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은 왜 오디세이 원작을 이렇게 각색했을까

by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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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왔습니다.


귀를 밀어붙이는 듯한 사운드와 시야를 가득 채우는 아이맥스 화면, 세 시간 동안 좀처럼 속도를 늦추지 않는 전개까지, 여러모로 놀란다운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것은 거대한 스케일이나 괴물의 모습보다 오디세우스라는 인간이었습니다.


신과 괴물이 등장하고 영웅이 수많은 고난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인데도, 영화는 오디세우스가 품고 있는 죄바카라감과 그가 내렸던 선택의 무게를 끝까지 따라갑니다.


그리고 원작을 어느 정도 알고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굳이 이렇게 바꿨을까’ 싶은 장면이 예상보다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약 2700년 전에 만들어졌고 모두 24권으로 구성된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세 시간 남짓한 영화로 옮기면서 원작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놀란 역시 단순히 고전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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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관객이 과거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청중과 비슷한 충격과 감정을 느끼도록, 이 오래된 이야기를 새롭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전달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작과 달라진 부분을 단순히 ‘각색’이라고 넘기는 대신, 놀란이 어떤 대목을 선택적으로 고쳤는지 따라가 보면 영화의 의도가 조금 더 또렷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특히 눈에 띄었던 변화 다섯 가지를 골라봤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키르케입니다.


호메로스의 원작에서 키르케는 남성들에게 상처받아 그들을 경계하는 여성으로 단순하게 설명되는 인물이 아닙니다.


아이아이에섬에 사는 강력한 여신이자 마법사이며, 섬을 찾아온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에게 약을 먹인 뒤 지팡이로 그들을 돼지로 만들어버립니다.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에게 받은 약초 덕분에 키르케의 마법을 피하고, 그때부터 둘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키르케는 돼지가 된 병사들을 다시 인간으로 되돌려놓고 오디세우스와 연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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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 일행은 그 섬에서 무려 1년을 보내며, 이후 키르케는 오디세우스가 저승으로 향하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조력자가 됩니다.


반면 영화 속 키르케에게는 처음부터 훨씬 구체적인 동기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녀는 섬에 나타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보며 단순한 방문객이 아니라 자신을 강간하거나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남자들이라고 판단합니다.


그 때문에 남자들을 돼지로 만드는 행위 역시 변덕스러운 마법사의 장난보다는 일종의 판단과 응징처럼 묘사됩니다.


그리고 영화는 훗날 트로이가 함락되는 장면에서 그리스군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직접 보여줍니다.


앞서 키르케가 남성들을 바라보며 품었던 공포가 막연한 혐오나 편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관객에게 확인시키는 셈입니다.


놀란도 키르케의 장면을 두고 남자들이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과 연결된 이야기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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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를 연기한 서맨사 모턴 역시 이 인물을 연기하며 마치 역사 속 여성들이 겪어온 고통을 함께 짊어진 사람처럼 느꼈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호메로스가 자세히 답하지 않았던 ‘키르케는 왜 남자들을 돼지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 놀란이 자신의 답을 덧붙였다고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보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은 마법사가 정상적인 남성들을 갑자기 짐승으로 바꾸는 사건과는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전쟁을 거치며 이미 짐승처럼 변해버린 인간들의 모습을 키르케의 마법이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에 가깝습니다.


원전에서 때로는 위험한 마녀, 때로는 영웅을 유혹하는 여성으로 기억됐던 키르케를 놀란은 전쟁과 남성의 폭력을 오래 목격해온 여성의 위치로 옮겨놓았습니다.


헬레네 역시 영화가 기존의 이미지를 상당히 적극적으로 흔든 인물입니다.


