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에는 출구가 너무 많다

가지 않은 길

byHelia

영등포에는 출구가 너무 많았다.

혜진은 같은 자리에서 세 번째 표지판을 올려다봤다.

분명 5번 출구를 따라온 것 같은데 머리 위에는 3번 출구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매달려 있었다. 뒤로 돌아가면 조금 전 지나친 화장품 가게가 나왔다. 다시 방향을 틀자 이번에는 떡볶이 냄새가 났다.

이 냄새도 아까 맡았던 것 같았다.

혜진은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은 잘도 걸었다.

누구 하나 표지판 앞에서 고민하지 않았다. 이어폰을 꽂은 여자는 휴대전화만 내려다보며 혜진을 스쳐 지나갔고, 커다란 쇼핑백을 든 남자는 망설임 없이 오른쪽 통로로 사라졌다.

혜진만 제자리였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박정호였다.

“여보세요?”

“도착했어요?”

“네.”

“어디예요?”

혜진은 주위를 둘러봤다.

“영등포요.”

전화기 넘어가 잠시 조용해졌다.

“영등포 어디요?”

“지하요.”

“그러니까 지하 어디.”

그걸 알았으면 벌써 밖으로 나갔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지금 출구 찾고 있어요.”

“영등포 처음 와요?”

“두 번째요.”

정호가 웃었다.

“두 번째인데 어떻게 길을 그렇게 못 찾아요?”

혜진은 웃지 않았다.

“오랜만에 와서요.”

“아무 출구로나 일단 나와요. 내가 찾을 테니까.”

전화를 끊었다.

아무 출구로나 나오는 것도 출구를 찾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혜진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길을 잘 못 찾는다는 걸 알아서 일부러 서둘렀다. 그런데 결국 약속 시간에서 십 분이 지나서야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한여름의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도로 위로 햇빛이 번들거렸다.

정호는 횡단보도 옆에 서 있었다.

채팅 프로필 사진으로 본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소매 셔츠에 검은 바지. 배가 조금 나온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나이로 치면 엄마와 비슷한 연배쯤 되어 보였다.

그 사실이 혜진을 조금 안심시켰다.

인터넷에서 알게 된 사람을 직접 만나는 일이니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실제로 본 정호는 위압적이지도, 음침하지도 않았다.

길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아저씨였다.

“많이 헤맸나 봐요?”

정호가 말했다.

“네.”

“길치네.”

“좀 그래요.”

“두 번째라면서.”

또 그 말이었다.

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호가 먼저 걸었다.

“밥부터 먹어요.”

---

정호를 알게 된 것은 두 달 전이었다.

채팅방에서 우연히 말을 섞었다.

무슨 이야기로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정호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한다고 했다. 직원도 몇 명 있다고 했다.

아내와 아들도 있다고 했다.

아들은 자폐증을 앓는다고 했다.

혜진은 처음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설픈 위로를 하는 것도 이상했고, 그렇다고 자세히 묻는 것도 실례 같았다.

정호는 가끔 먼저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어려워한다고 했다.

아내가 아들을 돌보느라 고생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식은 자식이라 예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몇 번 듣다 보니 혜진의 머릿속에는 본 적도 없는 가족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정호와 비슷한 연배의 아내.

자기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아들.

그리고 그 둘을 바카라임지고 사는 평범한 가장.

그러던 어느 날 정호가 말했다.

― 딸이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혜진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 아들 있잖아요.

― 아들이랑 딸은 다르지.

― 뭐가 다른데요?

― 딸은 애교도 있고 아빠 챙겨주고 그런 게 있잖아.

혜진은 웃었다.

― 요즘 딸들이 다 그런 줄 알아요?

정호도 웃었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 우리 딸 할래요?

― 제가 왜 아저씨 딸이에요.

― 수양딸이지.

― 요즘에도 그런 게 있어요?

― 왜 없어. 마음 맞으면 가족이지.

혜진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호는 그 뒤로도 몇 번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주고 싶다고 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라고 했다.

혜진은 싫다고 하지 않았다.

좋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때의 혜진에게 거절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싫다는 말을 하면 상대가 상처받을 것 같았다. 상대방이 좋은 뜻으로 한 말을 거절하면 자신이 못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애매하게 웃었다.

정호는 그 웃음을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얼굴 한번 보자고 했다.

그래서 영등포까지 오게 됐다.

---

식당은 사람이 많았다.

두 사람은 안쪽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정호는 메뉴판을 혜진에게 밀었다.

“먹고 싶은 거 골라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무거 나가 제일 어려워.”

정호가 웃었다.

식사가 나오고 처음 얼마 동안은 별 이야기가 없었다.

정호가 사업 이야기를 했다.

요즘 경기가 어렵다느니, 사람 쓰는 일이 제일 힘들다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혜진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보다 어려 보이네.”

