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오후의 냄새
봄은 늘 서두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서른아홉이 되어서였다.
그전까지 계절은 달력 속에 있었다. 3월이 되면 두꺼운 외투를 정리하고, 4월이면 사람들이 꽃구경을 갔다. 나는 그 사이에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약속 시간을 확인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도 별다를 것 없는 외출이었다.
오래된 서류 하나를 떼야해서 예전에 살던 동네 근처까지 갔다. 볼일은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오후 두 시 십칠 분.
집에 가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곧장 지하철역으로 갈까 하다가 건물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차갑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따뜻하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겨울 외투를 입으면 등에 땀이 날 것 같고, 얇은 옷만 입으면 그늘에서 팔을 문지르게 되는 정도였다.
그때 어디선가 냄새가 났다.
빵 냄새 같기도 했고 젖은 보도블록에서 올라오는 냄새 같기도 했다.
나는 몇 걸음 걷다가 멈췄다.
작은 세탁소와 부동산, 유리문에 메뉴 사진이 잔뜩 붙어 있는 중국집이 보였다. 그 앞을 자전거를 탄 아이가 지나갔다.
별것 없는 골목이었다.
그런데 처음 온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지하철역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예전에 살던 동네가 나온다.
굳이 갈 이유는 없었다.
그곳을 떠난 지도 오래됐고 아는 사람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건물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기억 속 장소를 다시 찾아갔다가 전혀 다른 모습에 실망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걸었다.
큰길에서 골목으로 들어서자 자동차 소리가 멀어졌다.
낮은 빌라 사이로 빨래가 널려 있었다. 어느 집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연한 분홍색 커튼이 들렸다 내려앉았다.
나는 그 커튼을 한참 봤다.
어릴 때 살던 집에도 저런 커튼이 있었다.
색깔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가 창문을 열어 놓으면 커튼이 자꾸 얼굴에 닿았고, 나는 귀찮다며 손으로 밀어냈다.
창틀에는 먼지가 많았다.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가 까맣게 묻어난 손을 옷에 닦아서 혼났던 기억도 났다.
그때의 나는 계절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
학교 가기 싫었고, 아침에 일어나기 싫었고, 준비물을 자주 잊어버렸다.
골목 끝에는 작은 빵집이 있었다.
처음 보는 가게였다.
문이 열릴 때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
나는 유리창 너머를 들여다봤다. 식빵이 철망 위에 놓여 있었고 주인은 집게로 빵을 하나씩 옮기고 있었다.
식빵 하나를 사서 나왔다.
종이봉투가 따뜻했다.
한 손으로 봉투를 안고 다시 걸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긴 것도 아니고 고민하던 일이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오늘은 당장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약속이 없었다.
그 사실이 생각보다 좋았다.
조금 더 걷자 낯익은 담벼락이 나타났다.
나는 걸음을 늦췄다.
“설마.”
담벼락 너머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였다.
교문은 바뀌어 있었다. 운동장 한쪽에는 내가 다닐 때 없었던 건물이 들어섰고 놀이기구도 전부 새것이었다.
그런데 운동장은 그대로였다.
흙바닥과 철봉, 조회대가 있던 자리.
나는 교문 밖에 서서 안을 바라봤다.
수업 중인지 운동장은 비어 있었다.
아주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운동화를 신은 작은 발.
흙투성이 양말.
교실에 들어가기 싫어서 운동장 가장자리를 빙빙 돌던 아이.
그게 나였다.
학교가 끝나도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다.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돌멩이를 주웠고, 운동화 앞코로 흙을 파헤쳤다. 이름도 모르는 풀을 뽑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그 시절 오후는 길었다.
세 시에 학교가 끝나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문방구에 들러도 됐고, 친구와 골목을 한 바퀴 돌아도 됐다. 집으로 가다가 길가에 쪼그려 앉아 한참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지금은 오후 세 시만 되어도 벌써 하루가 많이 지나갔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학교를 지나 예전 문방구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있었다.
간판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문방구였다.
“아직도 있네.”
유리문에는 색종이와 스케치북, 캐릭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딸랑.
문 위에 달린 종이 울렸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봤다.
나는 천천히 진열대를 둘러봤다.
연필과 공바카라, 지우개, 풀이 놓여 있었다.
지우개가 있는 칸에서 발이 멈췄다.
어릴 때 나는 향기 나는 지우개를 좋아했다.
딸기 모양, 포도 모양, 케이크 모양.
잘 지워지지도 않으면서 냄새가 좋다는 이유로 샀다.
엄마는 늘 말했다.
“지우개가 지우기만 잘하면 되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예쁜 게 좋은데.
진열대 한쪽에 작은 하늘색 지우개가 있었다.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집에도 지우개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한참을 들여다보다 집었다.
계산대에 올려놓자 할머니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천 원이에요.”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문방구를 나오며 포장을 뜯었다.
