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고여 맑아지고 맑아져서 이름을 얻은 제천의 능강구곡(綾江九曲)
여름을 제대로 만끽해보기 위해 제천의 계곡으로 내려서기 전에 안내판부터 읽어본다. 능강구곡(綾江九曲). 제천시 수산면 금수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청풍호로 드는 십 리 계곡에 아홉 굽이를 이뤘다는 이야기가 있다. 1760년대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이미 이 골짜기의 못과 폭포와 암벽이 적혔다고 한다. 조선 후기 선비 권섭은 벼슬길 대신 산천을 택한 사람이었는데 이 물길의 빼어난 자리마다 이름을 붙여 아홉 굽이로 엮었다. 쌍벽담 몽유담 연자탑 만당암 취적대. 이름만 읽어도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안내판 아래쪽 한 줄에서 걸음이 멈춘다. 아래쪽 몇 굽이는 지금 물속에 들어가 있다. 충주댐이 들어서며 생긴 청풍호가 계곡의 첫머리를 삼켰고 쌍벽담과 몽유담 같은 아래 굽이는 갈수기에야 잠깐 제 모습을 드러낸다.
안내판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본다. 능강교가 계곡을 가로지르고 다리 아래로 매점과 평상이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시원하게 막걸리를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비 갠 뒤라 숲은 물기를 머금어 짙고 길 위로는 옅은 안개가 낮게 깔렸다. 청풍호 자락을 끼고 도는 이 길은 요란하지 않다. 계곡으로 드는 문턱이 이렇게 조용한 것도 능강의 매력일 것이다.
능강계곡의 얼굴은 너럭바위다. 크고 매끈한 화강암 반석이 계곡 바닥에 넓게 깔리고 물은 그 위를 얇게 흘러내린다. 높은 데서 쏟아지는 폭포의 계곡이 아니라 넓은 돌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는 계곡이다. 곳곳에 미끄럼 주의라 적힌 안내가 걸려 있는 것도 그래서다.
젖은 화강암은 보기보다 미끄러워서 조심해서 걸어본다. 물이 많지 않은 철이라 반석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오랜 물이 깎아낸 홈과 갈라진 틈 물이 지나며 남긴 무늬가 돌 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물이 빠진 자리에서 오히려 계곡이 지나온 시간을 읽을 수가 있다.
매점 아래 개울에는 아이가 대야와 그물을 들고 쪼그려 앉았다. 둥근 돌 사이로 얕은 물이 흐르고 그 곁으로는 초록빛으로 고인 소가 바닥까지 비친다. 옛사람이 굽이마다 담이라 이름 붙인 것이 이런 웅덩이였을 것이다. 물이 고여 맑아지고 맑아져서 이름을 얻게 된다.
능강계곡은 걷기 위한 골짜기이기도 하다. 제천은 이 일대를 청풍권 힐링트레킹으로 만들어 두었다. 계곡 왼쪽 능선을 타고 오르는 정방사길은 채 이 킬로미터가 되지 않는 짧은 길인데 그 끝에 산중 암자 정방사가 있다. 작은 절이지만 마당에 서면 월악산과 청풍호가 발아래로 펼쳐진다고 한다.
물에 잠긴 굽이를 품은 그 호수를 높은 데서 한눈에 내려다볼 수가 있다. 계곡 위쪽으로는 얼음골생태길이 이어져 한여름에도 찬 기운이 도는 얼음골과 신선봉 금수산 자락으로 걸음을 데려간다. 힐링이라는 말이 이 길에서는 과장이 아니다. 잠긴 것과 남은 것을 나란히 두고 천천히 걷는 일 자체가 마음에 와닿는다.
계곡을 나와 옥순봉 쪽 호반길로 방향을 잡으면 능강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능강솟대문화공간이 있다. 솟대는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하늘을 향한 소망을 실어 세운 것이다. 긴 장대 끝에 오리나 새를 얹어 마을 어귀에 세우면 그 새가 사람의 바람을 하늘까지 물어다 준다고 믿었다. 이곳은 솟대 조각가 윤영호가 그런 새 수백 마리를 나무 끝에 앉혀 둔 자리다. 아래로는 이름이 물에 잠기고 위로는 새가 하늘로 솟는다. 한 골짜기 안에서 잠김과 솟음이 이렇게 마주 서 있다.
호반길을 조금 더 가면 옥순봉과 옥순대교가 청풍호 위로 나타나고 그 물빛 어딘가 아래에는 능강구곡의 첫 굽이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갈수기가 오면 물이 조금씩 빠지고 잠겼던 굽이가 잠깐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다고 한다. 이름만 남은 줄 알았던 자리가 계절 따라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무엇이 잠기고 무엇이 남는지 여기 물가에 앉아 굳이 셈하지 않아도 좋다. 잠긴 이름도 드러난 물길도 결국 같은 계곡이 오래 품어 온 풍경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