다만 루피타 뇽오가 헬레네를 연기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곧바로 ‘원작을 변경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호메로스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인종적 구분에 따라 헬레네를 ‘백인 여성’이라고 규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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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수천 년 동안 유럽의 회화와 문학, 영화와 대중문화에서 헬레네가 압도적인 미모를 가진 백인 여성의 모습으로 반복해서 그려져 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익숙한 이미지의 자리에 루피타 뇽오를 세운 것은 적어도 관객이 머릿속에 갖고 있던 ‘트로이의 헬레네’를 의식적으로 낯설게 만드는 캐스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헬레네를 새롭게 다루는 방식에서 더 중요한 것은 배우의 피부색이 아닙니다.


핵심은 헬레네에게 전쟁의 바카라임을 어떻게 부여하느냐에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은 오랫동안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데리고 달아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기억돼왔습니다.


그 결과 헬레네에게는 이른바 ‘천 척의 배를 출항시킨 얼굴’이라는 표현과 함께, 절세미녀 한 사람 때문에 거대한 전쟁이 시작됐다는 이미지가 따라붙었습니다.


놀란은 바로 이 익숙한 설명에서 한발 물러섭니다.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실제 배경이 헬레네 한 사람에게 있던 것이 아니라 무역로와 패권을 둘러싼 이해관계였다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는 존재하지 않는 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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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여러 차례 암시하는 정체불명의 ‘바다 민족’ 역시 호메로스의 원전에서 가져온 요소가 아닙니다.


놀란은 신화의 설명만으로 전쟁을 보여주는 대신 후기 청동기 시대 문명의 붕괴와 이른바 바다 민족을 둘러싼 역사적 논의를 자신의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이 설정을 받아들이는 순간 헬레네는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킨 여성이 아니게 됩니다.


권력자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벌인 전쟁에 이름과 얼굴을 빌려준 존재에 가까워집니다.


더구나 영화에서 다시 메넬라오스 곁으로 돌아온 헬레네의 얼굴에는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놀란은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헬레네와 메넬라오스가 과거와 똑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제기했고, 얼굴에 남은 흔적을 전쟁 이후 세계에 남겨진 트라우마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원전의 여성 인물들을 하나의 상징이나 아이콘으로만 남겨두기보다 그 뒤에 실제로 살아가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도 밝혔습니다.


세상을 뒤흔든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그 이후에는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됐을지를 상상해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루피타 뇽오의 캐스팅을 포함한 헬레네의 변화 전체를 단순히 ‘PC 캐스팅’이라는 표현 하나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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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이 무너뜨리려는 것은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한 명 때문에 10년 동안 전쟁이 벌어졌다’는 낭만적인 신화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걷어낸 자리에는 경제적 이해관계와 권력의 욕망이 남고, 그 모든 바카라임을 대신 떠안은 한 인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엘리엇 페이지가 맡은 시논은 원작과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 더욱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애초에 시논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시논의 모습은 주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시논은 트로이 목마 작전의 중요한 공범입니다.


그리스군에게 버림받은 희생자인 척 트로이인들을 속이고, 거대한 목마가 아테나에게 바치는 신성한 제물이라고 거짓말해 트로이 사람들이 성 안으로 목마를 들이도록 만드는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영리한 사기꾼이자 오디세우스의 계략을 완성해주는 공작원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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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놀란은 시논의 성격을 거의 정반대로 바꿉니다.


영화의 시논은 명예를 얻기 위해 전쟁터에 뛰어든 귀족 전사가 아닙니다.


안티노오스 집안에서 일하는 하인의 아들이고, 애초에 전쟁에 나가도록 징집 제비를 뽑은 사람 역시 시논이 아니라 부유한 안티노오스입니다.


하지만 안티노오스는 전쟁터에 가기를 두려워하고 돈을 주는 조건으로 시논에게 자신을 대신해 전쟁에 나가달라고 요청합니다.


가난한 시논은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막지 않습니다.


더 잔인한 것은 시논이 트로이 목마 작전의 진짜 계획조차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정말 아테나에게 바쳐질 제물을 지키는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품은 채 죽습니다.


기존 이야기에서 다른 사람을 속였던 인물을 영화는 오히려 권력자의 거짓말에 가장 철저하게 속아 죽은 병사로 뒤집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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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승에서 시논과 오디세우스가 다시 만나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순간이 됩니다.


