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울 것도, 친해질 사람도 없다
한국은행을 출입한 지도 어느덧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제 안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점점 굳어졌습니다. 한국은행은 참 재미없는, 활기 없는 출입처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한국은행이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금리를 결정하고 통화량을 조절하는 일은 국가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입니다.
다만 취재처로서의 한은은 생각보다 손에 잡히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결국 핵심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의 금리 결정이고, 그 외에는 경제분석 자료나 통계 보고서가 대부분입니다.
처음에는 그 자료들이 어렵고 낯설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금리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통화량은 어떤 절차로 조정되는지, 중앙은행이라는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하나씩 익혀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무함이 커졌습니다. 어차피 한은 관련 뉴스의 대부분은 금리로 수렴하고, 그 밖의 자료들은 기사로 확장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배치 이후 뭐라도 해보려고 했습니다. 관보도 뒤지고, 정보공개청구 홈페이지도 살피고, BIS·WB·OECD·IMF 자료까지 들락거리며 아이템을 찾았습니다. 정말 작고 짜치는 내용이라도 한은과 연결해 기사로 만들어보려 했고, 실제로 일부 경제지보다 더 디테일하게 한은 관련 기사를 써왔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써도 반응은 거의 없고, 금리 외의 한은 이슈는 좀처럼 확산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파고들수록 성취감보다 무력감이 더 커졌습니다.
결국 ‘여기는 열정을 다해 취재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곳이 아니구나’ 하는 해탈 비슷한 감정에 이르게 됐습니다.
한은 직원들의 분위기도 큰 영향을 줬습니다.
물론 다들 공부를 잘했고, 초엘리트이며, 경제 전문가라는 점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느낀 한은은 지나치게 조심스럽고, 소극적이고, 눈치를 많이 보는 조직이었습니다. 질문을 해도 대답을 피하거나 아예 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언론이 어떻게 움직이고, 기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이해도 크지 않아 보였습니다.
직원은 그렇게 많은데 금리팀 말고 어떤 부서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들이 만든 분석 결과가 실제 국가 정바카라 수립과 입안에 어느 정도 반영되는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수천 명의 직원들이 그들끼리만 공유하는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조용히, 낮은 자세로, 최대한 튀지 않게 움직이는 느낌이랄까요.
무엇 하나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고, 무엇 하나 선명하게 잡히지 않습니다. 취재원을 만나도 기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 않고, 반응도 거의 없다 보니 출입처에 애정을 갖기가 정말 어려운 구조입니다. 한마디로 역대급으로 답답하고, 가슴이 터질 정도로 소통이 안 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기자단 분위기도 아쉬웠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 쓴 적이 있지만, 저는 이렇게 나이브한 기자단을 처음 봤습니다. 매체별 경쟁이 거의 없고, 누가 먼저 통신사, 특히 연합뉴스 기사를 빠르고 그대로 받아쓰느냐를 경쟁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대놓고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출입처는 제 기자 생활 15년 동안 처음이었습니다.
뭔가 열심히 노력해서 쓴 타사 기사는 철저히 무시되는데, 연합 기사는 올라오기 무섭게 수십 곳에서 거의 그대로 받아씁니다. 별로 부끄러워하는 분위기도 없어 보였습니다. 자신만의 문제의식으로 쓴 기사, 필사하거나 아이디어를 얻고 싶을 만큼 좋은 기사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공부할 만한 레퍼런스도, 배울 만한 기자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새로운 출입처에 가면 늘 ‘빠꼼이’ 기자를 빨리 찾으려고 합니다. 인사도 하고, 배우고, 자극을 받으면서 제 역량을 키워왔습니다. 치열하게 사는 기자들을 보며 저도 긴장하고 재미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한은에서는 그런 느낌을 주는 기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다른 기자들과 교류하고 싶은 마음도 잘 생기지 않았습니다.
브리핑 때 질문을 들어봐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문은 기자의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한은 브리핑에서는 질문을 세 개씩 던지면서도 정작 기사로 이어질 만한 핵심은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 ‘나 이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을 취재원 앞에서 보여주기 위한 질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청와대 출입 때 생각이 자주 났습니다. 그때는 대변인 질답 시간에 질문 하나를 하기 위해 정말 공부하고, 마음을 졸이고, 긴장했습니다. 뻔한 질문이나 흐름을 끊는 질문을 하면 뒤에서 기자들이 제지할 정도였습니다. 질문 하나에도 목숨을 거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은은 많이 달랐습니다.
결국 한은은 차분하게 페이퍼를 공부하기에는 좋은 곳입니다. 금리 결정 구조, 통화정바카라 절차, 중앙은행의 조직과 운영을 익히기에는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거시경제는 저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직접 가볼 현장도 없고, 경제학 이론과 보고서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다 보니 이게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체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치열함도, 집요함도 없이 독서실처럼 조용하게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곳. 제게 한은은 그런 출입처에 가까웠습니다.
차라리 이창용 총재 시절이 나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는 좋든 싫든 중앙은행의 역할을 확장해보려는 욕심이 느껴졌습니다. 뭔가를 해보려는 기운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논쟁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차분한 성격의 총재가 오고 나니 한은은 다시 원래의 한은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조용하고, 조심스럽고, 잘 보이지 않는 조직으로 말입니다.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은 할 것입니다. 다만 솔직히 말하면, 한은은 취재원이나 출입처, 동료 기자 선후배에 대한 애정이 생기기 참 어려운 곳입니다.
그래도 이 묘한 분위기는 조금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거시경제를 다룬다고 해서 반드시 절간이나 독서실처럼 일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열심히 공부하고 취재하려는 기자마저 힘이 빠지게 만드는 구조라면, 그건 출입처와 기자단 모두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선후배님들 중 혹시 한은 출입을 고민하는 분이 있다면 한 번 더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일이 없는 곳은 절대 아닙니다. 공부할 것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습니다. 다만 자신의 열정을 다해 취재하고, 치열하게 기사로 승부보고 싶다면, 적어도 제 경험상 한은은 그런 출입처는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