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공전
동네 놀이터에서 놀다가 아이 친구 가족을 만났다. 아이들끼리 친하기도 하고 이전에도 몇 번 함께 주말을 보낸 적이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간식도 나눠 먹는데, 아이 친구의 아버님이 말했다.
"곧 우리 ㅇㅇ이 생일인데 같이 식사하러 오세요."
우리 아이가 받은 첫 생일 파티 초대였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 날 남편이 말했다.
"생일 파티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유를 묻자 여러 이야기가 나왔지만 곧 하나의 생각으로 정리됐다.
"나는 생일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이 아니잖아. 우리가 생일이라고 부르는 날짜도 사실은 정확히 태어난 날이 아니고. 지구의 공전은 딱 365일이 아니니까 말이야. 지금은 네가 원하니 케이크에 불은 붙이지만 여전히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 우리 아이도 나중에 스스로 원하게 되면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생일 파티 문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파티가 예정된 주말에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결국 초대는 정중히 거절하기로 했다.
과학적인 면에서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구의 하루를 만드는 자전도, 일 년을 만드는 공전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딱 떨어지지 않는다. 지구의 자전은 평균 24시간, 공전은 약 365.2422일이다. 우리가 편의를 위해 만든 달력과 조금씩 어긋난다. 그 작은 오차를 윤년으로 보정하면서도 우리는 같은 날짜에 다시 생일을 맞는다.
그러나 사람은 사실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생일은 1년 중 하루,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애정을 확인하는 자리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들뜬 기분으로 지내도 괜찮은 날이다. 혹여 실수를 해도 봐줄 사유가 될 정도다. 아무리 우주의 역사가 유구하다고 해도, 자기 생보다 소중한 우주는 없다. 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태어난 날이 곧 세상이 시작된 날이다. 그 시작을 기념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일까.
꼭 화려하지 않아도 생일은 여러 따스한 기억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는 건 분명하다. 초등학교 때는 부모님이 집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주셨다. 친구들을 초대하기로 한 전날이 되면 맞벌이를 하고 돌아온 부모님이 피곤한 얼굴로 풍선을 불어 붙이고 집을 꾸몄다. 어머니가 양손 가득 사 온 음식들과 알록달록 풍선을 보는 건 매번 마음도 부푸는 일이었다. 어머니가 분주히 음식 준비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셨고, 글씨도 아주 잘 쓰셨다. 그 솜씨를 알 수 있는 날이 바로 자녀들의 생일 파티 전날이었다. 그는 손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들을 그리고 축하 메시지를 적어 벽에 붙였다. 캐릭터들은 각자의 말투로 생일을 맞이한 아이를 축하해 주었다. 내 생일날에는 인어공주를 괴롭히던 마녀가 벽 한쪽에 붙어있었는데 그녀의 대사가 지금도 기억난다.
'뭐라고? ㅇㅇ 공주의 생일이라고? 축하한다. 호호호'
그 그림은 볼 때마다 웃겼다. 그래서 다음날 파티에 온 친구들을 한 명씩 벽 앞으로 데리고 가 함께 그림을 보며 웃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쾌한 기억이 남아있다.
그렇다고 생일이 늘 좋은 기억만 남긴 것은 아니다. 역시 초등학생 때였다. 오전에는 내 생일 파티가, 오후에는 같은 반 친구의 파티가 예정돼 있었다. 반 친구들은 우리 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함께 이동했다. 다른 친구의 생일파티는 유명한 피잣집에서 열렸지만 아이들은 준비된 음식을 절반도 채 먹지 못했다.
"이전 생일 파티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요."
해맑은 어느 친구의 말이 들렸다. 답은 없었다. 이를 들은 친구 엄마의 표정은 지금도 상상만 해본다.
시간이 지나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아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친구의 어머니가 계산대 앞에 계셨다. 친구들이 어디 갔느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아이들이 다 함께 노래방으로 갔다는 걸 알았다.
피잣집을 나와 혼자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왜 아줌마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했을까. 당시엔 내내 서운했다. 감정이 소화가 된 건 그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누군가의 엄마가 된 뒤에야 그때 그 친구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어른들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생일은 기쁨도, 상처도 남긴다. 그럼에도 오래 기억에 남는 날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어른의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은 새로운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익숙한 하루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생일 같은 날은 당연히 챙기고, 심지어 없는 기념일마저 만들어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초복이면 백숙을 먹고, 꽃이 피면 꽃을 보러 가고, 단풍이 들면 산을 오르며 비 오는 날 막걸리를 마시는 것처럼. 좋아하는 이와 함께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에 작은 이름을 붙이다 보면 일상은 조금 더 선명해진다.
지구는 정확히 365일 만에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1년 중 하루를 생일이라 부른다. 천문학적으로 정확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싶어서다. 그래서 기꺼이, 생일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