시논은 자신에게 진실을 말했다고 해도 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 말 때문에 관객이 트로이 목마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천재적인 전술이었던 트로이 목마가, 한 인간의 충성심을 굳이 속임수로 이용한 비겁한 작전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엘리엇 페이지를 이 역할에 배치했다는 점 역시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페이지가 놀란과 함께 작업한 것은 2010년 ‘인셉션’ 이후 16년 만입니다.


특히 슬롯가 부여한 역할과 자신의 정체성 사이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온 배우에게 ‘다른 사람에게 배정된 삶을 대신 살아야 했던 사람’의 역할을 맡겼다는 점은 여러 방향의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만 시논이라는 인물을 영화 안에 새로 불러들인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오디세우스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논은 오디세우스가 얼마나 뛰어난 전략가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 누가 희생돼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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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신들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변화일지도 모릅니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삶과 신들의 세계를 분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오디세이’가 시작될 때부터 올림포스에서는 제우스와 아테나가 오디세우스의 운명을 이야기합니다.


아테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텔레마코스를 돕고 끊임없이 오디세우스 편에 섭니다.


반대로 포세이돈은 자신의 아들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한 오디세우스에게 분노해 그의 귀향을 집요하게 방해합니다.


원작 속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들의 분노와 호의, 운명이 얽힌 세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놀란은 그 구조를 거의 모두 걷어냈습니다.


아테나가 젠데이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영화는 그녀가 정말 신인지조차 분명하게 확인해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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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오디세우스가 보는 아테나는 트로이가 함락될 당시 그리스군에게 목이 잘려 죽은 아테나 신전 여사제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영화 속 아테나를 실제 올림포스의 신이라기보다 오디세우스가 견디지 못한 기억과 죄바카라감이 만들어낸 환영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놀란은 이 부분에 뚜렷한 답을 주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


대신 고대의 사람들은 자연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하고 주변 사람들의 행동에서도 신의 의지를 느꼈을 것이라며, 신을 하나의 독립된 등장인물이라기보다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취지로 설명했습니다.


이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영화가 현실적으로 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이 사라지면서 인간이 져야 할 바카라임이 훨씬 무거워졌기 때문입니다.


호메로스의 원작에서는 오디세우스가 겪는 수많은 불행을 포세이돈의 분노나 신들이 정한 운명으로 돌릴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놀란의 세계에는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숨어들 신화적 공간이 거의 없습니다.


트로이 목마를 생각해낸 것도 인간이고, 트로이에서 학살을 벌인 것도 인간입니다.


시논을 속인 것도 인간이고, 수많은 부하들을 위험한 선택으로 몰아넣은 것 역시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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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나까지 오디세우스 자신의 죄바카라감에서 나온 환영일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그가 끝내 싸워야 하는 상대는 포세이돈도 운명도 아닙니다.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놀란의 ‘오디세이’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바다에서 튀어나오는 괴물이나 인간을 벌하는 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지성과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고, 그 확신을 이유로 다른 사람의 희생까지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이 오히려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여기서 놀란의 전작 ‘오펜하이머’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놀란 역시 ‘오펜하이머’를 만든 경험이 오디세우스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 큰 영향을 줬다고 직접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두 인물을 연결하며 던진 질문 역시 명확합니다.


무언가를 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곧 그것을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펜하이머에게 그 대상이 원자폭탄이었다면 오디세우스에게는 트로이 목마가 있습니다.


둘은 모두 압도적인 지성을 이용해 이전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전쟁을 끝내는 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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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놀란이 바라보는 지점은 그 천재적인 해결바카라이 탄생하는 순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사용한 뒤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역시 이런 해석을 훨씬 분명하게 만들어주는 변화입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오랜 방랑 끝에 마침내 이타카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며 자신의 왕국을 차지하려 했던 남자들을 죽이고 왕으로서의 자리를 되찾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은 구혼자들의 가족들이 다시 복수를 위해 무기를 들면서 또 다른 싸움이 벌어질 상황이 만들어지고, 결국 아테나가 나타나 양쪽에 싸움을 멈추라고 명령하면서 서사가 마무리됩니다.


