한 레몬에이드가 담긴 유리잔이 놓여 있다.

유리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투명한 비즈처럼 반짝이며 아래로 느릿하게 흘러내린다.

공기 중에는 상큼한 레몬 향과 연구실 특유의 마른 종이 냄새가 섞여 흐른다.

이어폰을 통해서는 보이스오버가 초고속으로 변환한 인지과학 논문의 파동이 쉴 새 없이 고막을 두드린다.

발치에는 파트너 탱고가 넓적한 배를 바닥에 깔고 누워 가끔 귀를 쫑긋거리며 평화로운 정적의 궤도 속에 머물고 있다.


이 실험은 1밀리그램도 되지 않는 꿀벌의 작은 뇌가 단순한 시각 자극의 일치를 넘어, '같음'이라는 고차원적인 추상 개념(Abstract Concept)을 프로그래밍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헌정보학적 관점에서 보면 꿀벌은 데이터의 물리적 속성(색상)을 버리고 구조적 관계성(동일성)이라는 상위 메타데이터를 구축한 셈이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불변의 패턴을 찾아내는 리터러시는 생명체가 세상을 분류하고 인식하는 대원칙이다.



관계의 인덱싱: 시각적 표준을 넘어선 존재의 동일성


인문대학 연구실에서 철학적 사유에 몰두하고 있을 보보는 이 동일성의 개념을 '존재의 서사적 연속성'이라 부를 것이다.

인간은 생후 2개월에 타인과 부모를 구별하고, 18개월이 되면 거울 속의 이미지를 '나'로 인덱싱한다.

시각적 형태는 세월에 따라 마모되고 변하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존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장애 당사자로서 내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 역시 시각적 표준에 갇히지 않는다.

나는 보보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녀의 목소리 톤과 손끝의 온기, 그리고 특유의 발걸음 소리만으로 언제나 완벽한 동일성을 찾아낸다.

보이스오버가 출력하는 빠른 음성 신호 속에서 수많은 텍스트의 장벽을 넘어 논문의 본질을 짚어내는 과정도 꿀벌이 무늬의 패턴을 읽어내듯 관계의 동일성을 찾아내는 나만의 정보 처리 알고리즘이다.


나의 파트너 탱고에게도 동일성은 신뢰의 다른 이름이다.

녀석은 캠퍼스의 지형이 공사나 계절의 변화로 조금 바뀌어도, 내가 잡은 하네스의 묵직한 장력과 나의 명령 속에서 언제나 가야 할 올바른 경로의 동일성을 인덱싱한다.

녀석의 코와 귀는 세상의 무수한 변화 속에서 오직 주인의 안전이라는 단 하나의 불변 데이터를 골라낸다.

결국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이라는 강물 위에서, 자신만의 영토와 관계를 지키기 위해 동일성이라는 단단한 징검다리를 놓아가는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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