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의 철학

내 몸을 씻어내는 마법과 폭약의 의형제

by김경훈

대구의 공기는 샤워하기 딱 좋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샤워하는 시간을 무척 좋아한다.

아침에는 몽롱한 뇌를 깨우기 위해 물줄기를 맞고, 저녁에는 하루 일과 중 내 몸의 데이터베이스에 달라붙은 먼지와 피로를 털어내기 위해 욕실로 향한다.

예전에는 향이 강한 바디워시나 화려한 배스용품에 탐닉했다.

하지만 최근 나의 관심은 ‘비누’라는 고전적이고도 마법 같은 물건으로 옮겨갔다.


보보가 내밀어준 비누의 신세계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고대 이집트의 ‘에벨 파피루스’에 기록된 처방부터 시작된 이 유서 깊은 물건은, 보보의 손을 거쳐 몰약비누, 산양유비누, 흑설탕비누, 그리고 갖가지 상큼한 과일비누의 형태로 내 욕실 선반을 채우고 있다.

매일 기분에 따라 비누를 골라 쓰는 재미는, 2배속 스크린리더로 논문을 읽는 건조한 일상에 단비 같은 유희다.



비누와 폭약의 기묘한 의형제 관계


비누의 탄생은 꽤나 원초적이다.

옛날 사람들이 양을 구워 먹을 때 떨어진 지방분이 화톳불의 재(알칼리)와 섞이면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화학적으로 비누는 지방산과 글리세린의 사이좋은 결합을 가성소다라는 ‘가정 파괴범’이 끼어들어 깨뜨리면서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지방산은 나트륨과 손을 잡고 비누가 되며, 홀로 남겨진 글리세린은 분리된다.


재미있는 점은 이 버려지던 글리세린의 운명이다.

19세기 노벨이 이를 폭약의 원료로 사용하면서 비누와 폭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의형제 관계가 되었다.

사람의 몸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비누와, 지구와 인류를 파괴하는 폭약이 사실은 한 몸에서 나온 쌍둥이라니.

이보다 더 지독하고 완벽한 블랙코미디가 또 있을까.

내 몸을 씻어내는 이 부드러운 거품 속에 파괴의 잠재력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샤워할 때마다 묘한 철학적 긴장감을 선사한다.



기름과 물을 화해시키는 마술사의 손길


비누가 때를 빼는 원리는 문자 그대로 마법이다.

비누 분자는 기름과 친한 ‘친유원자단’과 물과 친한 ‘친수원자단’이라는 정반대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양면성 덩어리다.


1. 흡착: 비누 분자가 기름기 가득한 내 몸의 ‘때’에 친유성 다리를 착 붙인다.

2. 침투와 세분화: 때의 내부로 침투해 덩어리를 잘게 부순다.

3. 포위와 분산: 잘게 부서진 기름때를 비누 분자들이 에워싼다. 이때 안쪽은 기름과 친한 쪽이, 바깥쪽은 물과 친한 쪽이 자리를 잡는다.

4. 마법의 완성: 원래는 절대 섞일 수 없는 기름과 물이, 비누라는 중재자 덕분에 사이좋게 섞여 물줄기를 타고 하수구로 흘러 내려간다.


이것은 상식을 파괴하는 연금술이다.

섞일 수 없는 두 세계를 연결하는 비누의 능력을 보고 있으면, 나 역시 나의 연구와 일상 사이에서 이런 유연한 중재자가 되고 싶다는 상상을 하곤 한다.



탱고의 치즈와 나의 비누


내가 비누의 향기에 취해 있을 때, 나의 충직한 파트너 탱고는 욕실 밖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지난번 에세이에서 녀석이 매점 소시지를 좋아한다고 썼지만, 사실 녀석의 진짜 ‘최애’는 소시지가 아니라 고소한 치즈다.

치즈 봉지 뜯는 소리만 들리면 녀석의 귀는 테슬라 안테나처럼 쫑긋 세워진다.


우리는 서로의 취향을 존중한다.

녀석은 나의 몰약비누 향기를 묵묵히 견뎌주고, 나는 녀석의 치즈 집착을 기꺼이 수용한다.

비록 녀석의 덩치가 꽤나 듬직해서 가끔 조수석이 꽉 차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 묵직함은 나에게 세상 그 어떤 데이터보다 확실한 안정감을 준다.



잎만 무성한 시금치가 되지 않기 위하여


비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질소 비료 생각도 난다.

질소는 잎을 파랗게 만들지만, 과하면 비타민이 부족한 시금치를 만든다고 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 빈 연구자가 되지 않으려면, 나 역시 비누처럼 본연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문체보다, 내 삶의 찌든 때를 씻어내고 본질을 드러내는 정직한 사유가 필요하다.


오늘 저녁에도 나는 보보가 선물해준 흑설탕비누를 집어 든다.

거품 속에서 폭약의 파괴력과 마술사의 치유력을 동시에 느끼며, 나는 하루의 먼지를 씻어낸다.

비누칠을 마친 내 피부가 물과 함께 매끄럽게 정리될 때, 나의 정신도 비로소 맑은 인덱싱을 시작한다.

세탁은 완료되었고, 나의 밤은 이제부터 진짜 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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