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 형성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별히 기분 나쁠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랬다. 이런 경우는 보통 몸이 피곤할 때다. 그래서 돌아보니 과연 지난밤에 잠을 거의 못 잤다.
시작은 첫째 아이였다. 새벽 1시 30분 즈음 첫째가 화장실 가고 싶다며 날 톡톡 두드려 깨웠다. 전날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선지 온몸이 무거웠다. 그러나 아이가 급하다고 해서 벌떡 일어났다. 일을 마치고 휴대폰 좀 보다가 다시 까무룩 잠들었는데 이번엔 3시쯤, 다시 첫째가 나를 깨웠다. 모기 물린 곳이 너무 간지럽단다. 약을 발라줬더니 약이 닿은 부분의 옷이 축축해져서 갈아입고 싶다고 했다.
직접 만져보면 옷이 젖은 게 아니라고, 괜찮다고 해도 아이에겐 가닿지 않는 듯했다. 투정을 부리며 칭얼거리는 실루엣이 괜히 얄미워 보였다. 그래도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이리 오라고 하니 저 멀리 눕고는 엄마가 싫다고 했다. 아휴. 다른 곳을 보니 문득 감기에 걸려있는 둘째가 배를 훤히 내밀고 자는 게 보였다. 내복을 내려주고 시원한 냉감 이불로 배만 살짝 덮어주니 10분 정도 뒤에 둘째가 짜증 내며 소리쳤다.
"아, 엄마 진짜 싫어!"
둘째가 울자 간신히 잠 들어가던 첫째도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아. 업보일까...' 지난 세월 부모님께 해왔던 투정을 이렇게 돌려받나 싶었다. 아이들을 겨우 토닥거려 재웠더니 새벽 4시였다. 6시 30분에 알람이 울렸지만 눈이 안 떠져서 또 한참 끙끙댔다. 유아 두 명의 아침 식사와 등원 준비를 마치고, 한 명은 인근 지역에 있는 소아과에 데리고 다녀왔더니 이미 하루가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전 10시쯤이었나, 기분을 환기하려고 청소를 하고 몸도 좀 움직여 봤는데 별 소용없었다. 결국 그냥 누워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지친 몸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치유 방법이었다.
징글 징글한 사랑이다. 영원히 사랑할 상대가 생기니 오히려 사랑이 마냥 예쁘게만 생기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사랑한다는 건 애초에 신체든, 시간이든, 마음이든 상대와 가까이 닿는 일인데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힌다. 그리고 사실 사랑은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 촘촘하게 엮었다고 생각한 관계가 부딪혀 틈이 생기면 이를 메우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껴안고, 맛있는 음식,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다. 그래도 어떤 틈은 영영 메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게 사랑이란 걸, 이제야 알겠다.
구멍이니 틈이니 하는 것들은 특히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왔을 때 부정적으로 묘사되기 쉬운 듯하다. 메우려고 애쓰게 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틈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히 낭만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볕뉘'는 어떤가. 길을 걷다 나뭇잎 사이로 비친 빛을 보면 잠시나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만약 달이 해에 가려지는 일식이 일어나면 볕뉘의 아름다움은 더욱 선명해진다. 평소엔 둥글게 나타나던 빛이 초승달 모양의 빛으로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측면에서 볕뉘는 여러모로 특별한 일이다. 일단 볕뉘가 나타나는 건 핀홀 카메라의 원리 때문이다. 나뭇잎 사이의 작은 틈 하나하나가 렌즈 없는 카메라가 된다. 아주 작은 구멍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온 빛이 뒤섞이지 않도록 가려 주고, 그 덕분에 태양의 모습이 반대편에 다시 맺힌다. 광학에서는 이렇게 빛이 만들어낸 물체의 모습을 상(像)이라고 한다. 상은 원래의 모습과는 달리 180도 뒤집혀 맺히지만, 그럼에도 원래 물체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볕뉘는 단순한 빛무늬가 아니라, 나뭇잎 사이의 수많은 핀홀이 만들어 낸 작은 태양들의 형상이다. 우리는 나무 아래에서 그림자와 태양의 상이 함께 드리운 풍경을 걷고 있는 셈이다.
볕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다 보니 틈 많은 사랑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상대를 향한 뜨거운 진심이 조금 소원해진 사이로 쏟아진다. 다행히 사랑하는 사이에 생긴 작은 구멍 사이로도 원래 있었던 진심의 형태가 반대편에 다시 드러날 때가 있다. 물론 그렇게 재현된 진심이 처음 기대했던 모습과는 조금 달라지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뒤집혀 보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 감정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아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이에 틈이 생긴 날, 숨을 고르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올려다보는 상상을 해봤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결국 구멍 많은 이 징글징글한 사랑이, 실은 숨 쉬어가며 오래 마음에 굴리는 감정인가 싶다.
다시 밤이 되었다. 아이들이 옆에 나란히 누워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최근에 배운 노래를, 오늘 하루에 대한 평가를 종알종알 떠들었다. 그러다 아이 중 하나가 말했다. "나는 엄마가 정말 좋아!" 그러자 다른 아이도 말했다. "나도! 나도 엄마를 정말 사랑해!" 그렇게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남편에게 메시지가 왔다. '밖이 선선해서 문을 조금 열어 두었어. 너랑 아이들이 있는 방은 너무 닫으면 더울 것 같아서 조금만 열어둘게.' 잠들기 전까지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사랑한다고 종알거리는 그 입들에서 사랑을 이어갈 힘을 얻는다.
징글징글한 사랑을 한다. 처음과 모양은 조금 달라졌어도, 그 빛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