정호가 갑자기 말했다.

“그래요?”

“응. 실제로 보니까 더 딸 같네.”

혜진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직 딸 한다고 안 했는데요.”

농담처럼 말했다.

정호가 웃었다.

“싫다고도 안 했잖아.”

그 말이 귀에 걸렸다.

싫다고 하지 않은 것과 좋다고 한 것은 다른데.

하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정호가 물컵을 들었다.

컵을 잡을 때 새끼손가락이 살짝 들렸다.

“집사람한테도 얘기했어요.”

“제 얘기를요?”

“응.”

“왜요?”

“딸 하나 생길 것 같다고.”

혜진이 웃었다.

“너무 앞서 가시는 거 아니에요?”

“집사람도 좋아해요.”

“뭘 좋아해요. 저를 보지도 않았는데.”

“사진 보여줬지.”

혜진의 손이 잠깐 멈췄다.

“제 사진을요?”

“프로필 사진.”

“아.”

“인상 좋다고 한번 보고 싶대요.”

정호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기를 뒤집었다.

“아들도 여동생 생기면 좋아할 거고.”

“제가 아드님보다 어린지 어떻게 알아요?”

“어려요.”

대답이 너무 빨랐다.

혜진은 정호의 아들이 몇 살인지 몰랐다.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정호가 물었다.

“추석 때 뭐 해요?”

“집에 있겠죠.”

“친척들 오고?”

“아마도요.”

“우리 집에도 한번 와요.”

혜진은 물을 마시다 정호를 바라봤다.

“집에요?”

“집사람도 보고 밥도 먹고.”

“추석에요?”

“명절이니까 더 좋지.”

정호가 말했다.

“가족끼리 밥 먹는 건데.”

가족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듣기에는 너무 가까운 단어였다.

“글쎄요.”

“뭘 고민해. 영등포로 오면 내가 데리러 나올게.”

“제가 낯을 좀 가려서.”

“집사람도 편한 사람이에요.”

혜진은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호가 먼저 말했다.

“우리 집사람이 음식 진짜 잘해요. 당신 온다고 하면 엄청 할걸.”

혜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네.”

말이 먼저 나갔다.

정호가 웃었다.

“그럼 됐네.”

---

식당을 나와 헤어지려는데 정호가 봉투를 내밀었다.

“가져가요.”

“뭔데요?”

“용돈.”

혜진은 손을 뒤로 뺐다.

“안 받아요.”

“왜?”

“제가 이걸 왜 받아요.”

“아빠가 딸한테 용돈 주는 건데.”

“아직 아빠 아니잖아요.”

정호가 웃었다.

“받아.”

“진짜 괜찮아요.”

“얼마 안 돼요.”

혜진은 고개를 저었다.

정호의 표정에서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

“어른이 주는 걸 그렇게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혜진은 그 말에 손을 멈췄다.

예의.

그 단어는 이상하게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받아도 돼요.”

결국 봉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정호가 다시 웃었다.

“그렇지.”

혜진은 봉투를 가방 깊숙한 곳에 넣었다.

“추석 때 연락할게요.”

“네.”

“잊어버리지 말고.”

“알았어요.”

그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몰랐다.

---

추석날 혜진은 그 약속을 정말 잊었다.

일부러 피한 것이 아니었다.

그 뒤로 집안에 일이 생겼다. 며칠을 정신없이 보냈다. 정호에게 받은 명함은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았고 연락처도 저장하지 않았다.

봉투도 가방 안쪽에 넣어둔 채였다.

추석날 아침부터 집에는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사촌동생들은 방을 뛰어다녔다.

텔레비전 소리와 어른들 말소리가 뒤섞였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혜진은 받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울렸다.

같은 번호였다.

또 받지 않았다.

문자가 왔다.

확인하지 않았다.

사촌동생이 팔을 잡아끌었다.

“언니, 이것 좀 봐봐.”

혜진은 휴대전화를 소파 위에 던져놓았다.

한참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받았다.

“여보세요?”

잠시 침묵이 있었다.

“지금 어디예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났다.

정호였다.

혜진은 입을 다물었다.

영등포.

추석.

집.

“오늘 오기로 했잖아요.”

“아…….”

“잊었어요?”

“죄송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정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화를 내는 것보다 불편했다.

“문자를 몇 번을 보냈는데.”

“오늘 휴대전화를 잘 못 봤어요.”

“집사람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죄송해요.”

“당신 먹인다고 아침부터 음식을 잔뜩 했어요.”

혜진은 방 안을 바라봤다.

사촌동생 하나가 바닥에 엎드려 과자를 먹고 있었다.

“진짜 죄송해요.”

“안 온다고 하니까 화가 나서 음식 다 버렸어요.”

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본 적도 없는 여자가 자신 때문에 아침부터 음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전부 버렸다.

