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가 효성그룹 일가의 법정 분쟁을 다룬 자사 단독기사를 온라인 출고 약 6시간 만에 삭제해 논란이 커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기사 수정이나 제목 변경이 아니라, 이미 독자들에게 공개된 기사가 통째로 사라진 겁니다.
더 논란이 된 건 기사가 삭제되기 직전 효성그룹 임원들이 한국일보를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문제의 기사는 지난달 28일 오전 4시30분 온라인에 출고된 ‘[단독] ‘지분 압박’일까 ‘결별 통보’일까…효성 형제 녹취·편지 봤더니’입니다.
조현준 효성 회장과 동생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 사이의 형사재판을 취재한 기사로, 법원에 증거로 제출된 형제 간 녹취록 등을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출고 당일 오전 10시12분 강철원 한국일보 뉴스룸국장의 지시로 삭제됐습니다.
오보가 확인된 것도 아니었고, 법적 문제가 발생했다는 설명이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국일보 내부에서도 정상적인 취재와 데스킹 절차를 거쳐 출고된 기사였다는 설명이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취재기자는 기사 삭제 결정 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됐습니다.
기사를 데스킹한 슬롯부장과 법조팀장 역시 삭제 여부를 함께 논의했다기보다 국장으로부터 삭제 방침을 통보받았다는 게 노조 측 주장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사태는 단순한 ‘기사 한 건 삭제’ 이상의 문제가 됩니다.
한국일보는 불과 몇 달 전에도 기사 삭제를 둘러싼 논란을 겪었습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장남의 음주운전 관련 기사가 수정·삭제되는 일이 벌어지면서 내부에서 편집권 독립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한국일보는 재발 방지를 위해 지난 4월 기사 수정·삭제 가이드라인까지 만들었습니다.
이 가이드라인에는 이해관계자가 기사 수정이나 삭제를 요청할 경우 뉴스룸국장이 담당 데스크와 취재기자에게 상황을 공유하도록 돼 있습니다.
또 수정이나 삭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국장과 데스크가 함께 판단하도록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작 그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뉴스룸국장이 취재기자와 충분한 논의 없이 기사를 삭제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일보지부 민주언론실천위원회는 이를 두고 “뉴스룸국장의 독단적 편집권 남용”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강철원 국장의 설명은 다릅니다.
강 국장은 해당 기사가 특정 취재원에 경도됐고, 피고인을 반복적으로 두둔하며 재판에 부당한 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균형을 상실한 기사라고 판단했다고 밝혔습니다.
기사 출고 당일 오후 조현문 전 부사장의 재판이 예정돼 있었다는 점도 삭제 이유 가운데 하나로 들었습니다.
효성 측의 항의가 기사 삭제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혹도 부인했습니다.
효성 임원들이 일방적으로 회사를 찾아왔고 곧바로 돌려보냈으며, 기사 삭제 결정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게 강 국장의 입장입니다.
현재까지 효성그룹이나 한국일보 경영진이 기사 삭제를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대기업의 외압 때문에 기사가 삭제됐다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삭제 과정의 투명성이 더 중요했습니다.
대기업이 기사를 문제 삼아 언론사를 직접 방문한 직후, 해당 기업과 관련된 기사가 사라졌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취재기자와 담당 데스크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왜 삭제할 수밖에 없는지 더 엄격하게 검증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였습니다.
강 국장은 취재기자들이 기사 삭제에 동의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데스크에 삭제 방침을 통보한 뒤 조치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논의를 했는데도 의견이 좁혀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반대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충분한 논의를 하지 않았다는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묻게 됩니다.
편집국장은 대체 어떤 자리입니까.
언론사에서 편집국장이나 뉴스룸국장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대개 오랜 취재 경험과 조직 내 높은 평가를 쌓아온 기자입니다.
큰 특종을 해봤을 수도 있고, 수많은 기사를 판단하고 데스킹하며 조직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쉽게 말해 언론사 안에서 ‘에이스’로 불리던 사람들이 올라가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경력이 함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판단이 인정받아 왔다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지나치게 신뢰하기 쉽습니다.
“내가 법조를 오래 해봤으니 내가 더 잘 안다.” “내가 봤을 때 이 기사는 문제가 있다.” “기자들과 얘기해봐야 반대할 테니 내가 결정하는 게 낫다.”
이런 판단이 반복되기 시작하면 편집국장의 경험은 강점이 아니라 위험 요소가 됩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자였다고 해도 한 사람이 모든 취재 영역을 가장 잘 알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해당 기사를 가장 깊이 취재한 사람은 편집국장이 아니라 현장 취재기자입니다.
