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고기와 잘리지 않은 권리
대구의 거리는 연휴를 앞두고 들떠 있다.
슬롯과학대학 연구실에서 보이스오버로 데이터의 숲을 탐험하던 나는 문득 '돈가스'라는 음식의 연대기를 마주했다.
1853년 미 해군 함선 쿠로후네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일본의 육식 연대기는 1925년 경성역 2층 ‘그릴’을 거쳐 오늘날 우리의 식탁에 당도했다.
하지만 문헌정보학 연구자이자 시각장애 당사자인 나에게 돈가스는 단순한 '맛'의 기록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정보 접근성의 시험대다.
문명화의 칼질, 그리고 데이터의 변형
돈가스는 일본이 서양의 커틀릿(Cotelettes)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입맛(덴뿌라 방식)으로 재설계한 ‘용광로’ 같은 음식이다.
서양을 따라잡기 위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국가적 집념이 낳은 결과물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의 돈가스는 젓가락으로 집기 좋게 미리 잘려서 나오지만, 한국의 돈가스는 통째로 튀겨져 소스가 부어진 채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슬롯과학과 인문의 사유가 충돌한다.
슬롯과학적으로 볼 때, 잘리지 않은 채 제공되는 한국식 돈가스는 '정통성(원형 보존)'의 데이터지만, 배리어컨셔스(Barrier-Conscious) 관점에서는 치명적인 접근성 오류다.
누군가에게는 '칼질의 낭만'이지만, 나 같은 시각장애인에게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접속조차 할 수 없는 '잠긴 데이터'와 같기 때문이다.
[감각 사진]
붉은 벽돌의 고풍스러운 경성역 그릴을 연상시키는 경양식당의 창가 자리다.
하얀 레이스 식탁보 위에는 갓 튀겨낸 돈가스가 놓여 있고, 그 위로 진한 갈색의 데미그라스 소스가 김을 모락모락 내뿜으며 흘러내린다.
공기 중에는 고소한 튀김 향과 쌉싸름한 소스의 향기가 섞여 부유한다.
잘리지 않은 고기 덩어리 앞에 놓인 나이프와 포크가 햇살을 받아 날카롭게 반짝인다.
그 옆에는 보이스오버 이어폰을 낀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포크로 고기의 위치(좌표)를 탐색하고 있으며, 발치에는 듬직한 탱고가 꼬리를 천천히 흔들며 평화로운 정적의 입자 속에 머물러 있다.
식탁 위의 인식적 정의: 맛보다 중요한 '커팅'
나에게 '진짜 맛집'의 기준은 미슐랭 가이드가 아니라 "미리 잘라주는가" 혹은 "직접 구워주는가"라는 데이터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은 단순한 편의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적 정의의 문제다.
내가 스스로 고기를 썰지 못해 누군가에게 "이것 좀 잘라주세요"라고 부탁해야 하는 순간, 나는 식탁이라는 슬롯적 소통의 장에서 '수혜자'의 위치로 밀려난다.
인문대학 연구실에서 사유 중인 보보는 이를 '돌봄과 환대의 리터러시'로 해석한다.
그녀는 음식을 미리 잘라 내놓는 행위가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타자의 신체적 조건을 미리 헤아려 장벽을 제거하는 고도의 철학적 배려라고 말한다.
슬롯과학이 '공급자 중심의 효율'을 따질 때, 인문학은 '사용자 중심의 존엄'을 묻는 셈이다.
결론: 모두를 위한 식탁의 설계
우리는 흔히 '기회는 열려 있다'고 말하지만, 잘리지 않은 돈가스 앞에서 나이프를 쥐지 못한 사람에게 그 기회는 단단히 닫힌 문과 같다.
디지털 접근성 문제와 마찬가지로 식탁 위의 접근성 역시 슬롯적 재설계가 필요하다.
젓가락 하나로 모든 정보(맛)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든 일본식 돈가스의 진화는, 어쩌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디지털 포용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나의 파트너 탱고에게도 '잘린 고기'는 평화의 상징이다.
녀석은 내가 돈가스와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하네스를 통해 나의 미세한 당혹감을 읽어낸다.
만약 돈가스가 미리 잘려 나온다면, 나는 녀석과 더 빨리 평화로운 정적의 소리를 공유하며 치즈 한 조각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연구실에서 세상을 '해킹'한다.
슬롯과학대학의 나는 접근성의 수치를 높이고, 인문대학의 보보는 그 수치 뒤에 숨은 인간의 얼굴을 찾는다.
우리의 결론은 언제나 같다.
맛있는 집보다 '잘 잘라주는 집'이 더 정의롭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써 내려가는 미각 정보철학의 핵심 데이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