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전에는 이상할 만큼 소리가 없었다.

걸음을 견디지 못한 왕」.

byHelia

편전에는 이상할 만큼 소리가 없었다.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도 그랬다. 문밖에는 분명 내관과 궁인들이 있었고,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처마 끝을 스치는 바람 소리도 들렸다. 그런데 아린 그 모든 소리가 아주 멀리 밀려난 것처럼 느꼈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은 자신의 숨소리뿐이었다.

휘의 손이 목을 감고 있었다.

세게 조르는 것은 아니었다. 숨이 완전히 막힐 만큼 힘을 주지도 않았다. 그게 더 불쾌했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겁을 주기 위해 힘을 조절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리야.”

목소리만 들으면 다정했다.

그 사실이 아린 더 싫었다.

“나는 네가 입을 다무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네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을 더 듣고 싶다.”

휘가 반 걸음 다가왔다.

아린 자연스럽게 뒤로 밀렸다. 등이 용상 가까이에 닿았다.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울음소리든, 비명이든, 아니면…….”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아린 눈을 감지 않았다.

“제발 살려 달라는 애원이든.”

그 순간 아린 알았다.

휘가 원하는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아니었다.

그는 반응을 원했다.

자신이 사람 하나를 어디까지 흔들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겁을 먹는 얼굴, 흔들리는 목소리, 살려 달라는 말. 그런 것들이 있어야 자신이 가진 힘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아린 목을 감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애원이라.”

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전하께서는 참 이상하십니다.”

“뭐라?”

“사람의 목을 조르고, 물러설 곳까지 빼앗고, 겁을 먹게 만들어 놓고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하시니.”

아린 숨을 한번 삼켰다.

목이 눌린 탓에 목소리가 조금 쉬었다.

그래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게 대화입니까?”

휘의 표정이 굳었다.

“전하께서 듣고 싶은 건 제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린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눈을 들었다.

“전하께서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확인해 줄 비명. 전하께서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증명해 줄 애원. 결국 그것뿐이지요.”

휘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러니 제가 살려 달라고 빌면 전하께서는 이기신 겁니까?”

“…….”

“목을 조른 사람이, 목이 졸린 사람에게?”

아린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런 승리가 꽤 자랑스러우신가 봅니다.”

목을 감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갑작스러웠다.

휘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더니 웃었다.

처음에는 낮았다. 이내 웃음소리가 커졌다. 편전의 높은 천장까지 올라갔다 되돌아오는 것처럼 울렸다.

“하.”

그가 고개를 숙였다.

“하하하.”

아린 웃지 않았다.

휘의 웃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웃음이 멎었다.

휘는 용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아리를 바라봤다.

“좋다.”

아린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놨으니 이제 말해 보아라.”

휘가 턱을 살짝 들었다.

“네가 두려워하지 않는다 했지?”

아린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제가 언제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까?”

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하께서는 또 듣고 싶은 대로 들으시는군요.”

“…….”

“저는 손을 놓고도 제가 전하를 두려워하는지 확인해 보시라고 했습니다. 두렵지 않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아린 솔직하게 말했다.

“두렵습니다.”

휘의 입가가 움직였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러나 아린 곧바로 말을 이었다.

“사람의 목을 아무렇지도 않게 조르는 사람을 앞에 두고 두렵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휘의 표정이 다시 멎었다.

“하지만 두렵다고 해서 전하께 애원해야 합니까?”

아리가 한 걸음 앞으로 갔다.

이번에는 휘가 밀어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두렵다고 해서 전하의 말이 옳아집니까?”

한 걸음 더.

“두렵다고 해서 제 생각까지 전하의 것이 됩니까?”

“윤아리.”

“아닙니다.”

휘가 처음으로 아리의 말을 끊지 못했다.

아린 그게 조금 이상했다.

왕이었다.

명령하면 사람들이 움직이고, 손짓 하나면 문이 열리고, 말 한마디면 누군가의 벼슬이 올라가거나 떨어진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서 겨우 몇 마디를 듣겠다고 이러고 있었다.

“전하께서 제 목을 조를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저를 죽일 수도 있겠지요.”

아린 담담하게 말했다.

“왕이 힘없는 사람 하나 죽이는 데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요.”

휘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그런데 아린 이제야 정말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무엇이든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분께서 왜 고작 제 말 한마디를 얻겠다고 이토록 애를 쓰십니까?”

침묵.

휘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아린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 전하께서 두려우신 건 제가 아니라.”

이번에는 일부러 조금 늦게 말했다.

“끝내 제 마음만큼은 마음대로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아닙니까?”

“마음.”

휘가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그러더니 용상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왔다.

아리 바로 앞까지 다가온 휘가 허리를 조금 숙였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네 마음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렵다?”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리야.”

숨결이 가까웠다.

“나는 네 마음을 원하지 않는다.”

아린 잠시 휘를 바라봤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러십니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휘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또 무엇이.”

