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 천주교 순례길

언양성당 출발 → 길천·순정·살티공소 → 살티순교성지, 약 13.1km

요즘처럼 뜨거운 날들이 있을까. 울주를 방문해서 천주교 순례길에 올라선 것은 여름의 정오였다. 하늘은 구름 몇 점 걸린 채 파랗고 길 양옆으로는 초록이 지칠 줄 모르고 번져 있었다. 매실나무와 은행나무가 뒤엉킨 시골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매미 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이따금 스치는 바람만 있는 곳에서 나는 나무 안내판 하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교우들의 은신처, 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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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아래 화단에는 노란 금계국과 자줏빛 채송화가 돌 틈을 비집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아무도 심으라 하지 않았을 이 꽃들은 숨어 살던 사람들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저 좋을 대로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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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티는 예부터 화살을 만들던 곳이라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화살, 그러니까 누군가를 겨누는 도구를 만들던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곳은 정반대의 의미를 갖게 된다. 박해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숨어든 곳으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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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천주교 순례길의 안내판은 담담한 문장으로 그 역사를 적고 있었다. 1815년 을해박해,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간월골에 큰 교우촌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1866년 병인박해로 성전이 불타고 마을이 폐허가 되자 나무가 울창하고 맹수가 득실대던 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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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해 가장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야 했던 사람들의 선택이 이 짧은 지명 하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정표는 여러 갈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영남알프스 둘레길, 그리고 울주 천주교 순례길. 2구간 시작점까지 약 11.6킬로미터 구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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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표식에는 빛이 뻗어나가는 길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이 길은 언양성당에서 출발해 길천, 순정, 살티공소를 거쳐 살티순교성지에 이르는 13킬로미터 남짓의 여정이라고 한다. 걷는 사람의 발끝마다 백 년도 더 된 두려움과 믿음이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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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걷다 보면 행정마을 표석을 만난다. 화살촉을 닮은 화강암 표석에 마을의 내력이 적혀 있었다. 살구나무가 많아 정자를 이루던 곳이라 '살구정'으로 불렸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서북쪽 살티마을에 조선 말기 천주교 교우촌이 있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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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김영제 베드로의 묘소와 원바위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문장도 있었다. 김영제는 간월골에서 붙잡혀 경주로, 다시 서울로 끌려가 아홉 달 동안 모진 고문을 견딘 사람이다. 종지뼈가 떨어져 나가는 형벌을 받고도 살아 돌아와 고향 안살티에 정착했고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표석 하나에 이렇게 무거운 생애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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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마을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기도 한다. 돌로 쌓은 축대 아래로 얕은 개천이 흐르고 그 위로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붉은 벽돌의 낡은 호텔 건물과 초록의 산이 어색하지만 어쩐지 정겹게 겹쳐 보였다. 가지산 보덕사로 오르는 갈림길에는 연꽃과 용이 그려진 벽화가 여름 햇살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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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면 알게 된다. 순례라는 것이 대단한 각오가 아니라, 그저 한 걸음씩 옮기며 지나간 시간을 되짚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화살을 만들던 자리가 은신처가 되고 은신처가 성지가 돼 이제는 낯선 여행자가 땀을 훔치며 지나가는 길이 되었다. 같은 땅 위에서 이렇게 다른 시간들이 포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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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 무렵, 산에서 내려와 읍내의 해산물 가게에 들렀다. 수조 안에서는 새우들이 긴 수염을 흔들며 서로를 밀치고 있었고, 그 너머로 물풀과 그물이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온종일 걸은 몸이 시원하고 얼큰한 무언가를 원했다. 물회를 한 그릇 포장해 숙소로 돌아왔다. 울주는 바닷가에 자리한 지역이라 싱싱한 해산물을 내놓는 곳들이 적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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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을 열자 붉은 육수 위로 얇게 썬 회와 채 썬 오이, 김가루가 소복이 올라 있었다. 그 옆에 하얀 소면 한 뭉치가 얌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새콤달콤 매콤한 국물을 한 술 뜨자 하루의 열기가 쑥 내려갔다.


소면을 말아 후루룩 넘기니 온몸의 피로가 국물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걷는 동안 만난 산과 길과 오래된 이야기들이, 이 한 그릇 안에서 조용히 마무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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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살던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하루가 저물면 무언가를 먹고, 몸을 뉘고, 다음 날을 맞았을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그런 일의 반복이니까. 화살을 만들던 역사도 숨죽여 도망치던 시대도 지나갔다. 남은 것은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람과 하루의 끝에 놓인 따뜻한 한 그릇의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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