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서 온 미래

광년

by미지의 세계

요즘은 별을 공부하고 있다. 공부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아무튼 상당히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며칠 뒤에 일하는 공간이 바뀌는데 그곳에서 우주와 관련된 해설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 일하는 곳은 돔 형태로 된 특수 상영관으로 여러 행성들을 가까이서 실감 나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다. 계절별 별자리나 행성에 대해 짧게 해설도 하고 가끔은 해설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한다. 무슨 일이나 처음 시작할 때 긴장되긴 하지만, 고가의 장비와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어떤 해설을 기획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이 된다. 기계와 친하지 않은 사람인지라 더더욱.


사실 팀이 바뀌자마자 단독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할 일은 없다. 이전에 일하던 동료들이 만든 대본을 읽고 정해진 대로 프로그램을 상영하면 된다. 그런데도 마음에 계속 긴장감이 있는 이유는 '정말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설령 그게 욕심일지라도, 쉽게 긍정되는 류의 열망이라 기꺼이 얽매이게 된다. 부담감을 잘 풀어내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에게 달려있다. 이번에도 잘 해내봐야겠다.


해설을 듣든, 관련 도서를 읽든 막연하게 호기심만 있던 영역이 이해되는 영역으로 바뀔 때의 쾌감을 안다. 그런 즐거움을, 적어도 이 상영관에 들어오는 분들께는 알려드리고 싶다. 물론 내가 소리 내어 읽을 내용을 정말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도 있다. 아무튼 그래서 자발적으로 공부도 하고 이런저런 고민을 해보는 중이다. 실질적인 경험이 쌓여야만 이 실체 없는 불안도 끝날 것이다.



별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접하게 되는 개념이 '광년'이다. 광년은 빛이 1년 동안 이동하는 거리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올려다보는 별들조차 빛의 속도로 평생을 달려야 겨우 닿을까 말까 한 곳에 있다.​ 한마디로 우리가 보는 별빛은 대부분 먼 과거로부터 온 빛인 셈이다. 어떤 별은 이미 소멸해 사라졌음에도, 지구에서 별이 관찰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현재라는 시간 안에 여러 시간이 겹쳐 있는 것만 같다.​​



과거가 지금에 닿는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연의 일치지만 과거의 일을 최근에 다시 겪다시피 한 일이 있었다. 지금은 포기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 육아일기를 열심히 썼다. 그걸 아이들 돌 무렵에 바카라으로 제본해 보니 한 아이당 7권씩 나왔다. 각자 아이들의 돌잔치 때 장식해 뒀다가 이후 가지런히 바카라장에 꽂아뒀더니 이제는 5살, 3살이 된 아이들이 자기 바카라이라며 재미있게 꺼내 읽는다. 아직 글씨는 못 읽으니까 함께 첨부한 사진을 보면서 좋아한다.


아이들이 읽어달라고 해서 몇 장 소리 내서 읽는데 문득 울컥하고 말았다. 출산과 육아를 처음 경험하며 느낀 혼란과 기쁨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당시엔 잠이 부족해 늘 고단했는데, 그 틈사이로 삐죽삐죽 굳세게 자라던 모성애가 보였다. 그래, 내게도 아이의 잇몸 웃음,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움직임에 웃었던 날들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아이들에게 세수하러 가자고, 옷 갈아입자고 소리를 치지만. 그 어떤 강렬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기록으로 남은 과거의 조각은, 비록 그게 당시의 모든 느낌을 완전히 옮겨두지는 못했을지라도, 시간 여행을 하듯 과거로 순식간에 끌고 간다. 덕분에 바카라에서 눈을 떼었을 때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미지를 기록하는 게 쉬운 요즘은 영상과 사진으로 좀 더 직접적인 과거를 남길 수 있다. 내게는 할아버지 (아이들에게는 외증조 할아버지)가 첫째 아이를 업고 천천히 걷는 영상이 있다. 그걸 촬영할 때 할아버지는 '늙은이를 뭐 하러 찍냐.'라고 하셨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그 영상은 남아있어서 다행인, 매우 소중한 기록이 되었다. 단순히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자는 게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수십 년을 건너 만난 두 사람이 한 화면 안에 있는 것이 돌이킬수록 귀하다. 아이는 너무 어려서 외증조 할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앞으로 더 희미해지겠지만 어느 날 이 영상을 보면 자기도 몰랐던 과거의 한 순간으로 이동할지도 모른다. 기억하지 못 하는 순간에 조차, 기억 못하는 누군가로부터도 사랑받는 사람이었다는 걸 미래의 아이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다시 하늘을 본다. 해가 지고 나면 별들이 떠오른다. 과거에서 출발한 빛이 오늘의 나를 비춘다. 글 한 편, 사진 한 장, 짧은 영상처럼 지금을 남기는 일은 그저 오늘을 붙잡아 두는 기록일 뿐이지만, 시간을 건너 누군가의 현재에 닿는 순간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결국 과거를 마주한다는 건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더 소중히 살아가게 되는 일이다. 광년을 건너온 별빛처럼 과거는 오늘도 미래의 우리에게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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