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를 따라 걷고, 공연을 만나고 따뜻한 묵밥 한 그릇으로 마무리
가을 하면 코스모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있을까. 가장 단순한 모습이지만 심플한 모습이기에 더욱더 가볍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골목길 안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코스모스를 보면서 옥천 구읍을 걷다 보면 ‘향수’라는 말이 여러 겹의 의미로 다가온다. 정지용 시인의 대표작 제목으로 오래된 집과 골목, 밭과 낮은 산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여행자의 마음속에서도 오래전 기억을 불러내는 감정이 된다. 특히 한낮의 더위가 조금씩 물러나는 가을에는 구읍의 풍경이 더 잘 보인다.
구읍에 들어서면 먼저 도시와 농촌의 경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밭 너머로 오래된 집들이 이어지고 그 뒤를 낮은 산이 감싼다. 전봇대와 전선이 복잡하게 지나가고, 그 사이에는 새로 단장한 건물과 오래된 지붕이 함께 놓여 있다. 어디를 특별히 꾸며놓았다기보다는 오랜 시간이 겹겹이 쌓여 구읍의 모습을 만들었다.
옥천 구읍의 골목 한쪽에 핀 코스모스 한 송이를 바라보고, 담장에 그려진 그림 앞에서 잠시 멈춰보고, 좁은 길 끝에서 가을을 보면서 감성색채를 만나본다. 옥천군에서도 정지용 생가를 출발점으로 하는 구읍 골목길을 약 3㎞의 걷기 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정지용 생가가 자리한 이곳에서 ‘향수’는 단지 시 한 편으로 끝나지 않는다. 생가와 문학관 주변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시인이 바라보았을 법한 고향의 공간을 지금의 시간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육영수 생가로 향하는 이정표도 보이고 오래된 담장과 낮은 주택 사이에서는 구읍이 지닌 근현대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9월 23일 오후 5시에는 옥천군전통문화체험관 잔디마당에서 연희극·마당극 형식의 ‘팔봉이 장가가는 날’이 열린다. 옥천의 9월 문화행사 일정에도 올라 있는 공연이다. 제목부터 정겹다. 전통혼례를 소재로 한 마당극을 오래된 구읍의 가을 저녁에 본다는 것은 대형 공연장에서 공연을 보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 될 듯하다. 관객과 배우 사이의 거리가 가깝고, 공연이 끝나면 다시 골목과 저녁 풍경 속으로 걸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뒤에는 또 다른 형태의 ‘옛날 공연’도 찾아온다. 무성영화 변사극 ‘이수일과 심순애’다. 옥천군에서는 9월 30일 , 10월 14일 옥천읍 공연을 비롯해 지역을 돌며 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영상을 틀어놓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변사가 직접 여러 인물의 목소리와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디지털 영상과 OTT가 일상이 된 지금에는 오히려 생소해서 새로운 공연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구읍이라는 공간과도 잘 어울린다. 정지용의 문학이 남아 있고, 오래된 골목이 있으며, 그 골목에서 다시 옛 마당극과 무성영화가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서 말하는 향수는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이라기보다 과거의 문화를 지금의 방식으로 다시 경험해 보는 시간에 더 가깝다.
가을에 옥천 구읍을 여행한다면 유명한 장소 몇 곳을 빠르게 확인하고 떠나기보다는 시간을 조금 넉넉하게 잡아보는 것이 좋다. 정지용의 문학에서 시작해 코스모스가 핀 골목을 걷고, 때가 맞는다면 마당극이나 무성영화 공연을 보고, 마지막에는 따뜻한 묵밥 한 그릇을 먹어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옥천에서 만나는 ‘향수’는 꼭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옥천군은 2025년 정지용 생가가 있는 구읍 일대 음식점 20곳을 묶어 ‘시와 밥상의 거리’로 조성하기도 했다. 문학관이나 생가를 둘러보는 여행에서 끝내지 않고 음식까지 하나의 구읍 여행으로 연결해 보려는 시도다. 그 이름을 생각하면 묵밥 한 그릇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시를 읽고 골목을 걸은 뒤 한 끼를 먹는 일까지 모두 여행의 일부가 된다.
가을의 구읍에서는 공연소식도 보인다. 이번에 구읍을 걸으며 눈에 들어온 것은 전봇대마다 걸려 있는 공연 안내였다. 오래된 마을을 걷는 여행에 공연이라는 요소가 더해지니 공간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다. 과거의 모습을 보존해 놓은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이 모이고 웃고 문화를 즐기는 동네라는 느낌을 준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구읍의 골목은 다시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작은 조명들이 켜지고 오래된 집의 창문에도 불이 들어온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전선과 낮은 지붕, 골목 끝의 산자락이 저녁빛 속에서 한 장면처럼 이어진다.
옥천 구읍의 여행은 묵밥 한 그릇에서 완성된다 한동안 골목을 걷고 나면 자연스럽게 음식으로 시선이 간다. 옥천을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하면 생선국수와 도리뱅뱅이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많지만 구읍에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또 하나의 음식이 있다. 바로 도토리묵이다.
옥천군 문화관광에서도 도토리묵밥을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로 소개하고 있으며, 구읍의 전통 먹거리 이야기에서는 오랫동안 묵을 쑤어 음식을 만들어온 묵집들의 이야기를 별도로 다루고 있다. 이번에 찾은 곳은 골목에서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옥천묵집이다. 공식 옥천군 맛집 안내에도 도토리묵밥과 도토리칼국수를 대표 메뉴로 하는 식당으로 올라 있으며, 주소는 옥천읍 향수 7길 8이다.
묵밥은 큼직하게 썬 도토리묵에 김과 채소를 올리고 따뜻한 국물을 넉넉하게 부어낸다. 여기에 밥 한 공기와 김치, 동치미 같은 반찬이 곁들여진다. 묵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 부드럽게 넘어가고, 국물을 마시면 걸었던 몸이 다시 따뜻해진다. 특히 가을의 묵밥은 계절과 잘 맞는다. 한여름처럼 차가운 음식이 당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뜨거운 국물이 부담스러운 계절도 아니다. 따뜻한 육수와 담백한 묵, 김치의 맛이 서로 강하게 앞서지 않으면서 한 끼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오래된 골목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옛이야기는 다시 공연이 되어 찾아오고 예전부터 먹어온 묵밥은 오늘도 한 상에 오르기에 좋은 가을이다. 가을의 옥천 구읍은 그렇게 기억을 보존하는 마을이 아니라 기억을 계속 살아가게 하는 마을처럼 다가오고 있다. 그렇게 가을은 골목여행이 제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