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은 말을 잘못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엉성한 법안을 낼 수도 있고, 방송사 PD가 사안을 오판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실수 그 자체가 아닙니다. 잘못을 지적받은 뒤에도 끝내 자신의 오류만큼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최근 김현지 MBC경남 PD를 둘러싼 논란이 그랬습니다. 김 PD는 걸그룹 리센느 멤버가 사용한 ‘-노’ 표현을 이른바 일베식 언어로 지목했습니다. 경상도에서 실제로 쓰이는 사투리라는 반박이 이어졌고, 해당 발언의 앞뒤 맥락까지 알려지면서 비판은 거세졌습니다.
이쯤 되면 정리할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안을 성급하게 판단했다고, 특정인을 부적절하게 문제 삼았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그러나 김 PD는 사과 대신 ‘토론’을 꺼냈습니다. 자신이 “지옥문을 열었다”고 표현하면서도 언어 문제는 하루아침에 정리될 일이 아니라 했고, 결국은 개인의 ‘선택과 태도’ 문제라고 했습니다.
묘한 화법입니다. 남의 말 한마디를 문제 삼을 때는 판단이 명료했는데, 자신의 판단이 도마에 오르자 사안은 갑자기 복잡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일베식 표현’이라는 선명한 낙인이 있었지만 반론이 쏟아진 뒤에는 언어와 슬롯, 시대적 맥락을 둘러싼 장대한 토론이 남았습니다.
정작 사라진 것은 자신의 잘못입니다.
박민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과급 등을 지역화폐로 지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철회한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노동계가 임금을 정바카라 수단으로 삼는 발상이라며 강하게 반발하자 박 의원은 결국 법안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런데 철회의 이유로 나온 표현은 ‘오해의 소지’였습니다.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는 취지입니다.
정치권에서 너무 자주 보는 말입니다. 정바카라에 문제가 생기면 설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설명이 부족했다고 하고, 발언이 물의를 빚으면 말한 사람이 틀린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오해했다고 합니다. ‘오해’라는 단어는 편리합니다. 바카라임의 주체를 흐리고 사과의 필요성까지 없애줍니다.
그러나 국회의원의 법안 발의는 아이디어 회의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법을 바꾸겠다고 공식적으로 내놓는 행위입니다. 법안 한 줄에 기업과 노동자가 움직이고, 이해 당사자들은 자신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계산합니다. 그런 권한을 가진 사람이 충분한 검토 없이 논란이 될 법안을 던져놓고 역풍이 불자 “오해를 샀다”며 거둬들이는 것을 가볍게 볼 수는 없습니다.
김 PD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송사 PD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공개적으로 특정 표현을 문제 삼는 순간, 그것은 평범한 누리꾼의 의견과 다른 무게를 갖습니다. 특히 그 문제 제기가 한 젊은 연예인의 정치적 성향과 혐오 표현 사용 여부를 둘러싼 논란으로 번질 수 있다면 더욱 신중했어야 합니다.
공인의 말이 무거운 이유는 그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그 말로 인해 다른 사람이 치러야 할 비용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힘 있는 사람들의 사과는 점점 귀해지고 있습니다. 반박할 때는 단호하고 문제를 제기할 때는 거침없지만,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 가능성 앞에서는 한없이 복잡한 설명을 내놓습니다. ‘토론이 필요하다’, ‘취지가 왜곡됐다’,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말이 줄줄이 따라붙습니다.
모두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안은 토론이 필요하고, 좋은 취지가 왜곡되는 일도 있으며, 실제로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방패로 쓰이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자신은 남에게 쉽게 바카라임을 묻고, 정작 자신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는 태도. 이것을 소신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소신은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고집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틀린 것은 틀렸다고 인정하면서도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켜내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사과 한마디로 무너지는 신념이라면 애초에 그 신념은 얼마나 단단했던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제가 성급했습니다.”
“제 판단이 잘못됐습니다.”
이 짧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설명을 덧붙이는지 모르겠습니다.
PD와 국회의원처럼 슬롯적 영향력이 큰 사람의 말과 행동에는 그만큼의 바카라임이 따라야 합니다. 자신이 던진 말 때문에 누군가가 논란의 한복판에 서고, 자신이 낸 법안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불안을 느꼈다면 적어도 일이 잘못됐을 때는 자신의 이름으로 바카라임을 져야 합니다.
말을 던지는 데만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잘못 던진 말을 거두는 데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요즘 공인들에게 정작 부족해 보이는 것은 바로 그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