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다르단다

맥락 의존성

by미지의 세계

연휴처럼 과학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덩달아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다.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니 복잡한 데다가 시선을 빼앗는 여러 전시물들이 있으니 종종 어른의 손을 놓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주변에 아는 얼굴이 없으니 순식간에 겁에 질리고 만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보통 과학관 직원들은 미아를 보면 이렇게 행동한다. 일단 아이를 달래며 어느 방향에서 걸어왔는지 묻는다. 어차피 그쯤 되면 보호자도 아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아이와 천천히 왔던 방향을 되돌아가며 엄마나 아빠, 혹은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찾아보자고 말한다. 걸으면서 아이의 신상을 파악한다. 이름, 나이, 누구랑 왔는지, 같이 온 어른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이런 걸 묻는다. 가만히 멈춰 있을 때보다 조금 걸을 때 대화가 잘 되는 느낌이다. 안심시키기 위해 아이의 등이나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도 있다. 아이가 원하면 손을 잡기도 한다.


"선생님이랑 한번 돌아보고, 그래도 어른 못 찾으면 방송할 거야. 그러면 금방 우리 ㅇㅇㅇ 찾으러 오실걸?"


이런 식으로 위로를 하며 걷다 보면 방송하기 전에 금방 보호자를 만난다. 사색이 되어 두리번거리는 어른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잘 모른다. 아이가 먼저 뛰어가 안기면 그제야 눈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미아를 금방 가족의 품으로 보냈다. 다행이면서 감동적인 순간들이다.



그런데 최근에 만난 아이는 그 모든 방법을 무력화하는 아이였다. 아이는 숨죽여 울면서 눈물만 겨우 훔치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니 처음에는 길을 잃은 아이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자꾸 안내데스크 주변을 맴돌았다.​ 유심히 보다 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하고 아이 곁으로 갔다.


"안녕, 친구야. 엄마, 아빠 잃어버렸어? 너 누구랑 왔어? 왜 혼자야?"


아이는 경계하면서 고개를 가로젓고 도망가버렸다. 그런데 멀리 가지는 않고 내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만 가서 서있었다. 결국 아이를 계속 쫓아가며 겨우 아이의 나이와 이름을 알아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끝내 이후 질문에 모두 답하지 않고 내 손길도 완강히 거부했다.


"음, ㅇㅇㅇ가 지금은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기 싫구나? 선생님은 여기 직원이야. (사원증을 보여주면서) 널 도와줄 수 있어. 혹시 선생님이랑 엄마, 아빠 찾고 싶으면 이리 와. 선생님 저기 안내데스크에 가 있을게."


원래는 그러고 아이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나, 아이는 옷이 다 젖도록 울면서 안내 데스크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다시 다가갔다.


"안 되겠다. 같이 가보자. 그래도 찾아봐야지."


결론적으로 아이는 아버지를 찾았다. 그 아버지는 아이 어깨를 홱 잡아챈 다음 나를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봤다가, 유니폼과 사원증을 보고는 표정이 풀어졌다. 머쓱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요즘 유아들이 읽는 안전 서적 같은 걸 보면 아이들에게 길을 잃었을 때에는 1)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고 2) 낯선 어른이 가자고 하면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가르친다. 친근한 척 나쁜 의도를 가진 어른들을 피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누가 봐도 여기 직원이었는데.... 어떤 모습이었든 간에 길 잃은 6살 아이에겐 무섭고 낯선 어른이었던가보다. 하긴 그 부모님도 순간이지만 나를 잔뜩 경계했으니. 만약 우리 아이가 이런 상황이었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했을지 생각이 많아졌다.


꼭 해야 하지만 매번 어렵다고 느끼는 게 바로 이런 주제의 이야기이다. 어린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들 말이다. 가장 좋은 건 원칙과 예외를 설명해 주는 것일 테지만, 아직 어린아이가 이 모든 내용을 이해하는 건 한계가 있다. 아무리 똑똑해 보여도 애는 애니까. 그래서 가장 원칙적인 문장 하나만을 심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엄마 아빠가 말해준 사람 아니면 절대 따라가지 마. 아는 얼굴이어도.' 같은 것들.



과학에서도 어떤 결과를 이해할 때 그 결과만 떼어놓고 보지는 않는다. 같은 현상이라도 어떤 조건에서 관찰했는지, 주변 환경은 어땠는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현상이 그것을 둘러싼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맥락 의존성이라고 한다. 현상만 보면 같은데, 맥락을 함께 보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려면 그 현상이 일어난 자리까지 함께 살펴봐야 할 때가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유니폼과 사원증을 걸고 안내데스크에서 일하는 직원이라는 맥락이 있었지만, 그 아이에게는 엄마 아빠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갑자기 말을 걸어온 낯선 어른이라는 맥락이 있었다. 같은 사람을 보고도 서로 전혀 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그 아이가 왜 나를 경계했는지 뒤늦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에게는 내가 직원이라는 정보보다, 낯선 어른이라는 인상이 훨씬 선명했을 것이다.​


그럼 과연 그 맥락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아이가 성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상황을 습득하고 맥락을 이해할 날이 올까. 그럴 수 있지만 엄마의 입장에선 자꾸 조급함이 든다.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을 조바심 내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일 텐데, 이상하게도 기꺼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다. 뉴스를 통해서, 혹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실제로 위험에 직면했던 사례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나는 크면서 여러 번 어른들 없이 위험 상황에 노출되었었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더욱 그랬다. 등굣길에 태워다 주겠다며 자기 트럭에 타라고 한 낯선 아저씨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땐 순수하게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거절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찔하다. 하교 길에 느닷없이 뒤에서 껴안고 간 아저씨도 있고, 아무튼 여러 위험한 순간들을 겪으며 자라왔다. 또래 여성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니 차이는 있어도 어릴 적 이런 식의 크고 작은 위험 상황에 노출된 적이 다들 있다고 해서 놀랐었다. 시대가 바뀌고 상황도 바뀌어 이제는 그런 일들이 많이 줄었다지만 그래도 과거의 경험들이 나를 자꾸 조급하게 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평생 노출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까지 다 알려줘서 괜한 두려움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은데... 여러모로 어렵다.


맥락과 변수가 많을 땐 가장 변하지 않는 한 가지만을 꼭 붙들어 매고 나아가는 게 방법일 테다. 결국 아이들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수많은 상황 중에서 가장 단순한 것들만 남겨 강조하기로 한다.


길을 잃으면 그 자리에 있어라. 모르는 어른에게는 대답하지 말아라.


지금은 그 정도만 가르치고, 아이가 조금 더 크고 나면 추가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다른 것도 있단다. 네게 다가오는 어른을 잘 살펴보렴.

이전 23화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