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 개의 데이터와 마들렌의 아카이브
대구 경북대학교 슬롯과학대학 연구실의 공기는 정적 속에 머물러 있다.
바카라상 위에 놓인 노트북에서는 보이스오버의 기계적인 음성이 초고속으로 논문을 읽어내려가고 있다.
문헌정보학 연구자로서 내가 다루는 정보는 주로 텍스트와 숫자로 인덱싱된 데이터들이지만, 가끔은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냄새가 그 어떤 검색 엔진보다 빠르게 과거의 특정 페이지를 펼쳐보여주곤 한다.
이것이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가 묘사한, 향기로 기억을 소환하는 '프루스트 효과'다.
흔히 인간의 후각은 개나 쥐에 비해 보잘것없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록펠러 대학교의 켈러 교수팀이 수행한 연구는 이러한 편견을 데이터로 보기 좋게 뒤집었다.
연구팀은 128가지의 냄새 분자를 조합해 인공 향을 만든 뒤, 참여자들이 얼마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해내는지 측정했다.
그 결과, 인간은 평균적으로 1조($10^{12}$) 종류 이상의 냄새를 식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백만 가지의 색채나 34만 가지의 소리를 식별하는 능력에 비하면, 후각의 해상도는 그야말로 우주적인 규모다.
[감각 사진]
일요일 오후의 나른한 연구실 풍경이다.
열린 창문 사이로 아카시아 향기가 섞인 바람이 불어와 연구실 안의 묵직한 종이 냄새를 휘젓는다.
바카라상 위에는 보보가 아침에 챙겨준 시나몬 향이 감도는 사과 파이 한 조각이 놓여 있고, 그 옆에서 피어오르는 커피의 쌉싸름한 향이 공기 중에 입체적인 층을 만든다.
보이스오버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귀에 꽂은 하얀 이어폰이 보이고, 발치에는 파트너 탱고가 앞발을 쭉 뻗고 누워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5월의 햇살 속에 머물러 있다.
햇살을 받은 탱고의 털에서는 햇볕에 잘 말린 이불 같은 고소하고 따뜻한 냄새가 피어올라 정적인 공간에 생명력을 더한다.
인간의 코에는 약 350종의 후각 수용체, 즉 안테나가 존재한다.
빛을 감지하는 안테나가 단 4종뿐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다양성이다.
비록 인간의 후각상피 면적이 개보다 좁고 유전자의 절반 이상이 퇴화했을지라도, 350개의 안테나가 만들어내는 조합의 수는 무궁무진하다.
켈러 교수의 실험에서 후각이 예민한 어떤 참여자는 무려 $10^{28}$ 종류의 향기를 구분해내기도 했다.
이는 후각이 단순히 냄새를 맡는 기능을 넘어, 세상을 초고해상도로 읽어내는 정교한 정보 수용체임을 증명한다.
연구실에서 사유에 잠겨 있을 보보는 이를 '감각의 존재론'이라 부를 것이다.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1조 개의 이름으로 존재하며 우리의 기억과 감정을 인덱싱한다.
보이스오버가 텍스트를 소리로 변환해 내 지식의 서가를 채우듯, 냄새는 보이지 않는 공기 속의 분자들을 기억의 서사로 변환한다.
장애 당사자로서 내가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이 시각에 국한되지 않는 것처럼, 후각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장 풍요롭게 채워주는 '보이지 않는 리터러시'다.
나의 파트너 탱고에게 1조 개의 냄새 식별 능력은 생존이자 사랑의 언어다.
녀석은 캠퍼스의 풀냄새 속에서 어제 지나간 길고양이의 흔적을 읽어내고, 나의 미세한 체취 변화를 통해 오늘의 컨디션을 데이터화한다.
녀석의 코가 읽어내는 세상은 아마 내가 보이스오버로 듣는 데이터의 양보다 훨씬 방대하고 정밀할 것이다.
탱고에게 이 1조 개의 데이터는 나를 안전하게 안내하기 위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지도다.
결국 인간이 1조 개의 냄새를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그만큼 더 깊고 넓게 이해할 잠재력을 가졌다는 의미다.
텍스트와 소리, 그리고 향기가 어우러진 나의 연구실에서 나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경사로를 설계한다.
켈러 교수의 실험이 보여준 그 예리한 해상도로, 우리 슬롯의 배려와 공감이 더 세밀하게 인덱싱되기를 바란다.
1조 개의 향기가 각자의 개성으로 인정받는 세상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정보철학적 완성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