“죄송합니다.”

정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람 간의 약속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되죠.”

“네.”

“사람을 기다리게 해 놓고 연락도 없고. 기본이 안 된 거예요.”

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약속한 것은 자신이었다.

잊은 것도 자신이었다.

“죄송해요.”

그 말만 반복했다.

통화는 좋지 않게 끝났다.

혜진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사촌동생이 방문을 열었다.

“언니, 왜 안 와?”

“가.”

“응?”

“금방 갈게.”

문이 닫혔다.

혜진은 가방을 찾았다.

안쪽 주머니를 열자 봉투가 그대로 있었다.

꺼내려다가 그만뒀다.

그날 이후 정호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혜진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십삼 년이 흘렀다.

---

정호의 얼굴을 다시 본 곳은 휴대전화 화면이었다.

혜진은 퇴근길 전철 안에 있었다.

뉴스를 넘기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영등포 연쇄살인사건 피의자 검거.

기사에는 경찰서에서 나오는 남자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흰머리가 늘었다.

마스크가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혜진은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을 떼지 못했다.

어디서 봤지.

사진을 확대했다.

눈매.

이마.

귀.

기억 속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한여름 영등포.

횡단보도 옆.

반소매 셔츠.

검은 바지.

엄마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

혜진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설마.

기사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박정호.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려야 할 역이 아니었는데 문이 열리자 그냥 내렸다.

플랫폼 의자에 앉아 기사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정호는 십 년 넘게 여러 건의 여성 실종 및 살인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었다.

피해 여성 일부는 온라인을 통해 알게 된 것으로 조사됐다는 내용도 있었다.

혜진은 그 문장에서 더 내려가지 못했다.

온라인.

채팅.

영등포.

휴대전화 화면이 흔들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

그날 밤 혜진은 옷장을 뒤졌다.

왜 그러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십삼 년 전 가방을 찾고 있었다.

버렸을 수도 있었다.

이사를 몇 번이나 했으니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있었다.

옷장 가장 위쪽 상자 안에 낡은 가방 하나가 눌려 있었다.

혜진은 바닥에 앉아 지퍼를 열었다.

영수증.

오래된 립밤.

동전.

사용하지 않는 카드.

그리고 안쪽 주머니에서 누렇게 변한 봉투가 나왔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봉투를 열었다.

돈이 그대로 있었다.

십삼 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돈을 꺼내자 작은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명함이었다.

박정호.

뉴스 속 이름과 같았다.

혜진은 명함을 들고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

며칠 동안 새로운 기사가 쏟아졌다.

혜진은 읽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계속 찾아봤다.

정호가 피해자들에게 접근한 방식도 조금씩 알려졌다.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자신을 믿을 만한 어른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한 기사에서 혜진의 눈이 멈췄다.

경찰 조사 결과 박정호는 미혼으로 확인됐으며 자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혜진은 화면을 바라봤다.

한 번 읽었다.

다시 읽었다.

미혼.

자녀 없음.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

아내가 없었다.

아들도 없었다.

자폐가 있다던 아들도.

혜진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던 아내도.

추석날 음식을 잔뜩 준비했다던 여자도.

처음부터 없었다.

그 순간 십삼 년 전 전화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집사람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당신 먹인다고 아침부터 음식을 잔뜩 했어요.

안 온다고 하니까 다 버렸어요.

혜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날 자신이 영등포에 갔다면 정호가 데리러 나오기로 했다.

그다음에는?

차를 탔을 것이다.

정호가 집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아내는 없었다.

아들도 없었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정호 혼자였다.

혜진은 더 생각하지 않았다.

---

경찰에 연락했다.

명함과 봉투가 있다고 말했다.

십삼 년 전에 정호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며칠 뒤 형사 두 명이 찾아왔다.

혜진은 처음부터 이야기했다.

채팅에서 알게 된 일.

사업가라고 했던 것.

아내가 있다고 했던 것.

자폐가 있는 아들이 있다고 했던 것.

수양딸이 되어달라고 했던 것.

영등포에서 처음 만난 일.

추석에 집으로 초대받은 일.

그리고 가지 않았던 일.

형사는 마지막 부분에서 펜을 멈췄다.

“왜 안 가셨습니까?”

혜진은 잠시 생각했다.

거창한 이유를 기대하는 질문처럼 들렸다.

낌새가 이상해서.

무서워서.

의심스러워서.

그런 대답이면 좋았을 것이다.

“잊어버렸어요.”

형사가 혜진을 바라봤다.

“약속 자체를요?”

“네.”

“연락도 안 받으셨고요?”

“모르는 번호라서요. 나중에 받았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화냈어요.”

혜진은 웃지도 못하면서 입꼬리를 조금 움직였다.

“사람 사이의 약속을 가볍게 생각한다고.”