“원하지 않는 것치고는 전하께서 너무 많은 수고를 하고 계셔서요.”

아린 하나씩 짚었다.

자신의 침묵을 견디지 못한 것.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은 것.

두려운지 확인하려 한 것.

목까지 조르면서 입을 열게 만들려 한 것.

그 모든 일을 해놓고 이제 와 마음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예.”

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믿어드리지요.”

“……뭐라?”

“사람은 대개 아무것도 아닌 것에는 이토록 열심히 해명하지 않으니까요.”

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린 한 걸음 물러났다.

“정말 제 마음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관심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십시오.”

휘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훨씬 설득력 있을 테니까요.”

잠시 뒤 휘가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없었다.

“좋다.”

뜻밖이었다.

“그리 하마.”

휘가 먼저 돌아섰다.

용상 쪽으로 걸어가며 손을 저었다.

“가거라. 오늘은 더 볼 것 없다.”

아린 군말 없이 돌아섰다.

그런데 등 뒤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리고.”

아린 멈추지 않았다.

“내일 조회에서 네 아비에게 새로 내린 직첩이 하나 있으니 기대하거라.”

그제야 걸음이 멎었다.

아비.

그 두 글자가 가슴을 찔렀다.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휘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당장 돌아서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린 깨달았다.

또 이것이다.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

아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전하.”

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 관심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시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휘의 등이 굳었다.

“그런데 채 열 걸음도 떼기 전에 제 아비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아린 웃었다.

“방법만 바꾸신 것 아닙니까.”

“…….”

“제게 직접 묻는 것으로 안 되니 이제 제 아비를 이용해서라도 제가 돌아보게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휘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었다.

아린 더 묻지 않았다.

“직첩은 내일 확인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섰다.

“관심을 끊는다는 말씀.”

한 걸음을 뗐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지켜보시지요.”

또각.

“열 걸음은 넘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뒤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린 걸었다.

하나.

둘.

셋.

일부러 세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숫자를 세고 있었다.

넷.

다섯.

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섯.

일곱.

조금 우스웠다.

왕과 궁인이 넓은 편전을 사이에 두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여덟.

문이 가까워졌다.

아린 아홉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윤아리.”

역시.

아리의 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네 아비 직첩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냐.”

아린 잠시 자신의 발끝을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화를 낼 이유도 없었다.

휘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불렀는지도 이제 알 것 같았다.

아린 돌아보지 않았다.

“전하.”

“말하라.”

“아홉입니다.”

뒤에서 아무 대답도 없었다.

“열 걸음도 못 넘기셨습니다.”

아린 들고 있던 발을 내려놓았다.

또각.

열.

그 소리가 편전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

“물론 궁금합니다.”

아린 솔직하게 말했다.

“제 아비의 일인데 어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돌아봤다.

멀리 용상 앞에 선 휘가 보였다.

“하지만 제가 궁금한 것과 전하께서 지금 당장 제게 말씀해주셔야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일 조회에서 알 수 있다 하셨지요?”

“그래.”

“그럼 내일 듣겠습니다.”

“지금 들으면 될 것을.”

“싫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린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제는 오히려 내일까지 기다려 보고 싶어 졌습니다.”

“윤아리.”

“왜요.”

“네가 지금 누구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지 잊은 모양이구나.”

“잊지 않았습니다.”

아린 곧바로 대답했다.

“전하이십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먼저 시작하셨잖습니까.”

휘의 입이 다물렸다.

아린 그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랬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쯤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아비의 직첩이라는 말이 단순한 미끼인지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전처럼 숨이 막히지는 않았다.

두려움이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두려움의 모양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휘 역시 자신과 전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사람이 떠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상대가 자신을 보지 않는 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확인하는 사람.

아린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스무 걸음에 도전해 보시겠습니까?”

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린 걸었다.

하나.

둘.

이번에는 숫자를 세지 않으려 했다.

셋.

그래도 자꾸 숫자가 떠올랐다.

넷.

다섯.

등 뒤는 조용했다.

여섯.

아린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일곱.

여덟.

아홉.

이번에는 부르지 않았다.

열.

아린 멈추지 않았다.

열하나.

열둘.

문 앞에 도착했다.

궁인이 문을 열었다.

바깥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제야 아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편전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

안쪽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윤아리.”

아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세지 않았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편전의 문이 닫혔다.

휘는 혼자 남았다.

한참 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던 그가 용상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하나.

둘.

셋.

자신도 모르게 숫자를 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손가락이 멎었다.

휘가 헛웃음을 흘렸다.

관심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라.

쉬운 일이었다.

왕에게 사람 하나 외면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아홉 걸음 전까지는.

휘는 텅 빈 편전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낮게 중얼거렸다.

“스무 걸음이라.”

잠시 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건방진 것.”

그러나 그날 밤 휘는 끝내 아리의 아비에게 내린 직첩이 무엇인지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내일이면 알게 될 일이었다.

그러니 기다리면 된다.

딱 하룻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하룻밤이,

열 걸음보다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