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산바카라과 다찌

통영 죽림해안로에서 상점가까지 걷고 식사하고 야경 즐겨보기

통영의 구도심에서 매번 머물다가 이번에는 통영 신도심에서 하루를 보내보기로 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죽림해안로에 서본다. 통영의 신도심을 걷는 사람들이 적지가 않다. 러닝 하는 사람도 있고 걷는 사람들도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한쪽에서 바다낚시를 하고 있었다. 차들이 달리는 아스팔트 옆으로 붉은 자전거도로가 이어지고 그 바깥으로 한 단 내려앉은 산바카라로가 바다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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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식 호안이 층층이 경계를 긋지만 바다를 만끽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누군가는 달리고 누군가는 페달을 밟았다. 난간에 기대 선 사람도 있었다. 같은 방향을 보면서 저마다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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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산자락 아래 마을이 낮게 엎드려 있었다. 요트 한 척이 물 위에 흰 몸을 누이고 돛대 선 배가 그 곁을 지켰다. 한 여행자가 휴대폰을 들어 그 장면을 담는 것도 보인다. 나도 셔터를 눌렀다. 같은 바다를 찍어도 남는 것은 각자의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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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는 통영시가 세운 디지털 안내탑이 서 있었다. 화면에서는 강풍 행동요령이 흘러나왔다. 문과 창문을 보강하고 흔들리는 시설물을 묶어두라는 정보가 보인다. 맨 아래 문장이 오래 남았다. 대비는 바람이 불기 전에. 그 옆 난간에는 인명피해 우려지역이라는 노란 표지가 붙어 있었다. 이토록 잔잔한 저녁 바다도 언젠가는 다른 얼굴을 한다. 이 길은 그 두 얼굴 사이에 놓인 약속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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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다찌로 정해 본다. 술을 청하면 안주가 알아서 따라 나오는 통영의 전통적인 술상이다. 이름의 뿌리를 두고는 말이 여럿이지만 중요한 건 이름보다 상 위에 쌓이는 것들이다. 첫 상에 감자전이 꽃잎처럼 둘러 나왔다. 가장자리가 노릇하게 눌어 있었고 가운데 간장 종지에는 쪽파와 깨가 떠 있었다. 맑은 국물 속 홍합은 파채를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묵무침과 감자샐러드가 이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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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이 몇 번 오가자 접시가 바뀌었다. 흰 살 생선회 몇 점이 작은 종지에 담겨 왔다. 양념을 두껍게 바른 생선구이는 긴 접시를 가득 채웠는데 납작한 몸을 보니 가자미 종류 같았다. 수육과 김치가 한 접시에 나란히 누웠고 김치볶음밥이 뒤를 이었다. 크림 파스타가 나왔을 때는 잠시 웃음이 났다. 다찌의 상은 정해진 차림표가 아니다. 그날 주방의 손과 바다의 사정을 따라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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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를 손님이 정하지 않는 저녁에 내어주는 대로 받으면 되는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그 느슨함이 오히려 편안했다. 무언가를 고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여행자에게 드문 호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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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나서니 바다는 이미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낮에 걸었던 길이 전혀 다른 옷을 입고 기다렸다. 난간을 따라 보랏빛이 이어졌고 주황 중앙선이 그 빛 위로 점선을 그었다. 흰 그늘막은 밤이 되자 커다란 꽃처럼 피었다. 분홍빛에 잠긴 기둥 사이를 지나면 긴 터널을 걷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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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바지 차림으로 달리는 사람이 지나갔다. 난간에 기대 통화하는 사람도 있었고 느린 걸음의 노부부도 보였다. 물 위에 뜬 부잔교 불빛이 수면에 길게 번졌다. 멀리 불 밝힌 배가 천천히 미끄러지는 모습도 보인다. 해안도로에서 한 블록 안으로 들어서면 죽림상점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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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은 이곳을 통영의 관문에 자리한 상점가이자 여행자와 주민이 만나는 자리로 소개한다. 지도는 상점가를 노랑과 분홍과 초록과 파랑 네 구역으로 나누고 가게마다 번호를 붙여두었다. 해안로의 번지처럼 여기서도 숫자가 길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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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 옆에서는 죽순을 닮은 초록 캐릭터가 손을 흔들었다. 대 죽(竹)에 수풀 림(林). 동네 이름을 몸에 새긴 녀석이다. 불 밝힌 상점가 글자 옆에도 같은 얼굴이 서 있었다. 공원 쪽 돌길에는 나비 무늬 빛이 둥글게 내려앉아 있었다. 발을 올리자 나비가 신발 위로 옮겨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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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가는 정류장은 스마트쉘터였다. 냉난방이 되고 와이파이와 충전기가 있는 공간으로 조성이 되어 있었다. 문에는 포스터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열리는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잠들지 않던 바다의 기억을 빛으로 잇는다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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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걸은 길은 번호가 매겨진 해안로와 번호로 나뉜 상점가였다. 그 숫자들 사이로 감자전의 온기와 보랏빛 난간과 흔들린 풍경의 모습이 이어졌다. 수백 년 전 이 바다를 지키던 통제영의 밤은 어떤 빛이었을까. 다음 저녁은 그쪽으로 걸어가 볼 생각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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