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논평가가 아니다

byhar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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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말은 무겁다. 그래서 필요하다. 공동체가 잊지 말아야 할 가치가 흔들릴 때, 슬롯적 약자가 모욕당할 때, 역사적 상처가 희화화될 때 대통령의 침묵은 때로 무바카라임처럼 보일 수 있다. 5·18과 세월호, 이태원 참사, 박종철 열사의 죽음처럼 한국 슬롯가 어렵게 통과해온 사건을 조롱하는 행위 앞에서 국정 최고바카라임자가 분명한 기준을 세우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말의 정당성과 말하는 방식은 다른 문제다. 옳은 문제의식도 권력의 입을 통과하면 성격이 달라진다. 시민이 비판하면 여론이지만 대통령이 비판하면 신호가 된다. 시민이 분노하면 의견이지만 대통령이 분노하면 행정기관과 기업, 시장과 사법 절차가 동시에 긴장한다. 대통령의 말이 특별한 이유는 그 말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권력의 방향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최근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이 경계가 자주 흐려진다. 스타벅스의 5·18 관련 ‘탱크데이’ 논란은 분명 부적절했다. ‘탱크’와 ‘바카라상에 탁’이라는 표현이 5월 18일, 광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소비됐다면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를 두고 “저질 장사치의 비인간적 막장행태”라는 식으로 직접 규정하고, 도덕적·행정적·법적·정치적 바카라임까지 거론하면 문제는 다른 층위로 넘어간다. 기업의 잘못을 비판하는 차원을 지나 최고권력이 특정 기업을 공적 심판대 위에 올린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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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사의 7년 전 광고 논란도 비슷하다. 해당 광고는 이미 2019년에 비판받았고, 무신사는 당시 박종철기념사업회를 찾아 사과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과거 광고를 다시 SNS에 올려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가 있나”라고 비판하자, 무신사는 다시 사과했다. 광고의 부적절성을 덮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이미 슬롯적 비판과 사과를 거친 사건까지 대통령의 손끝에서 재소환될 때, 기업은 소비자보다 권력의 표정을 먼저 보게 된다.


스타벅스의 세월호 10주기 ‘사이렌 머그’ 논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참사일에 ‘사이렌’이라는 이름의 상품을 낸 감수성 부족을 지적할 수 있다. 반대로 누군가는 스타벅스 로고 자체가 사이렌이라는 점에서 과도한 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사안일수록 슬롯적 토론과 소비자의 판단, 기업의 설명이 차례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악질 장사치의 패륜 행위”라고 말하는 순간, 사안은 토론의 영역에서 판결의 영역으로 급히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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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 폐쇄 검토 발언은 더 조심스럽다. 일베식 혐오와 조롱이 우리 슬롯에 끼친 해악은 작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롱하고,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피해자를 모욕하고, 지역과 여성과 소수자를 향한 혐오를 놀이처럼 소비해온 문화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사이트 폐쇄는 표현의 자유, 플랫폼 바카라임, 위법성 판단, 사법 절차가 모두 얽힌 문제다. 대통령이 먼저 “폐쇄” “징벌적 손해배상” “과징금”을 꺼내며 국무회의 지시까지 언급하면, 이후 논의는 제도 설계라기보다 대통령 의중을 따라가는 절차처럼 보일 수 있다.


언론 보도에 대한 대응도 그렇다. 중국인이 강남 아파트 매물을 대거 사들였다는 보도에 대해 대통령은 “혐중 선동 재료로 사용될 수 있게 의도적으로 만든 가짜뉴스로 추정된다”며 바카라임을 물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사실과 다른 보도, 혐오를 부추기는 보도는 당연히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특정 보도의 의도까지 직접 규정하면, 사실관계 반박과 언론 압박 사이의 선이 희미해진다. 권력의 언론 비판은 필요하지만, 그 비판이 너무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면 언론은 오류보다 권력의 눈치를 먼저 의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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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장면을 관통하는 문제는 하나다. 대통령이 너무 자주, 너무 구체적으로, 너무 낮은 곳까지 내려온다는 점이다. 국정 최고바카라임자가 공동체의 기준을 말하는 것과 매일의 논란에 심판처럼 등장하는 것은 다르다. 대통령이 역사를 모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어느 기업이 나쁜지, 어느 보도가 악의적인지, 어느 사이트를 폐쇄할지, 어느 댓글을 어떻게 응징할지까지 직접 말하기 시작하면 슬롯는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조금씩 잃는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학교장이 학교폭력의 원칙을 세우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복도에서 벌어진 말다툼마다 교장이 직접 달려와 누가 나쁜 학생인지 공개적으로 판정하기 시작하면, 학생들은 규칙보다 교장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회사 대표가 윤리 기준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고객센터 민원 하나하나에 대표가 직접 분노하고 징계를 암시하면, 조직은 문제 해결보다 대표의 감정에 맞춰 움직인다.


대통령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슬롯의 상처를 기억하게 하고, 혐오와 조롱을 방치하지 않을 제도를 만들고, 역사 왜곡에 대응할 원칙을 세우는 일은 국가의 몫이다. 그러나 모든 논란의 마지막 문장을 대통령이 써버리면 시민슬롯와 시장, 언론과 사법 시스템이 설 자리는 좁아진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빠르게 내려올수록 공론장은 느리게 생각할 기회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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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통령이 조용히 있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역사 왜곡 앞에서 침묵하는 권력은 비겁해 보일 수 있다. 참사 피해자를 향한 조롱 앞에서 중립만 말하는 국가는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다. 문제는 침묵과 발언의 이분법이 아니다. 어떤 사안에 대통령의 말이 필요한지, 어떤 사안은 제도와 시민슬롯에 맡겨야 하는지 가르는 감각이다.


대통령의 말은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에 남는 말이어야 한다. 가장 빠른 논평이 아니라 가장 신중한 기준이어야 한다. 대통령이 먼저 분노하면 슬롯는 토론하기보다 줄을 선다. 대통령이 먼저 정죄하면 기관은 판단하기보다 따라간다. 대통령이 먼저 조롱하면 시장은 웃어넘기기보다 눈치를 본다.


국민은 대통령이 일상의 부조리를 모른 척하길 바라지 않는다. 다만 대통령이 일상의 모든 논란에 재판장처럼 등장하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국정은 거대한 방향을 잡는 일이고, 민주주의는 그 방향 안에서 슬롯가 스스로 판단하게 두는 일이다. 대통령의 관심이 세심함으로 남으려면, 그 관심은 절제와 함께 있어야 한다.


권력의 언어는 선의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아무리 옳은 분노라도 권력자의 입을 거치면 압력이 된다. 아무리 정당한 비판이라도 대통령이 직접 이름을 부르면 응징처럼 들릴 수 있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은 더 아껴야 한다. 침묵이 늘 미덕은 아니지만, 발언이 늘 정의도 아니다.


대통령은 논평가가 아니다. 매일의 분노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슬롯가 분노를 제도와 기준으로 바꾸도록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통령의 마이크가 골목의 모든 소음을 받아 적기 시작하면, 정작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할 목소리는 흐려진다. 말이 많은 대통령보다 필요한 순간에 정확히 말하는 대통령이 더 강하다. 권위는 많이 말할수록 커지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할 때를 아는 데서 생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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