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의 힘 2
사 분단 다섯 번째 줄에 앉은 삼 번
이름은 오!하나
국어 시간에는 시를 읽는 삼 번
수학 시간에는 숫자를 세는 삼 번
다섯 개 중 한 개를 골라야 하는
똑같은 시험지 앞에서
운 좋은 삼 번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삼 번은 이 번과 사 번의 중간일 뿐
오!하나라는 이름은 사라져
기다림을 위한 시를 골라
천천히 낭독하고
간절함의 시간을 하나하나
숫자로 헤아려 갈 때
번호표를 털어내며
자기 숨소리로 발돋움하는 자리
네모난 교실의 벽을 뚫고
비로소 또렷하게 들려오는 소리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오!
하나.
질문을 던져보았을 뿐입니다.
“왜 이런 꿈을 갖게 되었니?”
“글쎄요…….”
아이는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수학을 이렇게 잘할 수 있었니?”
“그러게요. 어렸을 때부터 수학 문제를 풀 때는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것 같아요. 친구들이 잘 못 풀고 있을 때 알려주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잘하게 되었나 봐요.”
“혼자서 문제를 풀 때 힘들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가르쳐줄 때는 기분이 좋았겠네. 그런 시간 속에서 네가 무엇을 잘하는지 발견하게 되었나 보다.”
아이는 조금 놀란 듯 제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그동안 아무도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라고 생각해 보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선생님께 이런 말을 들어보니 제가 수학에 관심이 많고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말을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시절에 만난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참 성실한 아이였는데, 어느 날부터 수업 시간에 볼 때마다 얼굴빛이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더니 다른 친구들은 원하는 학과를 정해 관련 탐구활동도 하는데 자신은 아직 뚜렷하게 정한 것이 없어 불안하다고 했습니다. 이제 곧 고3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던 모양입니다.
그때는 2학년 2학기, 가을이었습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하지요. 아이에게도 그런 계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학생과 함께 성적표와 생활기록부를 살펴보았습니다. 다른 교과의 성적은 낮은 편이었지만 수학만큼은 1학년 때부터 좋은 점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어려운 수학을 이렇게 잘할 수 있었을까.
저는 그저 감탄했습니다. 다른 교과의 낮은 성적은 잠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수학을 이렇게 잘할 수 있었니?”
그 질문 앞에서 아이는 자신이 수학 문제를 풀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친구들에게 알려주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묻지 않은 것까지 술술 풀어놓았습니다.
그전까지 아이는 자신이 가진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수학을 잘한다는 사실은 성적표에 적혀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마음속에 분명하게 자리 잡지 못했던 것이지요.
질문 하나가 아이에게 새로운 답을 알려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스스로 바라보게 했을 뿐입니다.
저는 그때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이 가진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질문이 중요하겠구나. 그리고 질문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이를 천천히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처음에 저는 학생에게 “왜 그런 꿈을 갖게 된 거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학생은 조금 머뭇거렸지요. 이후 질문의 방향을 바꿔 학생의 상황을 천천히 들여다본 후 질문을 해주었습니다. 잘하는 수학에 관해 말이지요.
그렇게 저는 아이들의 고유한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이 진로교육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즈음 큰딸도 고등학생이어서 진로에 관해 공부하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조금은 자신감에 부풀어 진로 교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자리에 서보니 제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고3 담임을 오래 했다는 이유만으로 진로 교사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참 단순한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어른들이 정해놓은 대학의 서열을 바라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동안 저를 만났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중학교 진로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새롭게 만나면서, 제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어떤 낡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 생각하다 보면 저절로 흐뭇하고 아이들의 성장에 대한 기대로 가득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달랐습니다. 같은 교실에 앉아 같은 수업을 듣고 있어도 마음이 움직이는 곳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어떤 아이는 숫자 속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어떤 아이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아직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하지 못했지만, 마음속에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가진 고유한 빛을 발견하는 일, 그것이 제가 진로 교사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최근에는 예술계 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예술계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을 전에 상담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아이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은 부족하더라도, 학생이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선택했는지 들어줄 수는 있을 것 같았습니다.
준비한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도전하려는 마음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그 마음을 꺾기보다 북돋아주고 싶었습니다.
학생이 작성한 자기소개서를 읽다가 친구들의 영상 제작을 도와주었다는 대목에서 멈추었습니다.
“영상 제작에 관심을 둔 이유가 뭔지 궁금한데?”
아이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이 아이가 영상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조금씩 알 것 같았습니다.
“흥미로운 영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요. 저처럼요.”
그 말을 듣고 오래전 고3 담임 시절에 만났던 한 학생이 떠올랐습니다.
그 아이는 성적이 고르지 않았지만, 자신의 꿈이 생기자 달라졌습니다. 점심시간마다 친구들과 농구를 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그 유혹을 뒤로하고 혼자 바카라상에 앉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능에서 모든 과목 1등급을 받고 단과대학 수석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다시 배웠습니다. 지금 드러난 모습만으로 아이의 가능성을 다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한창 자라고 있는 아이들은 아직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중입니다. 어른의 눈에는 미숙해 보이는 행동 속에도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보이는 모습만으로 아이를 판단하기보다 앞으로 성장해갈 모습을 기대하며 격려하려고 노력합니다. 생활기록부에 아이들의 모습을 기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성적이나 행동을 옮겨 적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아이가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우리 중학교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예술계 고등학교를 향한 열정으로 반짝이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뮤지컬, 민요, 댄스, 개그. 서로 다른 관심과 재능을 가진 네 명의 학생이 모였습니다.
3학년 담임 선생님들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모의면접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이 준비한 것을 조금이라도 더 당당하게 펼쳐 보일 수 있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방과 후에는 영상으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던 학생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오늘 조금 아쉬웠어요. 많이 떨려서 준비한 것을 다 펼쳐내지 못했어요.”
“괜찮아. 오늘은 실전이 아니잖아. 앞으로 충분히 연습하면 자신감이 더 생길 거야.”
“혹시 안 되면 어떻게 하지요?”
저는 잠시 생각하다가 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교사가 되기 전에 일곱 번이나 실패했단다.”
“그래요?”
“힘들긴 하지. 그래도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네가 품은 뜻이 있다면 그 뜻을 펼칠 길은 또 찾을 수 있으니까.
선생님은 일곱 번 실패했기 때문에 실패를 자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고.”
아이는 제2의 계획도 세워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당장 모든 것을 잘 해내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있겠구나.
아이들은 모두 다릅니다.
저마다 다른 관심과 재능을 품고 있고, 그 마음이 드러나는 때도 서로 다릅니다. 누군가는 일찍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누군가는 여러 번의 질문과 경험을 거친 뒤에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갑니다.
경쟁이 치열한 세상이라 해도, 그 치열함 때문에 아이들 각자의 빛깔까지 잃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보다, 아이들이 자기 안에 있는 답을 발견하도록 질문하는 사람으로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건넨 질문과 응원이 아이들이 서게 될 무대까지 순풍처럼 닿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기만의 빛으로 그 무대에 당당하게 서는 날, 오늘 함께 나누었던 질문과 이야기들도 작은 힘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그윽함을 품고 자라는 아이들을 오래, 다정하게 바라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