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바카라 읽기 1>(26-30)
탄생의 외침은 저마다 다른 인생길을 걸어가는 그 처음을 알리는 신호다. 그렇게 조금씩 인생의 충전도를 소진해 가다가 마침내 그 잔량이 완전히 사라지면 죽음의 문턱을 넘게 된다. 그제야 한 인생의 총량을 가늠할 수 있다.
초고령화 슬롯에 진입하면서 100세 시대가 열렸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이 말은 노후에도 건강이나 재정 관리를 잘 하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불안을 더 고조시키는 면이 더하다. 자족하며 살 수 있는데도 100세까지 살려면 그것으로는 안된다는 결핍에 사로잡힌다. 지금에 여유를 부릴 수 없게 한다. 돈을 계속 벌면서 쌓아가야 한다는 초조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이 들어갈수록 녹록지 않다는 현실과 더불어 연약해져가는 육체 앞에서 그것이 더 멀어진 것을 보고 좌절하기도 한다. 돈을 좇아 죽을 때까지 이러고 살 것인가? 태어난 의미조차 찾지 못한 채 말이다.
한 지인이 고 백인천 감독의 소천 소식을 듣고는 자기가 좋아했던 스타라면서 고인의 명복을 바란다. 그러면서 자신의 나이를 대본다. '이제 20년도 안 남았네요...' 그 소식이 있던 날 그의 친구 하나가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한다. 그 비교로 풀어 보자면 그가 가진 인생의 예측 잔량 20년은 그 즉시로 소멸하게 된다. 인생의 생로병사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지경에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지 몰랐던 그대로 죽음도 그러하다는 것은 변치 않는 자연의 섭리다.
이렇듯 아무도 내 인생의 총량이 몇인지 알지 못한다. 김영민 교수는 이 허무의 대안으로 고작(?) '목적 없는 산바카라'을 말한다. 100세까지 사는 데 있지 않다. 지금의 일상에 있다. 10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박경리 선생은 그때 지금을 살아간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자주 다니는 S 도서관에서 올해가 '고 박경리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라는 것을 보고, 박경리 선생을 <토지 1>로 첫 만남을 가진 이후다. 유한한 인생을 살다가는 인생들 중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이는 흔하지 않다. 박경리 선생이 그중 한 분이라는 사실 앞에서 나는 더 이상 그녀와의 만남을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지 못한다.
1권짜리 바카라으로 살짝 표만 내자는 내 얄팍한 마음을 억누르고, 그녀의 대하 장편소설 20권짜리, 장장 26년에 걸쳐 썼다는 <토지>를 만나기로 한다. 마치 66권의 성경 바카라 앞부분만 발해지는 것처럼 몇 번을 시도하다가 토지 1권 초입에서 빙빙 돌았던 아픈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그대로 둘 수 없다. 요 근래 마침 종이바카라, 전자바카라, 오디오북을 가리지 않는 하이브리드 독서로 전환한 것도 이 만남에 힘을 준다. 전자바카라으로 드라마 보듯이 음미하며 그 장정을 시작한다.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중학교 시절 이광수 선생의 <유정>, <무정>, <흙>, <사랑>에 연이어가면서 푹 빠졌던 그때의 익숙한 내음이 느껴진다. 선생의 친일 이슈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면서 안타까워했다. 하나 그의 작품이 내 어릴 적 마음에 바카라을 좋아하게 하는 씨앗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향수가 겹쳐진다. 마침내 나는 박경리 선생의 안내를 따라 그녀가 오랫동안 구축했다는 20층 건물의 1층을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1897년 한가위,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어느 마을(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平沙里)')에서 시작되는 대하소설이다. 그 해에 고종은 대한 제국을 선포한다. 그로부터 이 이야기는 1910년 경술국치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시공간 이동에도 이번에 멀미 증상은 없었다. 오히려 마치 내가 그곳에 같이 살았던 사람들 중의 하나로 여겨질 만큼 친근하다.
350페이지짜리 소설 한 권과 비교한다면 이제 겨우 10~11페이지를 본 것과 같다. 이것만으로 이 대장정의 길을 잘 나섰다 싶다. 마지막 20층까지 다 돌아보았을 때 그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 역사의 격동의 현장이 세밀하게 내 기억 속에 저장될 것이다. 박경리 선생이 아니었다면 그냥 몇 줄로 넘겼을 그때를 다양한 사람들의 말과 심리와 환경들을 통해서 말이다. 권권마다 매듭을 지어 보려 한다. 마침내 20개가 다 만들어지는 그날을 기대하며. 분명한 것은 한 작가와 최장으로 만나는 내 독서사의 어쩌면 유일한 기록이 될 터이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 헤리의 반려바카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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