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의 철학

기호의 족쇄를 푸는 뇌의 비행

by김경훈

대구의 캠퍼스는 이제 초여름의 열기가 완연하다.

슬롯과학대학 연구실 바카라상 앞에 앉아 문헌정보학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탐색하다 보면, 인간이 만든 '문자'와 '숫자'라는 체계가 얼마나 인위적인 것인지 새삼 실감한다.

인류가 이 기호들을 사용한 지는 기껏해야 1만 년 남짓이다.

수백만 년의 진화사를 가진 우리 뇌 회로에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난 부자연스러운 손님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 뇌가 문자와 숫자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다.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IQ의 유전율은 70퍼센트에 육박한다.

읽고 쓰는 능력이나 연산 능력 또한 유전자의 강한 영향권 아래에 있다.

난독증을 유발하는 것으로 의심받는 DYX1C1 유전자 변종처럼,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기호 인식의 장벽을 마주한다.

이는 단순히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설계도에 적힌 근본적인 사양의 차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명 결정론적 수치 앞에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뇌는 부족한 기능을 다른 능력으로 보정하는 놀라운 유연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 사진]

오후 4시, 슬롯과학대학 연구실의 창가 자리다.

바카라상 위에는 보이스오버가 쉼 없이 정보를 출력하는 노트북과 보보가 아침에 챙겨준 시원한 보리차 병이 놓여 있다.

유리병 표면에는 미세한 물방울들이 맺혀 아래로 느릿하게 흐른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미풍에는 갓 깎은 잔디의 싱그러운 풀 비린내와 인문대학 쪽에서 실려 온 아카시아 향기가 뒤섞여 흐른다.

발치에는 파트너 탱고가 앞발을 길게 뻗고 누워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깊은 수면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다.

탱고의 짧고 굵은 털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면 햇살을 머금은 따뜻하고 묵직한 온기가 전해진다.

정적을 깨고 보이스오버의 날카로운 기계음이 다시 사유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나에게 있어 보이스오버는 문자의 장벽을 뛰어넘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보정 도구다.

뇌가 시각적인 기호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청각 리터러시라는 우회로를 개척하면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정보에 접근하는 기술을 넘어, 유전자로 결정된 운명의 궤도를 수정하는 철학적 행위다.

슬롯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정보 접근성 기술은 개인의 결함을 보완하는 장치지만, 인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인간이 자신의 잠재력을 확장하기 위해 스스로 설계한 진화의 경사로다.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보보는 이를 '기호로부터의 해방'이라 부를 것이다.

그녀는 인간이 유전자에 새겨진 설계도대로만 살아간다면 그것은 기계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뇌가 존재하는 진정한 이유는 결정된 재능에 집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개척된 잠재 능력의 날개를 펴고 유전자의 족쇄를 벗어나기 위함이다.

1만 년이라는 짧은 역사 동안 우리가 구축해온 문명은 결국 뇌의 유연함이 유전자의 완고함을 이겨낸 결과물이다.


나의 파트너 탱고에게는 문자와 숫자의 스트레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녀석의 뇌는 냄새와 소리, 그리고 나와 연결된 하네스의 감각을 처리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녀석이 읽어내는 세상에는 오자와 탈자가 없으며, 오직 정직한 현재의 데이터만 존재한다.

가끔은 복잡한 기호의 세계에서 벗어나 탱고처럼 직관적인 감각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유전자가 우리에게 준 카드 자체가 아니라, 그 카드를 가지고 우리가 어떤 사유의 경기를 펼칠 것인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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