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도 되는 밥

계란은 두 개였다

byHelia

유찬은 방 모서리를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좋아해서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벽과 벽이 만나는 곳에 등을 붙이고 있으면 적어도 뒤에서는 아무도 오지 못했다. 앞만 보고 있으면 됐다. 문이 열리는 것도, 누가 다가오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새빛의 집에 온 뒤에도 유찬은 대부분 그곳에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팔로 감싼 채 앉아 있으면 몇 시간도 버틸 수 있었다.

처음 며칠 동안 새빛은 자꾸 말을 걸었다.

배 안 고파?

씻을래?

뭐 필요한 거 없어?

유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다고 말하는 순간 그건 약점이 된다.

배고프다고 하면 음식을 가지고 장난칠 수 있고, 춥다고 하면 이불을 빼앗을 수 있고, 무섭다고 하면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들킨다.

유찬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은 처음부터 나쁘게 굴지 않는다.

처음에는 웃는다.

좋은 옷을 사주고, 맛있는 걸 먹이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달라진다.

친엄마도 그랬다.

처음에는 유찬을 안고 예쁘다고 했다.

그러다 목소리가 커졌다. 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 것까지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니 새빛이라고 다를 이유가 없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새빛이 말했다.

"이제 나 좀 믿을 때도 되지 않았냐?"

그 순간 유찬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웃기네.

한 달.

한 달이면 사람을 안다고?

유찬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나도... 똑같아."

말하고 나서 유찬 자신이 더 놀랐다.

누나.

처음이었다.

늘 새빛이라고 부르거나 아예 호칭을 생략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순간에 그 말이 튀어나왔다.

새빛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 엄마도 그랬어."

유찬은 바닥만 내려다봤다.

"착한 척하고... 잘해주는 척하고."

손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그러다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때렸다.

소리쳤다.

밥을 굶겼다.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그때의 방으로 다시 돌아갈 것 같았다.

유찬은 고개를 들었다.

"다 똑같아."

새빛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유찬은 기다렸다.

화를 내겠지.

기껏 데려와 줬더니 은혜도 모른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새빛은 유찬에게 다가오다 몇 걸음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래."

유찬의 눈썹이 움직였다.

"한 달 가지고 뭘 알겠어."

"... 뭐?"

"내가 잘못 말했네. 이제 믿을 때도 되지 않았냐고 한 거."

유찬은 새빛을 쳐다봤다.

"안 믿어도 돼."

그 말이 더 이상했다.

"나 계속 의심해도 돼. 언제 돌변하나 지켜봐도 되고."

새빛의 시선이 유찬의 손으로 내려갔다.

"대신 바닥 그만 긁어. 손톱 다 상하겠다."

유찬의 손가락이 멈췄다.

새빛은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밥은 계속 먹일 거야. 아프면 병원 데려갈 거고. 잘 데도 계속 여기야."

잠시 뒤 새빛이 말했다.

"말로 해봤자 못 믿을 거 알아. 그러니까 그냥 봐."

"뭘."

"나를."

유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 달 말고 두 달. 일 년. 네가 보고 판단해."

그날 이후 달라진 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새빛만 달라진 게 없었다.

유찬은 여전히 방 모서리에 앉았다.

며칠 뒤, 부엌에서 냄비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찬의 귀가 그쪽으로 향했다.

물이 끓고 있었다.

찬장 문이 열렸다 닫혔다.

잠시 후 달콤한 냄새가 방까지 들어왔다.

호박죽이었다.

유찬은 침을 삼켰다.

아침에는 물밖에 마시지 못했다. 전날에도 거의 먹지 못했다.

배가 아플 정도로 고팠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배고프다고 말하면 진다.

먹고 싶다고 생각해도 진다.

저기 가서 앉아도 되냐고 먼저 물어보면 더 진다.

꼬르륵.

배에서 소리가 났다.

유찬은 황급히 배를 눌렀다.

새빛이 들었을까 봐 부엌을 바라봤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서운했다.

잠시 후 새빛이 작은 그릇 하나를 들고 나왔다.

유찬에게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방과 부엌 사이에 놓인 작은 테이블 위에 호박죽을 내려놓았다. 숟가락도 옆에 뒀다.

