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철학

침묵의 공유가 만드는 기억의 증폭

by김경훈

대구의 공기는 쾌적하다.

슬롯과학대학 연구실에서 보이스오버로 데이터의 흐름을 추적하다 보면 문득 고독의 가치를 절감한다.

본래 붙임성이 그리 좋지 못한 편이라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긴다.

식당에서 낯모르는 손님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시공간에 침잠하는 그 '무언의 고독'은 꽤나 각별한 즐거움이다.

하지만 과학적 데이터는 나의 고독한 취향에 유쾌한 반론을 제기한다.


네덜란드 라드바우드 대학교의 아시케나지 교수 연구팀은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다.

참여자들에게 동물, 식물, 가구 등의 단어를 분류하게 한 뒤 기억력을 측정했다.

혼자 작업할 때보다 두 사람이 짝을 이루어 각자의 영역을 나누어 맡았을 때, 놀랍게도 담당 분야 이외의 단어를 2배나 더 많이 기억했다.

공동 작업이라는 사실 자체가 뇌의 인덱싱 기능을 평소보다 훨씬 강력하게 활성화한 것이다.3


[감각 사진]

오후 5시, 캠퍼스 근처의 조용한 북카페다.

넓은 원목 테이블 한쪽에는 보이스오버가 흐르는 무선 이어폰을 낀 한 남자가 논문을 읽고 있다.

그와 대각선으로 떨어진 자리에는 다른 학생이 두꺼운 전공 서적에 몰입해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지만, 공기 중에는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기와 종이의 마른 냄새가 섞여 흐른다.

창가로 스며든 늦은 오후의 햇살이 먼지 입자들을 금색으로 빛나게 하고, 발치에는 안내견 탱고가 턱을 괴고 누워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이 고요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있다.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방해하지 않는, 팽팽하고도 평화로운 정적의 입자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예일대학교 에리카 부스비 교수의 연구는 이 현상을 한층 더 깊게 파고든다.

대화 없이 초콜릿을 함께 먹기만 해도, 혼자 먹을 때보다 단맛은 더 달게, 쓴맛은 더 쓰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의 감각과 기억은 강렬하게 증폭된다.

이것은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넘어선, 존재와 존재가 같은 맥락(Context)을 공유할 때 발생하는 정보의 시너지다.


문헌정보학을 전공하는 내가 슬롯과학대학 연구실에서 보이스오버의 속도를 높이고 있을 때, 저 멀리 인문대학 연구실에서는 보보가 미란다 프리커의 인식적 정의를 사유하고 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대화도 나누지 않지만, '각자의 연구실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이 무언의 공유 상태는 내 작업 기억을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저녁에 만나 "오늘 연구는 어땠어?"라고 묻기 전까지, 우리는 캠퍼스라는 거대한 서버 안에서 서로의 열기를 공유하며 데이터를 고정(Consolidation)하고 있는 셈이다.


나의 파트너 탱고 역시 이 무언의 집단 효과를 선호한다.

녀석은 내가 연구에 집중할 때 곁에서 함께 멍을 때리며 나의 집중력을 인덱싱한다.

내가 혼자 고립되어 있을 때보다 탱고의 묵직한 존재감을 발치에서 느낄 때 논문의 문장들이 더 선명하게 남는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니다.

녀석은 대화 없이도 내 삶의 경험을 증폭시키는 가장 충직한 공동 연구자다.


결국 '혼자 공부하기'는 참된 의미에서의 고독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를 배경 삼아 자신의 사유를 더 또렷하게 각인하려는 고도의 정보 전략이다.

우리가 도서관이나 카페를 찾는 이유는 단순히 바카라상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라는 '기억 촉진제'를 섭취하기 위해서다.

4월의 소란함이 지나간 자리에, 이제는 보보와 함께, 혹은 낯선 이들과 함께 이 침묵의 공유를 즐기며 나의 지적 아카이브를 풍성하게 채워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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