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동 스피카

할아버지의 그림자를 다르게 살아가기

어머니는 전화를 끊기 전, 늘 숙제 하나를 남기신다.


"아들, 술, 여자, 노름… 항상 조심해야 한다."


수십 년째 반복되는 그 말의 진짜 수신인은 내가 아니다. 내 안에 일찌감치 자리 잡고 앉아 있는 한 남자의 그림자, 나의 할아버지다. 동네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 있었다. 홍동 스피카. 스피커 철자도 몰랐을 시절, 그 이름은 정확했다. 홍동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며 이 집 소식, 저 집 소식을 실어 나르던 살아있는 확성기.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소문이 피어났고, 그 에너지는 마을 전체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고작 세 살이던 해에 세상을 떠나셨다. 기억 한 조각 남아있지 않은 분이지만, 우리 사이엔 기묘한 인연이 하나 있다. 생일이 같다.


내가 첫 돌잔치를 맞던 날, 할아버지는 환갑을 맞으셨다. 두 개의 생일상이 한 날 한 자리에 겹쳤지만, 주인공은 하나였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날을 꺼내면 목소리가 조금 낮아지신다. 제 자식의 첫 돌보다 시아버지의 환갑이 먼저였던 시대. 그 부채감이 평생 어머니의 가슴 한켠에 얹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진짜 걱정은 따로 있었다.


나를 낳고 보니, 핏줄이라는 게 참 무서웠다. 나는 할아버지와 생김새가 판박이였고, 자라면서 드러나는 기질마저 묘하게 닮아 들어갔다. 옛날 기준으로 할아버지에겐 세 명의 할머니가 있었다. 첫 번째 배우자와 사별하고, 두 번째, 세 번째까지. 술과 도박과 여자를 지독히 좋아했던, 호방하고도 위태로운 풍류객. 거기에 13년 동안 동네 이장을 지내며 남의 대소사에 발 벗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마당발까지. 조율되지 않은 에너지는 홍동 마을 전체를 환하게 밝혔지만, 정작 당신의 삶은 조금씩 갉아먹혔다.


할아버지의 인생철학은 단 한 문장이었다.


"먹고 갈래, 지고 갈래?"


그 질문 앞에 할아버지는 언제나 호기롭게 외치셨다고 한다. 먹고 갈래.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삶. 쌓기보다 발산하는 삶.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연소시키던 그분은, 환갑을 겨우 넘긴 나이에 간암으로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가 수화기 너머로 던지는 그 경고는, 결국 기도다. 홍동 스피카의 DNA가 내 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할아버지를 닮은 눈매를 가진 아들이 혹여나 그 호탕함의 덫에 걸려 제 수명을 깎아 먹을까 봐, 어머니는 매번 당신의 시아버지를 조심하라고 아들에게 이르고 계신 것이다.


나 역시 나이를 먹어가며 문득문득 그 뜨거운 기운을 느낀다. 사람이 좋고, 재미있는 것에 끌리고, 대바카라 없이 호기를 부리고 싶어지는 순간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안에 앉아 있는 그 남자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조금 다른 방식을 택하고 싶다. 호기심과 에너지는 글과 그림으로 발산하고, 13년 이장의 오지랖 대신 국세청 경력 23년을 세상에 필요한 선한 영향력으로 바꾸어 내는 것. 홍동 스피카의 목소리는 이어받되, 그 목소리가 향하는 곳만 바꾸는 것.


오늘도 어머니의 잔소리를 아프지 않게 삼키며 속으로 대답해 본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저는 잘 먹고, 또 잘 지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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