그리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유찬은 죽을 바라봤다.

한참을 기다렸다.

먹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 저거 뭐야."

"호박죽."

"그건 나도 알아."

"그럼 왜 물어봐."

유찬은 입술을 삐죽였다.

"누구 거냐고."

"네 거."

대답이 너무 빨랐다.

"왜?"

"뭘 왜."

"왜 내 건데."

새빛이 냄비 뚜껑을 덮었다.

"내가 먹으려고 두 그릇 퍼놨겠냐."

유찬은 움직이지 않았다.

예전에도 먹으라고 해놓고 손을 뻗으면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많이 먹는다고 했다.

자기 몫까지 처먹는다고 했다.

어떤 날은 유찬이 손을 뻗는 순간 일부러 그릇을 치워버렸다.

그래서 알게 됐다.

먹으라는 말과 정말 먹어도 된다는 말은 다르다.

"유찬아."

몸이 움찔했다.

"저거 네 거야."

새빛은 싱크대 앞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내가 안 뺏어 먹어."

유찬은 한참 뒤에야 무릎을 풀었다.

일어나 벽을 짚었다.

테이블까지는 몇 걸음밖에 되지 않았다.

한 걸음.

멈췄다.

새빛을 봤다.

새빛은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한 걸음.

의자 앞에 도착했지만 바로 앉지 못했다.

숟가락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숟가락을 들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 숟갈을 떠먹었다.

따뜻했다.

달았다.

두 번째 숟갈을 먹었다.

세 번째부터는 조금 빨라졌다.

그릇이 절반쯤 비었을 때 유찬이 불렀다.

"누나."

싱크대에 있던 새빛의 손이 잠깐 멈췄다.

"왜."

"... 더 있어?"

"응."

그날 유찬은 호박죽을 두 그릇 먹었다.

며칠 후 열이 났다.

처음에는 숨겼다.

아프다고 말하는 것도 유찬에게는 약점을 내놓는 일이었다.

하지만 몸은 마음처럼 버텨주지 않았다.

결국 이불속에서 끙끙 앓다가 새빛에게 들켰다.

체온계가 이마에 닿았다.

예전 같았으면 고개부터 돌렸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허락한 것도 아니었다.

피할 힘이 없었을 뿐이었다.

유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열이 조금 내려간 뒤 새빛이 말했다.

"이제 밥 먹어도 되겠다."

유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밥.

죽이 아니라 밥이라고 했다.

제대로 된 음식.

좋은 것.

좋은 건 조심해야 했다.

배부르게 먹여놓고 토하게 할 수도 있었다. 많이 먹었다고 욕할 수도 있었다. 살쪄서 보기 싫다고 다음 날부터 굶길 수도 있었다.

유찬은 경계하는 눈으로 물었다.

"뭐... 뭐 먹는데."

관심이 아니었다.

정보 수집이었다.

메뉴를 알아야 전략을 정할 수 있었다.

많이 주면 조금만 먹는다.

적게 주면 아예 안 먹는다.

유찬이 오래 지켜온 방식이었다.

새빛은 체온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육덮밥 했어."

유찬의 눈이 조금 커졌다.

고기였다.

"... 많이 했어?"

"응."

"얼마나."

"둘이 먹고 남을 만큼."

남는다는 말에 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얼마를 먹어야 하지.

"먹을 만큼만 먹어."

유찬이 바로 물었다.

"얼마나?"

"네가 먹고 싶은 만큼."

그게 가장 어려웠다.

정답이 없었다.

차라리 밥은 다섯 숟갈, 고기는 세 점이라고 정해줬으면 좋았다. 그래야 틀리지 않을 수 있었다.

"... 남기면?"

"남기면 남기는 거지."

"다 먹으면?"

새빛이 유찬을 바라봤다.

"다 먹으면?"

"혼나?"

새빛의 표정이 멈췄다.

하지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안 혼나."

"살쪘다고도 안 해?"

"안 해."

"돼지라고도?"

"안 해."

유찬은 새빛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찾으려는 것처럼.

"먹다가 배부르면 그만 먹어."

"... 근데 맛있으면?"

"더 먹어."

