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마시멜로우를 생각하며

취성 파괴

by미지의 세계

일하는 과학관에서 새로운 실험쇼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시간이 좀 남아서 구경하러 들어갔더니 동료가 액체 질소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실험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액체 질소는 질소 기체를 영하 196°C까지 냉각시켜 액체 상태로 만든 것이다. 상온에서는 다시 기화하는데 주변의 수분이 응결해 실험 내내 뭉게뭉게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실험쇼 진행자는 관람객 중 한 명을 불러서 망치를 들고 있게 했다. 그리고는 말랑말랑한 마시멜로우를 액체 질소에 넣었다가 뺐다.


"자, 이제 망치로 마시멜로우를 내리치세요!"


탕, 아이가 가볍게 내리친 망치질에 마시멜로우가 산산조각 났다. "우와"하는 감탄 소리가 들렸다. 시원한 파괴음 덕분에 잠시 동안이나마 더위마저 날아간 것 같았다.



평소에 유연한 것도 극단적인 조건에 놓이면 성질이 바뀔 수 있다. 그것을 과학 용어로는 취성 파괴라고 한다. 물론 물도 얼음이 되면 깨질 수 있으니 물질의 성질이 변하는 일 자체는 신기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걸 극적으로 만드는 건 변화의 속도다. 불과 5초 전만 해도 말랑하던 것이 갑자기 단단해져 깨져버리니, 물이 얼음으로 변해 깨지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생각해 보면 인간관계에서도 서서히 바뀌는 사이보다, 갑자기 생기는 변화에 대해 더 거센 감정이 일어난다. 서서히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인연은 그냥 쌓인 시간 자체가 서사라서 해석이 필요 없다. 그러나 갑자기 틀어진 사이, 갑자기 빠져든 무언가를 설명하려면 더 많은 말과 감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이렇게 만든 극단적인 조건이 무엇인지 찾아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최근에 딱딱해진 마시멜로우를 다시 떠올릴 일이 있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동료가 좋지 않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 오늘 자원봉사 온 친구 태도가 너무 불량하네요. 서 있으라고 해도 계속 앉아서 핸드폰만 하고."


특별할 일은 아니었다. 말이 나와 말이지만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임에도 봉사자들은 정말 다양한 태도를 보여준다. 직원보다 더 열심히 해서 오히려 '쉬엄쉬엄 하셔라', '목마르진 않냐'며 나서게 되는 분들이 있고, 반대로 '이렇게 하시면 봉사 시간을 드릴 수 없다'라고 압박해야만 하는 불성실한 분들도 있다. 그럼에도 그분들은 어쨌든 금전적 대가 없이, 시간을 내 주신 고마운 분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달라고 할 수 있는 정도가 정해져 있다. 그저 직원들끼리 감탄하거나, 아쉬워하는 게 다다.


이런 상황이니 평소처럼 동료에게 적당한 위로를 건네고 다시 업무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틀 뒤, 다시 동료가 그때 그 봉사자 이야기를 꺼냈다.


"알고 보니 그분이 오전에는 다른 팀에서 봉사활동 하고 넘어온 거더라고요. 계속 서 있었다던데, 그래서 그랬나 봐요. 알고 나니까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돼요."


그제야 그저 불성실했던 누군가가 이해할 여지가 있는 봉사자로 다시 다가왔다. 그가 정말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를 기억하는 직원들의 태도는 조금 부드러워진 셈이다. ​이처럼 어차피 누군가를 이해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그가 유독 튀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아는 게 낫다. 미워하든지, 미움 받든 지 모두 에너지가 드는 일이지만 배경을 알고 납득이 되면 그 에너지가 훨씬 줄어들 수 있다.


이런 고운 마음을 자기 자신에게도 베풀면 좋으련만, 사실 그러기는 또 쉽지가 않다. 극한에 내몰린 사람들은 스스로가 그런 상태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주변에서 오히려 먼저 알아차리기 쉬운 것 같기도 하다.


처음 슬롯생활을 할 때, 당시 회사 건물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매일 에너지 드링크를 사서 마셨다. 그때 나의 성격은 차분한 편이었는데, 긴장하면 더욱 경직되어서 딱딱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신입 여자 직원들에게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은 좀 더 통통 튀고 밝은 성향이라고 느꼈다. 게다가 당시 했던 일이 리포터이니, 비록 뉴스에 나올지라도, 적당히 밝고 늘 웃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에너지 드링크를 시작으로 커피도 계속 달고 살았었다. 출근할 땐 걸그룹 노래 위주로 듣기도 했다. 모두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렇게 몇 달 지냈는데 하루는 회사 선배한테 에너지 드링크를 따는 모습을 들켰다.


"너는 에너지드링크를 엄청 좋아하는 거야? 아침마다 맨날 마시네. 근데 그러고 커피도 하루 종일 마시잖아. 괜찮아?"


차마 그 모든 사정을 말할 수 없어 그냥 웃고 얼버무렸다. 카페인으로 기분을 띄우는 일은 업무가 익숙해지면서 사라졌지만, 아무튼 꽤 오랫동안 이어졌던 나만의 고군분투였다. 그렇다고 그게 서러웠던 건 아니다. 그냥 웃고 넘기는 추억 정도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엊그제 우연히 남편과 다시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관점을 보게 됐다.


"그거 되게 불쌍하다. 노동력만 제공하면 되는데 감정까지 조절해서 맞추는 거잖아. 나는 못 할 것 같아."


남편의 말을 듣고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랬나? 사무실 분위기를 담당해야 할 것만 같은 젊은 여성,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프리랜서 신입... 그 모든 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가운 조건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동안은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만큼은 거의 처음으로, 극한의 시간 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나를 안아주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주변이 바뀌었다. 아침에 출근을 하려고 하는데 문득 날씨가 선선해져 숨쉬기 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꼭 날씨뿐만 아니라 슬롯 경험이 쌓이고 가정을 이루면서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나니 이제야 나와 주변을 돌아볼 힘이 있는 것 같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꽁꽁 얼은 마시멜로우를 생각한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극한에 몰린 마시멜로우를 만나도, 다시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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