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의 황영조공원

아름다운 삼척의 자연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에서 머무르다.

삼척시의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근덕면 초곡리에 다다르게 된다. 바다 바람이 파도를 몰고 와 방파제에 하얗게 부서지는 작은 어촌 마을이다. 마을 안쪽 언덕에 황영조기념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잔디밭 한가운데 청동상 하나가 서 있는데 지구를 딛고 올라선 한 사내가 두 주먹을 하늘로 뻗고 있다. 결승선을 끊은 순간의 포악을 조형물로 만들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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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30년이 훌쩍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몬주익 언덕을 넘어와서 금메달을 딴 사람의 이야기다. 상 앞에 서면 바다가 등 뒤로 펼쳐진다. 저 바다에서 자란 소년이 지구 위에 올라서기까지 걸린 시간을 잠시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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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그 시기를 생각하면서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 다. 황영조기념관의 세계제패관이라는 이름의 전시실이 이어진다. 유리장 안에는 트로피와 상장이 줄지어 있고 벽에는 그의 몸에 관한 숫자들이 붙어 있다. 최대 산소 섭취량은 체중 1킬로그램당 백 밀리리터를 넘겼고 안정 시 심박수는 분당 마흔두 번에 그쳤다고 적혀 있다. 사람들이 그를 인간 기관차라 불렀던 이유가 그 숫자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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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조의 아버지는 어부였고 어머니는 해녀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물질을 나가면 어린 아들은 둑에 홀로 앉아 어머니가 자맥질하는 자리를 따라 조금씩 몸을 옮겨 갔다고 한다. 어머니를 따라 숨을 참아 보다가 벅차서 숨을 들이켜면 어머니는 여전히 물속에 있었다. 바다에서 숨을 참던 그 시간이 소년의 폐에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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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집에서 십 리 남짓 떨어져 있었고 마땅한 교통편이 없어 그는 비포장 바닷길을 걸어 오갔다. 마라토너가 되겠다는 생각 같은 건 처음엔 없었다. 다만 그가 뛰놀던 바다와 오르내린 산자락이 훗날의 그를 조용히 만들어 가고 있었을 뿐이다. 재능이란 어쩌면 오래 반복된 하루가 축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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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한쪽에는 청동 투구가 놓여 있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코린트에서 만들어진 투구의 복제품이다. 원래의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어졌다. 손기정이다. 나라를 잃은 설움 속에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올라야 했던 그가 받은 고대의 투구가 이 바닷가 기념관에 복제되어 놓여 있는 데는 까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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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이 베를린에서 우승한 날이 8월 9일이었고 황영조가 바르셀로나에서 우승한 날도 8월 9일이었다. 56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날짜가 포개진다. 마라톤에 대해 이해하려면 이천오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마라톤은 원래 그리스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삼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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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90년 그곳 벌판에서 아테네군이 페르시아 군을 막아 냈다. 전령 하나가 그 승전 소식을 전하러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렸고 소식을 전한 뒤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후대에 다듬어진 전설에 가깝다는 견해가 많다. 근대 올림픽을 준비하던 이들이 젊은이의 마음을 움직일 서사로 이 죽음을 골랐다는 것이다. 사실이 어디까지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왜 하필 이 이야기를 골랐는가는 분명해 보인다. 한 사람이 자기 몸을 다 써서 끝내 무언가를 전한다는 것이라는 설정은 지독한 성실이 마라톤이라는 종목의 심장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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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목은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첫 근대 올림픽에서 되살아나게 된다. 그날 우승자는 그리스의 스피리돈 루이스였다. 개최국이 마지막까지 걸었던 희망을 한 사람의 다리가 결승선까지 끌고 들어왔다. 지금 우리가 아는 42.195킬로 미터라는 거리는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표준이 되었다. 거리는 나중에 정해졌지만 마라톤이 무엇인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끝까지 가는 일. 그것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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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조가 몬주익 언덕에서 라이벌을 떼어 놓고 결승선을 끊은 기록은 2시간 13분 23초였다. 그 숫자 뒤에는 마라톤 벌판의 전령이 있고 베를린의 손기정이 있고 초곡리 바닷가에서 어머니를 따라 숨을 참던 소년이 있다. 하나의 결승선에 그 모든 시간이 접혀 들어간다. 공간이 시간을 품듯 한 번의 완주가 이천오백 년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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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나와 언덕을 내려가 본다. 아래로 초곡항이 보인다. 방파제 끝에 흰 등대가 서 있고 작은 어선들이 물 위에 묶여 있다. 지붕마다 태양광 판을 얹은 집들이 항구를 감싸고 뒤로는 짙은 솔숲이 산을 덮는다. 세계를 제패한 사람의 고향이라기엔 더없이 조용한 풍경이다. 그러나 바로 이 조용함이 시작이었다. 저 바다가 소년의 꿈을 키웠고 저 비탈길이 그의 다리를 만들었다. 도착지가 몬주익이었다면 출발지는 이 항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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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위로 갈매기가 낮게 나록 파도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자리를 두드리고 있다. 한 사람이 이 바다에서 출발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이 자리로 이야기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그 오래된 항구를 천천히 걸어 본다. 달려서 무언가를 끝내 전하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저 바다는 다음 소년의 꿈을 담아서 전달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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