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가 음식을 잔뜩 했는데 제가 안 와서 다 버렸다고 했어요.”

이번에는 다른 형사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혜진은 그것을 봤다.

“왜요?”

“아닙니다.”

“뭔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형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정호에게 배우자나 자녀가 없었다는 건 이미 보셨죠?”

“네.”

“그 사람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 사람이 한 분 더 있습니다.”

혜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분은…….”

형사가 말을 멈췄다.

혜진은 묻지 않았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집에 직접 가신 적은 없습니까?”

“없어요.”

“차에 탄 적도?”

“없어요.”

형사가 아주 작게 말했다.

“다행입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

정호는 결국 기소됐다.

그가 저지른 일들이 하나씩 밝혀졌다.

혜진은 어느 순간부터 뉴스를 보지 않았다.

더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필요한 만큼 알고 있었다.

아내는 없었다.

아들도 없었다.

수양딸이라는 말도 혜진에게만 한 말이 아니었다.

정호는 사람마다 관계의 이름을 바꿨다.

어떤 사람에게는 친척처럼 굴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버지처럼 행동했다.

관계가 먼저 만들어지고 경계가 그다음에 무너졌다.

혜진은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한동안 ‘예의’라는 말을 싫어했다.

어른이 주는 것을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했던 말.

사람 간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기본이라고 했던 말.

모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나빴다.

정호는 틀린 말을 해서 사람을 움직이지 않았다.

맞는 말을 자기에게 유리한 순간에 사용했다.

혜진은 자신이 왜 봉투를 받았는지 기억했다.

예의가 아니라는 말을 들어서였다.

왜 추석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는지도 기억했다.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였다.

그때의 자신은 싫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싫은 일을 하는 편을 선택했다.

정호는 그런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혜진은 뒤늦게 그것이 무서웠다.

---

그해 겨울, 혜진은 다시 영등포에 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정확히는 이유가 없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전철에서 내려 개찰구를 통과했다.

지하는 여전히 복잡했다.

가게들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날 지나쳤던 화장품 가게도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혜진은 일부러 지도를 켜지 않았다.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표지판이 나타났다.

3번 출구.

5번 출구.

7번 출구.

혜진은 한쪽을 골랐다.

계단을 올라갔다.

밖으로 나오자 목적지와 반대편이었다.

혜진은 한참 서 있다가 웃었다.

“또 틀렸네.”

예전 같았으면 다시 지하로 내려갔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횡단보도가 있었다.

건너가면 됐다.

신호를 기다렸다.

십삼 년 전 정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두 번째인데 어떻게 길을 그렇게 못 찾아요?

그때는 그 말이 창피했다.

두 번이나 와놓고 길 하나 못 찾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은 두 번째 가본 길에서도 헤맨다.

열 번 가본 길에서도 방향을 잘못 잡는다.

그리고 잘못 들어간 길에서는 돌아오면 된다.

그보다 어려운 건 사람에게서 돌아서는 일이었다.

싫다고 말하는 것.

안 가겠다고 말하는 것.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상대가 화를 내더라도 마음을 바꾸는 것.

그때의 혜진은 그걸 하지 못했다.

정호가 봉투를 내밀자 받았다.

집에 오라고 하자 알겠다고 했다.

추석날 영등포로 오라고 하자 그러겠다고 했다.

끝까지 갔다면 정호가 원하는 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하나를 망쳤다.

약속을 잊었다.

혜진은 오랫동안 그것을 자신의 결함이라고 생각했다.

무바카라임했다고.

예의가 없었다고.

사람을 기다리게 했다고.

그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은 이상해서 잘못이 언제나 나쁜 곳으로만 데려가지는 않았다.

그날의 망각은 혜진의 방향을 틀었다.

초록불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움직였다.

혜진도 걸었다.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잠깐 뒤를 돌아봤다.

지하철 출입구로 사람들이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사람들이 올라왔다.

영등포에는 출구가 너무 많았다.

예전에는 그게 싫었다.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헷갈리지 않게.

잘못 나가지 않게.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출구가 많다는 것은 다른 곳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잘못 들어갔다고 끝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혜진은 길 건너편에 도착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예전 같았으면 누군지 궁금해서 받았을지도 몰랐다.

혜진은 전화를 끊었다.

곧 문자 한 통이 왔다.

택배기사였다.

혜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십삼 년 전 자신이 찾아야 했던 출구가 몇 번이었는지는 끝내 기억나지 않았다.

이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혜진은 영등포에서 길을 잃었다.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하고도 늦었다.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겠다고 했고, 받고 싶지 않은 돈을 받았다.

그리고 추석날 약속을 잊었다.

정호는 기다렸다.

아내도 아들도 없는 곳에서 혼자.

혜진은 가지 않았다.

그날만큼은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라,

끝내 그 길로 들어서지 않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