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산은 남는다, 울주에서 떠올린 한 걸음의 용기
울주는 울산에서 가장 많이 머물렀던 곳으로 산이 좋고 분위기가 좋아서 그곳을 자주 방문해 본다. 우선 울산 울주군 상북면으로 들어서면 산의 모습부터 달라진다. 도시의 건물 사이로 멀리 바라보던 산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산이 풍경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하는데 가지산과 신불산을 비롯한 영남알프스의 산줄기가 이어지는 이곳은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도 익숙하지만, 매년 가을이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조금 특별한 공간이 된다.
지난 9월 18일부터 22일까지 제11회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가 열렸다. 영화제가 열리는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 주변에는 영화제의 색을 입힌 구조물과 깃발, 상영작 포스터가 곳곳에 자리했다. 산을 배경으로 세워진 영화제의 공간을 걷다 보면 일반적인 영화제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극장을 나서면 다시 산이고, 영화를 보기 전에도 산을 보고, 영화가 끝난 뒤에도 산을 바라보게 된다.
시간이 지나 가을색이 무르익어가기 시작할 때 다시 이곳을 찾아가 보았다. 행사는 끝났지만 영화제의 흔적은 아직 곳곳에 남아 있었다. 푸른색과 초록색으로 이어진 영화제의 벽면에는 당시 상영된 작품들의 포스터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중 눈길이 머문 작품이 하나 있었다.
〈남극에서 온 편지〉.
김영미·김지영 감독의 49분짜리 다큐멘터리로, 탐험가 김영미가 남극대륙을 홀로 횡단했던 시간을 기록한 작품이다. 김영미는 70일 동안 1,786㎞를 걸어 남극대륙 단독 횡단을 완성했다. 아시아인 최초이자 세계 네 번째 기록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기록 자체만은 아니다. 영화의 중심에는 오히려 아주 작은 행동 하나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 자체는 남극이라는 거대한 공간 앞에서 인간 한 사람의 걸음은 너무나 작아 보인다. 눈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이 있고 하루를 걸어도 풍경이 거의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결국 1,786㎞ 역시 한 걸음이 수없이 반복된 결과다.
김영미는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며 혼자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고 영상 속에서 이야기한다. 혼자 걷는 시간이었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사람의 응원과 기도가 있었다. 영화제 역시 이 작품을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로 소개했다. 그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울주와 잘 어울리는 것은 왜일까.
영남알프스의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상이라는 결과보다 그곳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등산을 시작할 때에는 정상은 멀리 있다. 첫 번째 계단을 오르고, 숲길을 지나고, 숨이 차오르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걷는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처음 있던 곳이 아주 멀리 내려다보인다. 산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결국 한 걸음이다.
그래서 산악영화가 반드시 거대한 산이나 극한의 등반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든다. 산은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고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를 가장 단순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정상에 오르고, 누군가는 돌아가고, 또 누군가는 다시 도전한다. 〈남극에서 온 편지〉 역시 그런 이야기였다.
그리고 관객들도 그 이야기에 반응했다. 올해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 이 작품은 ‘산’ 섹션 관객상을 받았다. 전문 심사위원이 아니라 영화를 본 관객들이 선택했다는 점에서 작품이 남긴 감정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영화제가 끝난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는 조금 조용해져 있었다.
며칠 전까지 사람들이 오가고 영화가 상영되고 이야기가 이어지던 공간에는 다시 산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영화제 구조물 뒤로 산이 보이고, 바람이 불면 남아 있는 깃발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산악영화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영화는 두 시간 남짓이면 끝난다. 영화제도 며칠이면 끝이 나지만 어떤 장면과 어떤 문장은 그 이후에도 남는다. 남극의 설원 위에서 내디딘 한 걸음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 역시 대부분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된다. 영화제가 끝난 뒤 다시 바라본 영남알프스에서 그 단순한 사실을 떠올리며 내려가본다.
멀리 가는 것도 결국 한 걸음을 내딛는 것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산을 오르는 이유이자, 산에 관한 영화를 계속 바라보게 되는 이유이지 않을까. 영남알프스를 내려오면서 늘 그렇듯 작천정에 잠시 들러본다. 고즈넉한 자연의 풍광을 바라보며 계곡 앞 바위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신다. 영화제는 끝났고 영화도 끝났지만, 그날 보았던 산과 한 걸음에 대한 여운을 이곳에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