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 일하다 보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종종 느끼게 됩니다.
취재를 덜 한 것도 아니고, 취재원을 덜 만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어떤 정보는 늘 특정 매체에서 먼저 나옵니다.
처음에는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제 취재력이 부족한 건가 생각했습니다.
내가 조금 더 부지런했으면 알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취재원과 조금 더 가까웠으면 먼저 들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기자는 결국 사람을 만나 정보를 얻는 직업이고, 좋은 기자들은 놀랄 만큼 부지런합니다.
남들이 한 번 전화할 때 두 번 전화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사람을 만나고, 당장은 기사가 되지 않는 취재원을 몇 년씩 관리하기도 합니다.
큰 매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단독이 저절로 굴러들어오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곳에도 취재를 정말 잘하는 기자가 많고, 그 사람들이 쌓은 관계와 노력의 결과까지 모두 '매체빨'이라고 해버리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기자 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 보면 '매체 파워'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정치권을 취재할 때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정권이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매체에 이야기가 먼저 전달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껄끄러운 매체에는 끝까지 말을 아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꼭 거창한 기밀을 건네는 장면을 떠올릴 필요도 없습니다.
발표를 하루 앞두고 배경 설명을 조금 먼저 해준다든지, 취재 과정에서 "이 부분을 한번 알아보라"는 힌트를 준다든지, 자료가 나오는 시간을 귀띔해주는 정도의 아주 미묘한 차이입니다.
그 몇 시간, 때로는 그 한마디가 단독을 만들기도 합니다.
연합뉴스 같은 통신사가 정보를 먼저 받는 경우도 비슷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통신사에 정보를 주면 그 내용이 여러 매체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고, 특정 신문 한 곳에만 줬을 때보다 다른 기자들의 반발도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방송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녁 뉴스 한 꼭지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취재원 입장에서도 큰 방송사를 선택할 이유가 있습니다.
회사나 기관이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어느 매체와 먼저 이야기할지를 고민할 때 기자 개인의 역량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기사가 어디까지 퍼질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볼지, 다른 언론이 얼마나 따라올지도 함께 생각합니다.
기자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하지만 취재원 입장에서는 나름의 계산이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계산에는 기자 이름보다 회사 이름이 더 크게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수많은 언론사가 있습니다.
그중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진 신문사와 방송사, 통신사는 사실 손에 꼽습니다.
저도 10대 일간지 소속으로 일하고 있지만 취재를 하다 보면 회사 이름 앞에서도 다시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꽤 자존심 상했습니다.
분명 나도 열심히 뛰고 있는데 왜 어떤 기자에게는 전화 한 통이면 설명해주는 사람이 내 전화는 몇 번씩 받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내가 며칠 동안 쫓던 이야기가 어느 날 더 큰 매체의 단독으로 나오는 것을 보면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지 않은 순간에는 그 이유를 전부 제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런 생각을 오래 하다 보면 회사까지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다른 회사에 있었으면 달랐을 텐데, 저 명함을 들고 있었다면 이 취재가 훨씬 쉬웠을 텐데 하는 생각입니다.
아마 기자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생각이라고 봅니다.
능력이 되고 기회가 있다면 더 큰 매체로 옮기는 것도 당연히 하나의 선택입니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욕심도 자연스럽고, 좋은 취재 환경을 찾아가는 것을 굳이 나쁘게 볼 이유도 없습니다.
실제로 회사의 취재 인프라와 브랜드가 기자 개인에게 힘을 실어주는 순간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만이 답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큰 매체에 간다고 모든 취재가 쉬워지는 것도 아니고, 작은 매체에 있다고 좋은 기사를 못 쓰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큰 회사 이름 없이도 특정 분야에서 누구보다 먼저 전화받는 기자들이 있습니다.
출입처 사람들이 "그 기자한테는 이야기해도 된다"고 말하는 기자도 있고, 규모가 크지 않은 매체인데도 어떤 분야에서는 다른 언론들이 반드시 확인하는 기사를 쓰는 곳도 있습니다.
결국 매체 파워와 기자 개인의 힘은 완전히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회사의 이름이 기자를 도와주기도 하지만, 결국 수많은 기자가 쓴 기사들이 쌓여 회사의 이름을 만듭니다.
그걸 알면서도 후배가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으면 답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회사 때문에 안 되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으면 무조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런 순간이 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라고 말합니다.
매체 때문에 안 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까지 매체 탓으로 넘기지는 말자는 뜻입니다.
한 번 더 전화할 수 있었는지, 한 사람을 더 만날 수 있었는지, 남들이 보지 않은 질문을 할 수 있었는지는 결국 기자의 영역입니다.
그걸 다 해본 뒤에도 안 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조금 덜 자바카라해도 됩니다.
기자에게는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과 당장 바꿀 수 없는 것이 함께 있으니까요.
저 역시 아직도 매체 파워를 의식합니다.
다른 회사 단독을 보면서 부럽기도 하고, 어떤 날은 '우리 회사였으면 저 정보를 먼저 받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모든 이유를 제 능력 부족으로 돌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유를 회사 탓으로 돌리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진짜 이유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좋은 기사를 하나라도 더 쓰는 일입니다.
조금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것이 결국 매체 파워를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회사의 이름값이라는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닐 겁니다.
그 회사에서 일했던 수많은 기자가 중요한 기사를 쓰고, 신뢰를 얻고, 사람들이 그 매체를 찾게 만든 시간이 쌓여 지금의 이름이 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몸담은 회사의 다음 이름값 역시 결국 지금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일 겁니다.
후배들에게 이 말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모든 벽을 넘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분명 개인이 당장 바꾸기 어려운 조건이 있습니다.
매체 파워도 그중 하나입니다.
다만 그 사실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일을 계속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남의 명함을 부러워하는 시간보다 내 이름으로 한 줄이라도 더 신뢰받는 기사를 만드는 것이 결국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되는 날에는 내 실력만으로 잘됐다고 착각하지 않고, 안 되는 날에는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
어쩌면 오래 기자로 일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 중 하나가 그런 균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크기의 간판을 달고 일합니다.
그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결국 매일 취재원에게 전화를 걸고, 현장에 가고, 확인하고, 쓰는 사람은 기자 개인입니다.
그러니 너무 좌절할 필요도 너무 냉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할 수 있는 취재를 하고, 한 번 더 확인하고, 어제보다 조금 나은 기사를 쓰는 것.
그렇게 일하다 보면 개인의 이름도 조금씩 커지고, 우리가 몸담은 매체의 이름도 아주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적어도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나이브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