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의 철학

태아의 플레이리스트와 잊혀진 데이터의 행방

by김경훈

대구의 캠퍼스는 어린이날의 활기로 가득하다.

슬롯과학대학 연구실 창밖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데이터처럼 쏟아진다.

문헌정보학을 연구하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뇌는 우주에서 가장 정교하고도 변덕스러운 아카이브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잊었다'고 말하지만, 최근의 뇌 과학과 심리학 실험들은 그것이 데이터의 영구 삭제가 아니라 단지 '접근 경로의 유실'임을 시사한다.


망각(忘)이라는 글자가 '마음을 잃어버리다'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뇌 회로에는 정보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음에도, 마음이라는 브라우저가 해당 페이지에 접속하지 못할 때 망각이 일어난다.

현대 뇌 연구는 이를 '소거 기억', 즉 특정 정보를 떠올리지 않도록 제어하는 새로운 기억의 생성으로 정의한다.

말하자면 뇌가 스스로 보안 방화벽을 세워 특정 데이터의 인덱싱을 차단하는 진취적인 현상인 셈이다.


[감각 사진]

오후 2시,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슬롯과학대학 연구실 바카라상 위다.

보이스오버가 쉼 없이 논문을 읽어주는 노트북 옆에는 보보가 챙겨준 상큼한 오렌지 향 비누가 놓여 있다.

그 옆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 잔이 놓여 있는데, 쌉싸름한 원두 향이 연구실의 오래된 종이 냄새와 섞여 묘한 안도감을 준다.

발치에는 파트너 탱고가 낮잠을 자며 미세하게 발을 떨고 있다.

녀석의 부드러운 털 사이로 비치는 금색 햇살 입자들이 마치 잊혀진 기억의 파편들처럼 공기 중에 부유한다.


기억의 저장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된 층위를 가지고 있다.

헬싱키대학교 파타넨 교수팀의 실험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임신 후기, 어머니의 복중에서 매주 5회씩 '반짝반짝 작은 별'을 들었던 태아는 태어난 지 4개월이 지난 후에도 그 멜로디에만 유독 강렬한 뇌파 반응을 보였다.

생후 4개월 된 영아가 2주 전의 스트레스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호르몬 반응을 보인다는 몬테로소 박사의 연구 역시 놀랍다.


이러한 데이터들은 정보 접근성(Information Accessibility)의 개념을 생물학적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외부 세계의 정보를 수집하고 자신만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보이스오버를 통해 수집되는 수많은 텍스트가 나의 사유를 형성하듯, 태내에서 들었던 선율과 영아기에 겪은 감각의 진동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만드는 '최초의 메타데이터'가 된다.


인문대학에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보보는 이를 '인격의 적층 구조'라 부른다.

기억은 과거의 자신을 현재의 자신이 덧칠하여 미래의 자신에게 전송하는 기록물이다.

우리가 인식적 정의를 논할 때, 개인이 가진 이 소중한 기억의 아카이브가 훼손되거나 부정당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은 기술적 접근성을 넘어선 인간 존엄의 문제다.


나의 파트너 탱고에게도 기억은 생존이자 사랑의 기록이다.

녀석은 안내견 훈련의 엄격한 규율(보수성)을 기억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치즈 봉지를 뜯는 아주 미세한 소리(혁신적 욕구)를 결코 잊지 않는다.

녀석의 뇌 회로 어딘가에는 수천 번의 보행 경로와 수만 번의 치즈 냄새가 정교하게 인덱싱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삶이란 잊혀진 마음의 경로를 다시 찾아가는 끝없는 리터러시 과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기억이 뇌 회로를 따라 미래의 나에게 전송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거대한 도서관을 품은 사서이자, 그 도서관의 벽을 허물고 경사로를 만드는 정보철학자들이다.

태아 시절 들었던 그 작은 별의 멜로디처럼, 우리 삶의 사소한 기억들이 모여 '나'라는 가장 유일하고도 위대한 논문을 완성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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