유찬에게는 이상한 규칙이었다.

배가 부르면 그만 먹는다.

맛있으면 더 먹는다.

먹고 싶은 만큼 먹는다.

그게 왜 규칙인지도 모를 만큼 당연하게 새빛은 말했다.

유찬은 이불을 걷었다.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말했다.

"나 매운 거 잘 못 먹는데."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후회했다.

먹는 것까지 가리는 애.

해줘도 불평하는 애.

까다로운 애.

곧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았다.

새빛은 잠시 생각하더니 일어났다.

"그럼 계란 하나 부쳐줄게."

유찬이 멍하니 바라봤다.

"... 왜?"

"매운 거랑 같이 먹으면 좀 낫잖아."

새빛은 먼저 방을 나갔다.

유찬은 침대 끝에 앉아 열린 문을 바라봤다.

왜 화를 안 내.

왜 귀찮다고 안 해.

왜 그냥 처먹으라고 하지 않아.

궁금한 게 많았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잠시 뒤 유찬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누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부엌으로 걸어갔다.

식탁에는 밥이 두 그릇 놓여 있었다.

새빛 것 하나.

유찬 것 하나.

그릇의 크기도 같았다.

새빛은 프라이팬에 계란을 부치고 있었다.

유찬은 자기 자리를 한참 바라보다 의자를 당겼다.

달그락.

작은 소리가 났다.

새빛은 돌아보지 않았다.

유찬은 앉았다.

잠시 후 제육덮밥 위에 반숙 계란 하나가 올라왔다.

"먹어."

유찬은 숟가락을 들었다.

한 입 먹었다.

조금 매웠다.

계란을 잘라 같이 먹으니 괜찮았다.

두 숟갈.

세 숟갈.

중간에 물도 마셨다.

새빛은 맞은편에서 자기 밥을 먹었다.

유찬이 얼마나 먹는지 세지 않았다.

숟가락을 빨리 든다고 뭐라고 하지도 않았다.

유찬은 접시 가장자리에 남은 고기 한 점을 바라봤다.

배는 이미 불렀다.

먹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더 먹고 싶지는 않았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새빛이 그릇을 봤다.

유찬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다 먹었어?"

"... 응."

한 점 남았는데.

분명히 보일 텐데.

새빛은 그릇을 들었다.

"약 먹기 전에 물 좀 더 마셔."

그게 끝이었다.

남긴 고기 한 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찬은 새빛이 가져간 빈자리를 바라봤다.

아니, 완전히 빈 그릇은 아니었다.

고기 한 점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밤 유찬은 평소처럼 방 모서리에 앉았다.

달라진 건 없었다.

새빛을 믿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먼저 고개를 들었고, 새빛의 목소리가 조금만 커져도 어깨가 굳었다.

그래도 그날은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던 시간이 조금 짧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유찬은 부엌에 물을 마시러 나갔다.

싱크대 앞에 있던 새빛과 눈이 마주쳤다.

예전 같았으면 그대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번에는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냈다.

컵에 물을 따르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 식탁 위에 놓인 반찬통을 발견했다.

낮에 먹었던 제육볶음이었다.

유찬이 물었다.

"누나."

"응?"

"이거 내일도 먹어도 돼?"

새빛이 반찬통을 한번 보고 말했다.

"먹고 싶으면."

유찬은 냉장고 문을 닫았다.

"계란도?"

"해줄게."

"두 개도?"

새빛이 그제야 유찬을 봤다.

"두 개 먹고 싶어?"

유찬은 잠깐 망설였다.

먹고 싶다고 말하면 진다.

필요한 걸 말하면 약해진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 남긴 고기 한 점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많이 먹어도 혼나지 않았고, 매운 걸 못 먹는다고 말했더니 계란이 올라왔다.

유찬은 컵을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응."

새빛은 냉장고에서 계란판을 확인했다.

"있네. 두 개 해줄게."

유찬은 대답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도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문을 활짝 열어두지도 않았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부엌 불빛이 길게 들어왔다.

유찬은 침대에 누워 그 빛을 한참 바라봤다.

아직 새빛을 믿지는 않았다.

다만 내일 아침에도 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그리고 계란은 두 개였다.