놀란은 이 결말을 거의 새로 만들다시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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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텔레마코스가 이타카의 새로운 왕이 됩니다.


오디세우스는 오랜 세월 자신이 되찾으려고 했던 왕좌에 다시 완전히 앉지 않습니다.


그 대신 페넬로페와 배를 타고 서쪽으로 향해 자신 때문에 죽은 부하들을 기리려 합니다.


생각해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선택입니다.


‘오디세이’라는 이야기 자체가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을 뜻하는데, 놀란은 그가 마침내 집에 도착하자 다시 떠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오디세우스에게 부여한 문제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이 결말은 오히려 일관되게 느껴집니다.


놀란이 그리는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로 돌아온다는 것은 왕좌와 권력을 되찾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장소에 도착한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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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은 영화에서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한 명씩 목숨을 잃는 과정을 원작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로 다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오디세우스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결함 역시 트로이 목마에서 시작되는 비극적 결함으로 설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오디세우스가 왕좌를 텔레마코스에게 넘겨주고 자신을 따르다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다시 바다로 향하는 장면은 단순한 영웅의 은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야 시작되는 속죄에 가깝습니다.


호메로스의 이야기에서 귀환이 오랜 고난 끝에 얻어낸 승리의 완성이라면, 놀란에게 귀환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바카라임을 지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이 다섯 가지 변화를 한데 모아보면 놀란이 2700년 전 이야기를 굳이 지금 다시 꺼낸 이유도 어느 정도 보이는 듯합니다.


키르케에게는 전쟁을 경험한 여성의 시선을 부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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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네에게 씌워졌던 전쟁의 바카라임은 걷어냈습니다.


시논을 통해서는 이름 없이 전쟁터에서 죽어간 병사의 얼굴을 만들어냈습니다.


신들을 영화 밖으로 밀어내면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선택을 운명이나 신의 뜻으로 변명할 가능성도 없앴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왕좌에 앉아 승리를 완성하는 대신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다시 떠나게 합니다.


각각 전혀 다른 각색처럼 보이지만 방향은 놀라울 정도로 같습니다.


놀란이 바라본 ‘오디세이’는 위대한 영웅이 괴물을 쓰러뜨리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험담이라기보다,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자신이 승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뒤늦게 깨닫는 이야기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할 때 바라보는 트로이 목마와 영화가 끝난 뒤 기억하게 되는 트로이 목마는 같은 물건인데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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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누구도 떠올리지 못한 천재적 계략이자 10년 전쟁을 끝낸 승리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목마 뒤에는 무너진 도시와 죽어간 민간인들,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희생된 시논, 그리고 살아남았지만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오디세우스가 겹쳐집니다.


그런 점에서 놀란이 ‘오펜하이머’ 다음 작품으로 ‘오디세이’를 택한 것도 단순한 우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원자폭탄이라는 전례 없는 무기를 만들어 전쟁을 끝낸 현대의 천재를 다룬 뒤, 다음 영화에서는 트로이 목마라는 전례 없는 계략으로 전쟁을 끝낸 가장 오래된 천재 가운데 한 명을 불러냈습니다.


놀란 스스로도 ‘오펜하이머’를 만든 경험이 오디세우스를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줬다고 인정했습니다.


결국 놀란이 수천 년 전 영웅담에서 발견한 것은 신과 괴물의 신비로운 세계라기보다 지극히 현대적인 문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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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이긴다는 명분 아래 우리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승리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킨 뒤 그 결과에 대한 바카라임은 대체 누가 져야 하는가.


어쩌면 놀란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대담하게 뜯어고친 이유 역시 그 질문을 오늘의 관객에게 다시 던지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놀란의 ‘오디세이’는 영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영화라기보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불러온 영웅을 다시 심판대에 올려놓는 영화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다만 이렇게까지 읽어내는 것은 역시 저만의 지나친 해석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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