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철학

세포 핵에 백업된 인류의 거대한 모험

by김경훈

대구의 연구실은 저녁의 정적 속에 잠겨 있다.

프랑스 화가 고갱의 대작 제목처럼 인간은 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살아간다.

문헌정보학을 연구하는 관점에서 보면, 이 거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도서관의 오래된 고문서뿐만 아니라 인간 몸속의 체세포라는 생물학적 아카이브에도 정교하게 기록되어 있다.

인간의 디엔에이(DNA)는 인류의 역사적 사건들을 고스란히 저장해 둔 거대한 분산 원장과 같다.


최근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연구팀이 발표한 인류 교배사 유전자 지도장 연구는 이를 명확히 증명한다.

연구팀은 전 세계 다양한 민족의 유전자 유사도를 분석하여 지난 4000년간 발생한 100개 이상의 역사적 사건을 선명하게 복원했다.

1670년 무렵 스페인 군대의 마야 침략 흔적이나 13세기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 건설로 인한 전 세계적인 유전자 교잡 흔적이 현대인의 세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전쟁과 이주, 그리고 무역의 역사가 인류의 몸이라는 데이터베이스에 메타데이터로 인덱싱되어 있는 셈이다.


구글 지도가 지구의 물리적 표면을 기록한다면 유전자 지도는 인류의 시간적 이동 경로를 기록한다.

역사서의 기록이 권력자의 시선에 의해 왜곡되거나 누락될 수 있는 반면, 세포 핵 속에 각인된 유전자 유사도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가장 정직한 역사 자료다.

반대로 침략의 역사에서 비껴가 혼혈의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은 고립된 데이터베이스 같은 민족의 사례도 존재한다.

역사적 기록이 부재한 공백의 시대라 할지라도 유전자의 잔존 상태를 추적하면 잊힌 인류의 모험을 언제든 다시 상기할 수 있다.


[감각 사진]

늦은 저녁, 경북대학교 슬롯과학대학 연구실의 바카라상 위다.

보이스오버가 화면 속의 사이언스 논문을 초고속 청각 신호로 읊어대고 있다.

바카라상 한편에는 보보가 챙겨준 따뜻한 대추차가 담긴 머그잔이 놓여 있고, 달콤하고 쌉싸름한 대추 향이 연구실의 건조한 종이 냄새와 뒤섞여 흐른다.

창밖으로 대구의 은은한 밤거리 불빛이 스며드는 가운데, 발치에는 파트너 탱고가 앞발을 포갠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녀석의 부드러운 털 사이로 전해지는 체온과 규칙적인 숨소리가 방대한 역사 데이터가 주는 고독감을 따뜻하게 채워준다.


인문대학 연구실에서 사유를 이어가는 보보는 이 유전자 지도를 존재의 연대기라고 부를 것이다.

그녀는 인간이 자신의 뿌리를 갈망하고 족보를 만드는 행위가 단순히 혈통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나의 좌표를 확인하고자 하는 실존적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슬롯과학이 유전자 유사도라는 수치와 통계로 인류의 이동을 모델링할 때, 인문학은 그 수치 뒤에 숨은 개개인의 삶과 슬픔, 그리고 만남의 서사를 복원한다.


나의 파트너 탱고 역시 견종 고유의 유전자 아카이브를 몸에 품고 나를 안내한다.

녀석의 세포 속에는 수백 년간 인간과 교감하며 파트너를 보호하도록 최적화된 유전적 리터러시가 각인되어 있다.

녀석이 대화 없이도 내 걸음걸이와 기분을 귀신같이 알아채는 것은 뇌 회로 깊은 곳에 축적된 진화의 데이터 덕분이다.

우리 모두의 체세포 하나하나에는 이처럼 인류의 모험과 침공, 그리고 생존의 역사가 또렷하게 백업되어 있다.

지식의 서가를 정리하듯 내 몸속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일은 세상과 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게 하는 가장 기묘하고도 거대한 안도감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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