그 기자를 데스킹한 담당 부장과 팀장에게도 각자의 판단과 근거가 있습니다.
편집국장의 역할은 이 사람들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판단을 듣고, 충돌하는 의견을 조정하고, 왜 자신의 판단이 더 타당한지를 설득하는 것이 편집국장의 역할입니다.
편집국장은 조직에서 가장 강한 편집권을 가진 사람인 동시에, 조직에서 가장 많이 들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권한이 클수록 더 많이 설명하고 더 많이 설득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내 판단이 맞으니 따른다”고 하면 그것은 리더십이 아닙니다.
독단이자 아집입니다.
그리고 언론사에서 편집권을 가진 한 사람이 반대 의견을 배제한 채 자신의 판단만으로 기사를 없앨 수 있다면, 그 구조는 독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언론이 정치권력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정작 뉴스룸 안에서는 한 사람의 판단이 절대적인 권력이 된다면 그보다 모순적인 일도 없습니다.
편집국장이 최종 바카라임자라는 말은 모든 판단을 혼자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종 바카라임자이기 때문에 다양한 판단을 충분히 듣고 가장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미 출고된 기사를 삭제하는 결정은 일반적인 데스킹보다 훨씬 무겁습니다.
한 번 공개된 기사는 더 이상 언론사 내부의 원고가 아닙니다.
이미 독자에게 전달된 공적 기록입니다.
그 기록을 지우려면 출고할 때보다 오히려 더 엄격한 기준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기사에 균형 문제가 있었다면 반론을 더 붙일 수도 있습니다.
표현에 문제가 있었다면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추가 취재를 통해 내용을 보강할 수도 있습니다.
후속 기사에서 부족한 맥락을 설명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모든 선택지를 놓고 기자와 데스크가 치열하게 논의한 뒤에도 삭제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 적어도 결정의 정당성은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기자가 반대할 것 같아서' 의견을 충분히 듣지 않았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 순간 토론은 사라지고 지시만 남습니다.
편집국장이 편집권을 갖는 것과 편집국장이 편집권을 독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언론사의 편집권은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취재기자의 취재와 데스크의 검증, 부서 내부의 토론과 최종 바카라임자의 판단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 조직적 권한입니다.
왜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겠습니까.
누구나 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취재기자도 틀릴 수 있고 데스크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편집국장도 당연히 틀릴 수 있습니다.
오히려 편집국장처럼 권한이 큰 사람이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 때 그 피해는 훨씬 커집니다.
그래서 언론사에는 한 명의 천재보다 서로의 판단을 의심하고 검증하는 시스템이 더 중요합니다.
그 시스템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기자 개인이 아닙니다.
언론사가 내놓은 기사에 대한 독자의 신뢰가 무너집니다.
기자가 아무리 취재해도 기업이나 권력자의 강한 항의 뒤 기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긴다면, 언론의 감시 기능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실제 외압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자들이 앞으로 스스로 위축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기업 기사는 세게 쓰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국장이 싫어하면 어차피 빠지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뉴스룸에 퍼지기 시작하면 누가 직접 기사를 막으라고 하지 않아도 기자들은 먼저 펜 끝을 무디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른바 자기검열입니다.
외부 권력이 언론사를 통제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내부의 한 사람이 막강한 편집권으로 뉴스룸을 위축시키는 것 역시 언론에는 치명적입니다.
특히 대기업이나 정치권력처럼 언론 보도에 강한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가 항의하는 상황에서는 더 엄격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기자도 보호할 수 있고 편집국장 자신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효성 측 방문과 기사 삭제 사이에 실제 인과관계가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강 국장의 말처럼 두 사건이 전혀 관계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취재기자와 데스크를 배제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판단 과정에 참여하고 그 근거를 남겼다면 “효성의 항의 때문에 삭제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지금보다 훨씬 약했을 겁니다.
독단적인 의사결정은 의혹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키웁니다.
이번 논란에서 한국일보가 답해야 할 질문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왜 이 기사는 반드시 삭제됐어야 했습니까.
그리고 왜 그 판단은 취재기자와 담당 데스크를 충분히 설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국장이 결정하고 통보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까.
편집국장은 언론사 최고의 기자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기자였다는 경력이 앞으로 내리는 모든 판단까지 옳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편집국장은 가장 자신 있게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판단조차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다른 기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사는 편집국장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뉴스룸 역시 편집국장의 것이 아닙니다.
그 당연한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 편집권은 권한이 아니라 권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