혹시나 해서 코끝에 가져가 봤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괜히 웃음이 났다.
옛날 같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니까.
지우개를 주머니에 넣고 학교 뒤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기억보다 모든 것이 작았다.
골목도 좁았고 담장도 낮았다.
어릴 때는 한참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길을 몇 분 만에 다 걸었다.
예전에 살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빌라가 들어서 있었다.
주소를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였다.
대문 옆에 커다란 화분이 있었고 비가 오면 계단에 물이 고였다.
여름이면 모기가 많았고 겨울이면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나는 빌라 앞에 서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럴 수도 없었다.
누군가 창문을 열었다.
철컥.
곧이어 청소기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아이가 웃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린 시절이 마냥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학교에 가기 싫었던 아침도 있었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던 날도 있었다. 울었던 날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도 있었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그 시절이 전부 좋은 기억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소한 것들은 남아 있었다.
창틀의 먼지.
계단에 고인 빗물.
집으로 돌아가던 길.
잘 지워지지도 않던 향기 나는 지우개.
정작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런 것들은 남았다.
그때 나는 서른아홉이 된 나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 나이까지 가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도 몰랐으니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보니 별것 아닌 알림이었다.
나는 화면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확인했을 것이다.
답장을 하고 시간을 보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일부러 멀리 잡았다.
작은 공원이 나왔다.
빈 벤치에 앉아 아까 산 식빵을 꺼냈다.
아직 조금 따뜻했다.
한 조각을 뜯어먹었다.
특별히 맛있는 빵은 아니었다.
벤치 앞을 아이 둘이 뛰어갔다.
한 아이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웠다.
돌멩이였다.
옆에 있던 아이가 빨리 오라고 소리쳤지만 아이는 손바닥 위에 돌을 올려놓고 한참 들여다봤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 아이에게는 지금 오후가 아주 길겠구나.
돌멩이 하나를 들여다볼 시간도 있을 만큼.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시간을 늘 부족한 것으로 생각했다.
아침에는 늦었다고 생각했고 오후에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고 생각했다. 밤에는 오늘도 한 게 없다며 하루를 계산했다.
몇 시인지.
얼마나 남았는지.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못 했는지.
하루가 끝나면 내일은 좀 더 부지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이 오면 똑같았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후 네 시 삼십일 분.
습관처럼 시간을 확인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다시 가방에 넣었다.
식빵을 한 조각 더 뜯었다.
한참 앉아 있으니 학교가 끝난 뒤 혼자 집으로 가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나는 바카라가방을 메고 길가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흙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던 것 같다.
친구들은 먼저 가버렸고 나는 혼자 남았다.
집에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 더 앉아 있었다.
손가락으로 흙을 만졌다.
그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나 보다.
사람은 이상한 것을 기억한다.
시험을 몇 점 받았는지는 잊어버리면서 집으로 가다가 만졌던 흙의 감촉은 남는다.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희미한데 문방구에서 골랐던 지우개의 모양은 기억난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하늘색 지우개가 만져졌다.
눈앞에서는 아까 돌멩이를 줍던 아이가 이번에는 민들레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남은 식빵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빈 봉투를 접어 가방에 넣었다.
공원을 나와 큰길 쪽으로 걸었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보며 걸었다.
신호등이 깜빡였다.
조금만 뛰면 건널 수 있었다.
평소 같으면 뛰었을 것이다.
버스 한 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고, 지하철 문이 닫힐까 봐 뛰고, 신호가 바뀔까 봐 뛰었다.
몇 분 빨리 도착하려고 그렇게 자주 뛰었으면서 그 몇 분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멈췄다.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차들이 지나갔다.
누군가 내 옆에서 휴대전화를 들여다봤고, 다른 사람은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나는 그냥 서 있었다.
다음 신호가 왔다.
사람들이 횡단보도로 내려섰다.
나도 그들 사이를 걸었다.
주머니 속에서 하늘색 지우개가 손끝에 닿았다.
집에 돌아가면 바카라상 위에 올려둘 생각이었다.
아마 며칠 지나면 오늘 일도 잊을 것이다.
그러다 서랍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잠깐 생각하다가 오늘 걸었던 동네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빵집에서 식빵을 샀던 일.
학교 운동장을 한참 바라봤던 일.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한 문방구가 그대로 있었던 일.
예전에 살던 집 대신 들어선 빌라 앞에서 서성였던 일.
공원에서 식빵을 먹으며 돌멩이를 들여다보는 아이를 바라봤던 일.
그 정도면 됐다.
지하철역 입구가 보였다.
나는 계단 앞에서 잠깐 멈췄다.
처음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맡았던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다시 났다.
이번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 속 지우개를 한 번 만져보고 계단을 내려갔다.
오늘은 신호 하나쯤 놓쳐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